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혁명적인 역사적 배경하에 1987년 4월 20일 공화국간 신문인 «레닌기치» 편집장인 한 이노겐치는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에 서신을 가지고 찾아간다. 그는 다시금 오랜 역사적 단절을 지나(남해룡이 처음으로 이를 시도 한 건 1958년이었다!) 고려인 문화와 언어의 부활에 관한 문제를 다시금 들고 일어난 것이다.
특히 그는 카자흐스탄의 고려인은 사실상 자신의 모국어를 잊어버렸으며 그로 인해 신문 편집부에 모국어를 배울 수 있게 도와달라는 고려인의 요구가 빗발친다는 점을 강조했다.
«독자들은 이러한 요청을 담은 편지를 편집국에 보냅니다.»-라고 그는 썼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 외에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그는 다음의 질문을 던졌다 «카자흐스탄에서 한국어를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곤 스스로 답한다.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고려인 어린이들이 있는 어떤 학교와 도시, 그리고 농촌마을에서도 모국어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미 40년대에 카자흐스탄 내의 마지막 고려인 학교가 문을 닫았습니다. 오늘날 55세 이하의 고려인들은 한국어를 쓸 줄 모르고, 현재 공화국 내에는 한국어 선생님과 교재가 전무합니다»
한 편집장의 편지에는 한국어 교육이 얼마나 처참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 그리고 어떤 방법을 통해서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자세히 나와있다. 그는 크즐오르다, 침켄트, 잠불, 알마아타 와 탈틔코르간 지역의 학교에 다니는 고려인 어린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것을 제안하였고 그것을 위한 한국어 교사 양성의 필요성을 피력했다.
그는 알마아타에 있는 아바이 카자흐스탄국립 사범 대학에서 조선어과를 열 것과 구식 교과서를 개편하여 재 발간할 것을 제안했다. 사실상 이런 노력은 신문 편집부의 인력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려인 라디오 발전문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인력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현지 특파원들은 러시아어로 글을 썼다. 한국어로 글을 쓰고 번역할 수 있는 기자와 편집부 직원들은 보통 48세 이상의 중년으로 그 수가 총 10명에 지나지 않았다.
«5-10년 후에는 이 사람들이 모두 퇴직하게 될 것이다»라고 한 편집장을 썼다. 그는 이러한 상황이 계속될 경우 머지 않아 카자흐스탄 내에서 이 신문을 발행할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발행하더라도 독자가 사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한 가지 매우 중요한 문제를 언급했다. 그는 소련 내 고려인이 몇 가지 중요한 역사적 원인으로 인해 한반도의 한국인들과 삶의 방식과 정신, 전통 및 문화적인 부분에 있어 약간의 차이를 가지게 되었다고 말했다. 물론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러한 변화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돌이킬 수 없는 흐름입니다. 저희가 볼 때 이 과정은 학문적 분야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카자흐스탄 공산당 아카데미 내에 2-3명으로 구성된 역사-민족학 그룹을 만들어 이 변화 과정을 연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문제는 아직까지 소련 공화국 내 어디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그의 제안은 구 소련 사회의 고려인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 있어서도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고 이후 전 연방 수준까지 올라가 매우 커다란 성과를 냈다.
이 편지에서 언급된 문제들은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심리되었다. 이후 아카데미와 교육부, 중고급 전문 교육기관부, 공화국 예산부 등의 지시가 내려졌고 그에 기반하여 후속 제안들이 도입되었다. 이 작업은 거의 일년간 지속되었고 29장의 문서자료를 남겨 피폐한 상황에 놓여있던 고려인 문화와 언어 문제를 부각시켰다.
이후 고려인 아이들이 공부하는 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고 그 밖에도 고려인 신문과 라디오를 위한 전문 교사 및 번역가 양성, 한국어 교재 및 문학서적, 카자흐스탄 고려인의 역사, 민족학, 문화를 연구하는 학술팀 구성 등의 문제가 다뤄졌다. 이와 같이 «레닌키치» 편집국장의 편지는 많은 부분에 있어 카자흐스탄 뿐만 아니라 전 CIS권 고려인의 민족적 부활의 신호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만일 1937년의 이주부터 페레스트로이카가 이루어진 1987년까지 약 50년간의 지난 소비에트 시절을 총괄한다면 전반적으로 이 신문은 소련 사회에서 고려인의 가치 있는 삶과 동시에 모든 제약과 법, 금기 및 가치에 대한 혹독한 그러나 끊임없는 투쟁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레닌키치»의 이러한 노력은 높이 평가 받아 1988년 민족 우호 훈장을 수여 받기에 이른다.
김상욱
<소련 최고소비에트가 레닌기치신문사에 수여한 민족 우호 훈장(1988년 5월 30일)>
삼월일일, 선봉, 레닌기치, 고려일보로 이어지는 100년의 역사중에는 수많은 고난만큼이나 빛나는 영광의 시간들도 있었다. 그 중에서 신문사가 소련 최고 소비에트로부터 민족 우호 훈장을 받은 것은 신문사 역사 속 많은 영광의 시간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었다.
1985년 소련 내에서 고르바초프의 개혁 움직임이 막 시작되었을 때만해도 카자흐스탄에 대한 중앙정부의 전통적인 정책은 변화가 없었다. 이는 곧 1986년 알마아타에서 발생한 12월 사태의 원인이 된다. 이 사태는 소련 해체의 시발점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카자흐스탄의 민주화 과정에 기폭제로도 작용하였다.
이 시대적 상황 속에서 고려인의 민족적인 부활 운동이 시작되었다. 모국어 재생 운동과 우리 전통과 옛 풍습을 다시 지켜나가는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물론 과거의 꾸준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