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표도르 미꼬비치의 삶과 창작 이야기
작가이자 시인이며 기자로 활동하는 민 표도르 미꼬비치는 고향인 코스타나이 주뿐 아니라 그 외 지역에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현재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그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다.
민 표도르는 1962년 코스타나이 (구 쿠스타나이) 주 세미오죠르늬 구역 쿠스무룬 마을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6학년까지 쿠스무룬에서 학업을 이어간 그는 이후 코스타나이 시14호 중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 학창 시절 유도에 열정을 쏟으며 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승을 차지했던 그는 다방면으로 재능을 발휘했다. 특히 문학을 좋아하여 동시를 암송할 정도로 문학에 깊은 애정을 보였다.
민 표도르는 중학생 시절부터 이미 시문학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었다. 왜서인지 밤중에 창작적 생각이 머리속에서 더 잘 맴돌았다. 표도르는 깊은 밤에 조용한 방에 앉아 시구절을 쓰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종이를 구겨버리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아침에 청소하려고 잠이 깊이 든 아들의 방에 들어온 어머니는 방 바닥에 흩어진 종이들을 하나하나 주어서 손바닥으로 죽죽 펴고 책장에 넣어두곤 했다.
“얘야, 네가 밤 새 쓴 글들을 주워 책상에 넣어두었다. 나중에 필요할지 모르잖니” 어머니는 아침이면 이렇게 따뜻하게 말씀하셨다.
민 표도르는 7학년 때 자신이 쓴 <위대한 성취의 시대>라는 시를 문학 교사 알라 이바노브나에게 보여주었다. 교사는 아무 말 없이 표도르를 교장실로 데려가 시를 낭송하게 했다. 이 시는 애국심과 시대정신이 담겨 교장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는 교사에게 전교생 앞에서 이 시를 낭독하도록 지시했다. 표도르는 자신의 시가 교사와 학생들 앞에서 낭독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한편으로는 자부심을 느끼며, 이 사건이 자신의 창작 활동에 있어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민 표도르 미꼬비치의 작품 세계는 조국에 대한 애착심, 인간애, 그리고 동향인의 삶을 주요 주제로 삼고 있다. 그는 현재 코스타나이 시 원로회에서 사회기자로 활동하며 노인들의 이야기를 포함한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민 표도르는 자신이 쓴 첫 수필을 특별히 소중히 여긴다. 그 이유는 수필의 내용이 그의 가족사와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작품의 주인공은 고령자 이스마굴로바 누르비케 이만바이로 (Исмагулова Нурбике Иманбай-кызы), 그녀는 고려인들에게 비극적인 시기로 기억되는 1937년 늦가을에 작가의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네 딸을 집으로 받아들였다. 네 딸 중 둘째가 바로 민 표도르의 어머니였다.
수년이 흐른 뒤, 민 표도르의 어머니는 우연히 누르비케 여사를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과거에 그녀에게 큰 도움을 받았던 일을 떠올렸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누르비케 여사는 민표도르를 친아들처럼 여기며 보살폈다.
“누르비케 할머니께 오래 사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민 표도르는 회상한다. “제가 할머니께 약속드렸어요. 100 세가 되시면 시 한 편을 정성껏 바치겠다고요. 할머니는 ‘네가 약속을 지키는지 하늘나라에서도 내려다볼 거야’라고 말씀하셨죠”.
누르비케 여사가 돌아가신 뒤, 40일째 되는 새벽에 문득 깨어난 민 표도르는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을 떠올리며 자연스럽게 시 구절을 써 내려갔다. 이 시는 이후 카자흐어로 번역되어 공화국 감사의 날을 비롯해 여러 공식 행사에서 낭독되었다.
민 표도르는 자신의 문학적 열정이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믿는다. 외할아버지가 시인이었고, 아버지의 친척들 중에도 문학 활동을 했던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민 표도르 미꼬비치는 2011년 <선령의 상징>이라는 시집을 출판했으며, 이어 <인간이란 이름을 지니였다면> 소설집도 출판했다. 2015년에는 <친선의 길을 따라>, 2017년에는 <코스타나이 땅의 고려인들> 4권을 발행하며 활발한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코스타나이 주 <고려일보> 특파기자와 코스타나이 시청 원로회 사회기자로 활동하면서 다채로운 기사를 많이 쓰고 있다. 또한 지역 및 주 출판물에 자주 글을 기고하며 2016년부터는 카자흐스탄 기자동맹의 정식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민 표도르의 인생 여정은 군 복무에서 시작해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며 결코 쉽지 않은 길을 걸어온 기록이다. 평발로 인해 건설대대에서 복무한 그는 스베르들롭스크 주 니즈니-타길에서 2년간 목재가공공장에서 근무했다. 그의 사진은 명예게시판에 자주 올랐을 정도로 우수한 성과를 인정받아 자동차 운전기사 강습까지 수료했다.
제대 후 민 표도르는 구두공장에 취직했다. 처음에는 단순 포장 업무를 맡았으나, 성실한 태도를 인정받아 6개월 만에 마스터로 승진하여 구두 제작 부서로 이동했다. 그는 17년 동안 매월 생산 계획을 초과 달성하며 구두공장에서 꾸준히 일했다.
