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카자흐스탄 민족회의’. 셱(‘석’씨의 현지식 발음. 이하 ‘석’) 유리 씨가 자신의 가족에 대해 이야기 할 때면 으레 사용하는 표현이다. 현재 ‘악퇴베 주 고려인 협회’의 수장직을 맡고 있는 그는 선대로부터 한민족의 피 외에도 페르시아와 코사크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그야말로 ‘이색적인 족보’의 소유자다. 그런 그는 자랑스레 스스로를 가리켜 ‘진정한 카자흐스탄인’이라 칭한다.
그의 성씨인 ‘석’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민족적 색체 덕에 그의 이름을 처음 접하는 현지인들은 곧바로 그가 고려인임을 인지한다. 하지만 아직 그 이름을 모른 채 석 유리 씨의 실물을 마주하게 될 때면 대다수의 경우 그가 어느 민족 출신인지를 놓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혼란스러워 한다. 더욱 재미있는 점은 그가 타지를 방문할 때면 –그곳이 국내이건 외국이건 간에– 현지 주민들이 그를 자신들의 동족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평소 출장이나 가족 여행차 국내외 많은 지역들을 방문하는데, 가는 곳마다 현지인 취급을 받곤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고요. 바시키르족부터 시작해서 우즈벡, 카자흐, 튀르키예, 타타르족까지 웬만한 민족명은 다 들어봤지만 유독 고려인으로 봐주시는 경우만큼은 없더군요 (웃음)”
석 유리 협회장은 카자흐스탄 서북부에 위치한 악퇴베 주, 그 중에서도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메르튁(Мәртөк) 고장에서 나고 자랐다. 그곳의 지리적 특성 덕에 그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여러 민족들로 구성된 지역민들의 다양한 문화를 자연스럽게 접하면서 성장했다. 혈통적으로 그는 부계 쪽으로는 고려인 조부모, 모계 쪽으로는 이란계 외조부와 쿠반(북캅카스) 코사크족 출신의 외조모를 두었다. 이처럼 이색적인 혈통 간의 만남이 애당초 어떻게 카자흐스탄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일까? 그 배경에는 소비에트 시대에 벌어졌던 비극적인 민족 탄압의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카자흐 땅에서 석씨 가문의 역사가 시작된 곳은 악퇴베 주 소재 흐롬타우 지역에 위치한 악좌르 촌(당시 지명 노보로시스크)이다. 바로 이곳에서 그 악몽의 1937년, 석 유리 회장의 조부모 석 니콜라이·엘리자베타 부부는 기나긴 강제 이주의 여정에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리게 된 것이다.
강제 이주 당시 고려인들은 노동자, 지식인, 예술인 등 다양한 직업과 계층이 뒤섞인 채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의 여러 지역들로 유배되어 갔다.
“지금까지도 우리 집안은 강제이주를 당했던 모든 이들의 후손들이 그러하듯 당시 자신들의 처지 역시 넉넉치 않았음에도 우리의 선친들을 따뜻이 맞이하고 보살펴 주었던 카자흐 민족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려인들의 강제이주가 자행되었던 시기가 혹한의 겨울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카자흐인들이 내밀었던 도움의 손길이 우리가 살아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자명하니까요.”
강제이주 이후 첫 봄이 찾아올 무렵, 석 회장의 조부는 자신의 본업에 적합한 환경을 찾아 거주지를 옮기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의 생전 직업은 대장장이. 주변에서는 그에게 대장간을 꾸려 나가려면 금속이 많이 나며 중공업이 활발한 지역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그렇게 니콜라이 옹은 카라간디를 자신의 가족이 살아갈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정했고, 이들 부부는 그곳에서 다섯번째 자녀이자 석 유리 회장의 아버지인 석 아나톨리를 낳았다.
성장한 아나톨리 씨는 기술자가 되었고, 직업 활동을 위해 자신의 가족이 처음 강제 이주를 당했던 흐롬타우 지역으로 건너갔다. 그렇게 그는 그곳의 자동차 정비소에서 근무하면서 자신의 부모가 카자흐 땅에 들어와 얻게 된 두 번째 고향을 몸소 체험하며 가계의 역사를 되짚어 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친구들과 유원지를 방문한 그는 그곳에서 훗날 자신의 아내가 될 류보비 바고메도바 여사를 만나게 된다. 그는 이후 두고두고 자신의 아내를 처음으로 만난 날을 회상하며 그녀의 아름다움에 한눈에 반했던 에피소드를 주변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들려주었다고 한다.
