나는 사할린에서 태어났으나 해방전에 있던 일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부모나 나이가 저보다 많은 주위사람들에게서 듣고 알고 해방 이후 우리 마을 조선인들의 생활은 나의 기억에 남았다…
니꼴라옙까 ( 일본명 후타마타 )라고 부르는 우리 촌은 앞에는 시내물이 흐르고 뒤에는 낮은 산들을 낀 경치 좋은 곳에 놓여있었다. 여름이면 그 산에서 풍겨오는 야생딸기 향내가 온 마을에 펴졌다. 이 때는 동네 아이들이 목에 작은 유리통을 매고 딸기 따기에 나섰다. 딸기의 맛은 현재 시장에서 파는 딸기 맛과 비교되지도 못한다. 우리는 일제조선강점시기에 먼 사할린 섬 (카라후토)에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던 노동자들의 후손들이다. 그들은 보호안전 장치가 없는 위험한 탄광, 벌목장, 철도부설장에서 <조센징> (일본 제국주의 시기 조선인을 경멸적으로 부르던 말)이라고 불리며 이름도 일본 이름으로 바뀌고 차별대우를 받으면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하였다.

일제강점기 사할린의 조선인 탄갱부들의 모습
일본 정부는 전쟁에 패배한 후에 그들을 귀국시켜 준다고 했지만 그것이 헛말이었다.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인들을 태우고 떠난 선박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렇게 조선인들은 새파란 청춘으로 사할린에 남아 모국을 그리며 고독한 삶을 보내야 했다. 그들 중 다수가 홀몸이었다. 처녀애들이 극히 부족한 시대였으니 결혼할 대상도 없었던 것 같다. 여기에서 김성애 가수의 사할린에 대한 노래의 몇 구절이 기억에 떠오른다:
이름없이 살아 온 이몸 눈물을 감추고서
타향의 하늘아래 외롭게 살았어요
밤이 오면 오늘날도 고향 생각 그리워
눈을 감고 그려본다 머나 먼 고향
언젠가는 돌아가리 어머니 나라
꿈속에 그리네 그리워라 고국산천…
우리 마을 조선인들도 소련체재의 새로운 조건에 적응하면서 새 생활을 꾸미기 시작했다. 주민들의 기본 생업은 벌목이였다. 김덕문이라는 분이 벌목소 책임자였는데 이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지도자의 수완을 타고 태어난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그의 지시를 따랐다. <뻬레왈> 목재소는 매월 계획을 초과했고 김덕문은 소련최고소베트의 영예표창장 ( 50년대 초에 이것은 큰 표창이었음)을 받은 첫 조선인들 중 하나였다. 비옷을 입고 말을 타고 다니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해방 이후 우리 마을 주민들의 생활에도 변동이 있었다. 조선 7년제 학교가 열려 우리가 공부했는데 라시아어를 모르니 큰 땅에서 파견되어 온 교사들이 러어를 가르쳤다. 일제시대에는 학교에서 조선말을 전혀 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조선 말을 한 학생은 큰 벌을 받았다. 장딴지에 매 막기, 변소청소 그리고 무거운 의자를 들고 오래동안 서 있게 했다고 한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카자흐국립대 한국어 교사 고(故) 최미옥 선생이 이야기한 바에 의하면 그의 언니가 일본 학교에서 공부했는데 하루는 온 얼굴에 잉크칠을 하고 엉엉 울면서 집에 돌아왔다고 한다. 알고보니 즉 조선말을 할 때마다 일본교사가 학생의 낯에 잉크칠을 했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에는 학생들에게 벌을 주는 현상이 전혀 없었다. 장난치는 학생을 교실에서 복도에 내 보내는 것이 가장 큰 벌이었다.

마을에는 작은 의료소도 열리고 혼합상점 (공산품과 식료품을 함께 파는 매장)도 열렸으며 날이 갈수록 상품의 가지 수도 늘어갔다.
50년대 후반기에는 중국에서 각종 통졸임, 귤도 들어오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사과가 들어왔는데 그런 향내가 나는 맛있는 사과를 그후부터 먹어 본 적이 없다. 사과 상자에는 크기에 따라 대, 중, 소라고 씌여 있었다.
소련 정부는 원하는 조선인들에게 소련국적을 권하였다. 신청서를 쓰고 한꺼번에 소련국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차례를 기다렸다. 국적을 받은 집에서는 상을 차렸다.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노래를 부르면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국적을 받지 않은 조선인들은 무국적인으로 남았으며 그들에게 소련국적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언젠가는 귀국하리라는 희망을 안고 살아간 것 같다.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할 때 겨울 방학이면 예술공연을 준비하여 산림 속에 흩어져 있는 목재소 지구(地區, 구획)들에 말수레를 타고 다니며 벌목공들 앞에서 공연하였다. 어머니들이 손수 기은 저고리, 치마를 입고 민요 '아리랑'과 '도라지'도 불렀다. 벌목공들이 사는 바라크 (막사, 임시 가건물)의 한 편에 천을 드리운 것이 무대 전부였다. 벽에는 기부금을 낸 아저씨 각자의 명단이 걸려 있었다. 그 외에도 아저씨들이 미리 구매한 선물 – 사과와 과자 상자들도 쌓여 있었다. 우리와 관람자들의 사이는 불과 1미터도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조선민요를 불렀을 때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벌목공들을 보았다. 그 때는 무슨 영문인가를 몰랐다. 철이 들어가면서 향수에 젖어있는 아저씨들이 조선민요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그들은 언젠가는 귀국하리라고 믿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철의 장막은 계속 드리워 있었고 고르바쵸브의 공개성, 개방정책이 실시되면서 한국과 외교관계가 수립되기 시작할 때까지는 수십년의 긴긴 세월이 흘러야 했다…
해방 이후 우리 마을 주민들은 모든 일에 팔걷고 나섰다. 말을 먹일 풀베기에 동네 아줌마들 모두가 일제히 나와 일본제 작은 낫으로 온 종일 허리를 굽혀 일했다. 나의 어머니는 낫으로 발가락을 벤 줄도 모르고 풀을 벴다. 집에 와서 고무장화를 벗어보니 피가 굳어져 있었다.
저녁이면 문맹퇴치 운동에 나서서 한글도 배우고 예술단을 조직하여 공연에도 참가했다.

사할린 주립 향토역사박물관. 이 박물관이 자리한 건물은 1937년, 일본의 가라후토(樺太) 도호쿠(都督, 총독부) 시대에 건축된 것으로, 당시 일본 식민지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역사적 건축물로도 평가받고 있다.
…최근에 알마티를 방문하는 한국 기자들은 해방 이후 사할린에서 해방절을 어떻게 맞이했는가고 물어본다. 우선 해방절을 가장 큰 명절로 괭장하게 쇴다고 지적하고 싶다. 기본 행사가 학교 운동장에서 진행되었는데 씨름판이 열리고 마라톤, 그네뛰기, 병낚구기 (못을 끈에 매어 병에다 넣어 올려야 한다는 전통놀이) 등 기타 시합이 벌어졌다. 경기가 끝난 뒤에는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고 노래도 부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에게 있어서 정든 사할린의 니꼴라옙까 촌은 어린 꿈을 키웠던 보금자리로 기억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남경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