1980년대에는 고려인들의 야채 재배 운동이 한창일 때, 코스타나이 주 폐도롭스키 구 차빠에브 명칭 김 세르게이네 브리가다에서 일하며 지역 발전에 기여했다. 이후 1987년부터 1989년까지는 디젤 엔진 공장에서 3급 철공으로 근무했다. 현재 그는 <베카-스트로이> 건설회사에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민 표도르는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며 어디서든 책임감 있는 태도로 생산 선구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어떤 일이든 꺼리지 않고 도전하며 성과를 만들어냈다. 특히 많은 이들이 어려움을 겪었던 1990년대, 그는 산후휴가 중이던 아내 굴나르와 함께 피로시키 (러시아 빵), 베고자 (한국 찐빵 유사함), 만띄 (만두), 벨랴시 (고기 빵) 등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시장에서 판매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민 표도르는 노동에 대한 애착심이 아버지로부터 물러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몇 가지 역사적 서류를 보기로 하자.
1944년5월1일, 명령서26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민미익이 이끄는 브리가다 (조) 4호는 4월의 실적을 140%로 달성하여 전국 순회 붉은 기를 받을 권리를 쟁취했다. 이에 따라 상기 브리가다에 순회 붉은 기를 전달할 것을 명령한다».
코스타나이 주 금렵으로 지정된 나우르숨스키 구역 국립공원장 게라시모프.
또한, 같은 해 11월6일자 명령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생산에서 모범을 보인 다음의 우수한 일꾼에게 값진 선물 및 상금을 수여합니다.
민 미익 – 생산 계획 284%로 초과 달성…»
코스타나이 주 금렵으로 지정된 나우르숨스키 구역 국립공원장 게라시모프.
민표도르는 이러한 중요한 서류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어려웠던 시기에 생산과제를 284%로 초과 달성했다는 기록은 아버지의 그 시절의 노력과 헌신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전국 순회 붉은 기를 받는다는 것은 국가 차원에서 가장 우수한 어로 집단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이와 함께 민미익이 1945년5월14일, 두 살 된 ‘갈까 (Галка)' 이름을 가진 암송아지를 선물로 받았다는 사실도 별도의 문서로 확인되고 있다.
민 표도르의 아버지 민미익은 독특하고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표도르의 할아버지는 1910년3.1 운동에 참가한 죄로 일본 경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이후 그의 할머니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조선을 떠나 친척이 살던 중국 광저우에 정착했다. 임신 중이었던 할머니는 바로 이곳에서 민미익을 출산했다. 민미익이 다섯 살이 되던 해, 샤올린 수도원에서 살던 그의 삼촌 민명기가 민미익을 데리고 가 키웠다. 민미익은 샤올린에서 16세까지 머물며 우슈를 배우고 신체를 단련했으며, 동시에 침술을 익혔다. 이후 1926년, 아버지와 할머니를 비롯한 외가집 친척들은 평양으로 가서 2년정도 살다가 1928년에 러시아 연해주 푸짜찌노 마을로 이주했다. 그러나 1937년 강제이주 정책으로 인해 결국 카자흐스탄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카자흐스탄에 정착한 민미익은 익힌 침술을 활용해 고려인들을 무료로 치료하며 사람들에게 '고려 의사'로 불렸다. 그는 동침, 은침, 금침을 헝겊에 싸서 소중히 보관하곤 했는데, 그 모습이 아들 표도르의 기억에 깊이 남아 있다. 그러나 민미익이 세상을 떠난 뒤, 이 귀중한 침술 도구들은 행방불명되었다. 돈을 주고 사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고 한다. 표도르는 누군가가 이를 훔쳐갔다고 생각하고 있다. 민미익은 동정심이 깊고 헌신적인 의사로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의 할아버지가 돌아간지 40년째 되던 해, 그에게 치료를 받았던 사람들이 카자흐스탄뿐 아니라 이스라엘, 우크라이나, 러시아에서도 찾아와 감사의 뜻을 전했다.
민 표도르 미꼬비치는 평생을 두고 사람들을 위해 선한 일을 하셨던 아버지를 본받아, 자신 역시 가능한 한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격언처럼, 그는 인생이 안겨주는 크고 작은 어려움들을 대담하게 극복하며 살아왔다. 현재 그는 아내 굴나르와 함께 두 아들을 키우고 두 손자를 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맏아들 드미트리는 한국에서 근무 중이며, 작은아들 발레리는 고향 도시에서 한국자동차를 수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창작품이 있으신가요?'' 질문에 그는 미소를 띠며 답했다. «사실 비밀로 하려 했는데, 기자님께만 살짝 말씀드릴게요. 제목은 <부엉이의 불안스러운 울음소리>입니다. 이 작품은 고난의 길을 걸어온 제 어머니의 삶을 담아낼 예정입니다».
'다리가 기자를 먹여 살린다'는 말이 있다. 민 표도르 미꼬비치는 오늘도 독자들을 위한 흥미로운 창작물을 준비하며 끊임없이 탐구의 길을 걷고 있다.
남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