“저희 어머니께서는 모르는 사람들조차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한번쯤은 꼭 뒤돌아볼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를 소유하셨죠.” 석 유리 회장이 자랑스럽게 말한다. “아마도 외할아버님의 이란계 혈통에 외할머님 집안의 쿠반 코사크 핏줄까지 다양한 피가 만나 유전적으로 좋은 영향을 끼쳤나 봅니다.”
이란계 민족의 피가 흐르던 석 협회장의 외할아버지, 쿨란 마메도프 옹. 그가 어떠한 연고로 근동을 떠나 중앙아시아의 카자흐 땅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오늘날 직계 가족들조차 자세히 아는 바가 없다. 그저 청소년 시절, 자신의 어린 여동생을 데리고 다른 청년들과 함께 고향 땅에서 도망쳐 나왔다는 것이 알려진 사연의 전부다. 정확히 무엇이 그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가게 했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렇게 모국 땅을 뒤로 한 채 미지의 세계를 향해 여정길에 오른 소년 쿨란과 그의 일행은 운이 없게도 국경을 넘는 도중 수색대에 붙잡혔고, 국가범죄를 꾀했다는 죄목 하에 10년 징역에 처해졌다. 당시 다섯살에 불과했던 여동생은 손 쓸 틈도 없이 타인들에 의해 고아원에 보내졌는데, 그때부터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려 그녀를 찾기 위한 외조부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그 행방을 알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외할아버님께서는 한평생을 사무치는 그리움과 괴로움 속에서 사셨다고.
옥살이를 마친 석 유리 씨의 외조부는 우여곡절 끝에 흐롬타우로 건너오게 되었다. 마침 이 무렵 이곳에는 당시 소련정부가 대대적으로 자행하던 부농탄압의 표적이 된 마리야 부이보렌코 –훗날 석 협회장의 외조모가 될– 여사의 일가도 유배 와있던 상황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코사크족 특유의 아름다운 외모와 우아한 자태, 유복한 집안 환경까지 두루 갖추고 성장했던 마리야 여사는 석 협회장의 외조부와 혼인한 이후에도 한 남자의 아내, 한 집안의 안주인으로서 자애롭고 현숙한 여성의 삶을 살았다. 석 협회장 또한 생전 할머님을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다. 마리야 여사는 대조국 전쟁 시기 제빵소에서 근무하면서 전시생산 활동에 참여했으며, 종전 후 조국의 승리에 기여한 공로로 소련 정부로부터 가정전선 노동자 칭호를 수훈하기도 했다.
이렇듯 인류사를 뒤흔든 혼돈과 격동의 시대는 두 민족, 나아가 세 민족의 성씨를 한 땅 위에서 이어주었고, 그렇게 혈통과 문화의 다양성이라는 기치 아래 계속해서 번성하는 한 가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석 유리 협회장에게는 큰 누이 율리야 씨가 있다. 어머니 마메도바 류보비 여사는 간호사로 활동했으며 아버지 석 아나톨리 옹은 흐롬타우 소재 차량 정비소의 수석 기술자로 근무했다. 후에 그가 차량관리소장직에 임명됨에 따라 가족 전체가 (훗날 석 유리 씨의 고향이 될) 메르튁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로 각기 다른 문화와 외형을 가진 민족 출신의 사람들이 만나 ‘석씨’라는 한 깃발 아래 화합과 포용의 이름으로 똘똘 뭉친 운명 공동체가 탄생한 것. 저마다 성장해온 사회적·문화적 배경은 다르지만 누구보다 화목하며 강력한 단합심으로 무장된 가문을 일구어 낸 그들이다. 석 유리 협회장이 어렸을 적부터 그의 가족은 카자흐 민족의 나우르즈,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의 나브루즈, 카톨릭과 정교회의 부활절, 타타르족의 사반투이, 한민족의 설날, 그리고 불가르족을 비롯한 다른 여러 민족들의 명절까지 빠짐없이 챙기며 온 마을 주민들과 함께 즐겁고 평화로운 자리를 가지곤 했다고 한다. 이러한 집안 전통과 주변 환경은 석 유리 씨에게 평생토록 간직할 소중한 추억은 물론,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이해와 포용력을 갖춘 어른으로 성장하는데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석 유리 협회장의 아내는 불가르 민족 출신이다. 한때 결혼만큼은 고려인 여성과 하겠다는 마음을 먹기도 했지만, 운명적인 마음의 이끌림을 어찌 인력으로 거스를 수 있으랴. 친구들과 여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들른 곳에서 훗날 아내로 맞이하게 될 옐레나 마그넬리 씨를 처음 본 유리 씨는 이내 본인 또한 과거 할아버님이 이루었던 역사를 반복하게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그는 옐레나 씨에게 거침없고 자신만만하게 “당신은 내 아내가 될 것”이라 선포했다고.
다문화 가문의 며느리답게 옐레나 마그넬리 씨 또한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것 외에도 상당한 카자흐어 이해력을 갖추었으며 약간의 터키어까지 알아듣는다고 한다. 그녀는 악퇴베 주 소재의 농촌마을인 불가르카 출신이다(불가르카는 초대 카자흐스탄 이주 불가르인들이 세운 정착촌이다).
석 유리 협회장은 “누군가를 대할 때, 결코 그 사람이 속한 민족적 특징에 근거하여 그를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나쁜 개인은 있어도, 나쁜 민족이란 없다’”라는 격언에 충실하듯, 평소 그의 집안에서 가장 중히 지켜지는 가치관도 “모든 인간을 동등히 대한다”는 원칙이다.
유리 씨는 어린 시절 메르튁에서 살 때에 그의 집이 늘 많은 식객들로 북적였던 것을 기억한다. 그 중에는 특히 운전수로 일하면서 마땅히 묵을 곳이 없던 아버지의 친구분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의 부모 석 아나톨리 옹과 류보비 여사가 꾸리던 가정집은 이렇듯 늘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는, 따뜻한 환대가 가득한 곳이었다. 그 덕에 유리 씨와 그의 누이 율리야 씨도 일찍부터 민족간 친선과 화합을 몸소 체험할 수 있는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 오늘날에도 석 유리 협회장의 집안에서 차려지는 각종 명절 잔치상에는 고려인 음식은 물론 카자흐, 불가르, 체첸 등 다양한 민족들의 가지각색 요리들이 한가득 올라온다.
악퇴베 주 고려인 협회를 이끌고 있는 석 유리 협회장은 고려인 공동체 뿐만 아니라 악퇴베 지역사회 전체의 안녕과 발전을 위해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펼치고 있다. 석 협회장의 동료들은 그가 카자흐스탄 사회 속 다양한 민족 간 화합을 훌륭히 이끌어내는 것은 물론, 가장 중요한 것 – 고려인들의 전통과 정체성을 보존함에 있어서도 공헌하는 바가 지대하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현재 그의 주도 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한민족 전통문화 보존 및 발전 목적의 행사로는 대한민국의 사범들이 초빙되는 가운데 치뤄지는 정기 태권도 대회가 있다. 이러한 문화 교류를 통해 카자흐스탄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은 카자흐스탄 국민들의 환대와 이역만리 타지에서 훌륭히 살아가는 고려인 동포들의 모습에 놀라움과 기쁜 마음을 금치 못한다.
석 유리 씨가 바라본 그의 ‘선조들의 나라’, 대한민국은 오늘날 단일문화에 기반하고 있으며 미국식 생활방식을 지향하는 한국인들은 끊임없이 다양한 신기술을 성공적으로 개발해 내며 살아간다. 그는 이러한 한국인들이 카자흐스탄을 방문하면 현지의 다층·복합적이면서도 단합이 이루어져 있는 다문화 사회의 모습에 놀라워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석 유리 협회장이 통솔하는 악퇴베 주 고려인 협회에는 젊은 세대의 활발한 참여 속에 다양한 한민족 전통 행사들이 열리고 있으며 고려인 뿐만 아니라 타 민족 출신의 지역민들 사이에서도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그가 중심이 되어 운영되고 있는 고려인 공동체는 한민족의 전통에 충실하게 경로 문화가 견고히 자리 잡혀 있으며 젊은 지도자들은 늘 원로들의 값진 충고와 지도를 겸허한 자세로 경청한다. 석 유리 협회장은 바로 이처럼 위 세대를 공경하는 문화야말로 고려인들과 카자흐 민족 간 동질감과 유대감을 굳건히 유지시켜 주는 공통점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슬하에 두고 있는 세 자녀 –미론, 키라, 롤란–은 제각기 다른 성격을 가졌지만, 선조들이 물려주신 유전적 유산만큼은 아이들 모두의 내면에 동일하게 존재함을 느낀다는 석 유리 협회장. 그의 아이들 또한 다문화, 다양성으로 이루어진 가족의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앞으로 더욱 발전된 다민족 카자흐스탄 사회를 이끌어 나갈 주역들로서 활약해 나갈 모습이 무척이나 기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