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사람에겐 아버지, 윗사람에겐 친형제와도 같았던 이, 한 표트르
우리 삶이 참으로 덧없이 흘러간다는 깨달음은 대개 인생의 종착지에 다다랐을 때야 비로소 찾아온다. 그마저도 모든 이에게 허락되는 깨달음은 아니다. 삶이 이토록 속절없이 저문 뒤에 남는 것은 결국 무엇일까. 오직 그 사람에 대한 기억과 그가 남긴 발자취뿐이다.
실로 뜨겁고 치열하게 살다 간 인물들의 삶은 밤하늘을 스치는 유성처럼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 짧은 시간 동안 실로 방대하고도 가치 있는 일들을 기어이 해내고야 만다.
남카자흐스탄 주(州) 심켄트 출신의 한 표트르 마카로비치(Хан Петр Макарович)의 삶이 바로 그러했다. 심켄트와 인근 지역의 오랜 주민들은 그를 무엇보다 ‘남카자흐스탄 주 고려인 민족문화센터’의 초대 회장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문화센터 회장이라는 직함 외에도 지역 사회 발전에 기여한 굵직한 업적들이 수없이 많다. 그가 일생 동안 남겼던 헌신의 궤적을 연대기 순으로 되짚어본다.
역경: 15세 소년이 마주한 강제이주의 비극
한 표트르 옹은 1922년 11월 11일 러시아 극동 지방에서 태어났다. 1938년 그가 살던 지역은 기존의 극동지방에서 분리, 연해주(프리모리예 지방)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당시 고려인들에게 이러한 행정 구역의 변화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그 전해인 1937년부터 한 민족 전체를 뒤흔든 거대한 비극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해, 하루아침에 고려인들은 피와 땀으로 힘겹게 일구었던 삶의 터전에서 강제로 ‘뿌리 뽑히듯’ 끌려 나와 영문도 모른 채 미지의 땅으로 보내졌다.
대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한 민족 전체가 권력 앞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러한 가혹한 탄압이 주어졌단 말인가. 정권이 내세운 표면상의 구실은 명백했다. 당시 고려인들은 극동 지역의 팽팽한 정치적 긴장 속에서 정세의 인질이나 다름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일본 군국주의와의 전쟁 조짐이 뚜렷해지자, 소련 당국은 현지 고려인들이 일본에 협력해 간첩 활동을 할 수 있다고 의심했다.
그리하여 소비에트 정권은 그들을 극동에서 아득히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추방했다. 일반 객차도 아닌, 최소한의 편의시설조차 없는 차가운 화물열차에 그들을 실은 채로. 이 혹독한 이동 과정에서 수많은 노인과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슬퍼할 시간도,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극동에서 끌려 나온 고려인들은 1937년 늦가을, 카자흐스탄의 초원 지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누군가는 다시 크질오르다주로, 또 누군가는 탈디쿠르간주로 뿔뿔이 보내졌다. 이들에게 처해진 대우는 그야말로 ‘각자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식의 방치였다. 카자흐인들이 아무런 대가 없이 베풀어준 자비와 인류애, 그리고 온정이 없었다면 당시 고려인을 비롯해 이 황무지로 유배 당했던 여러 소수민족의 생존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표트르의 나이는 불과 15세였다. 그 시절의 아이들은 너무나 일찍 철이 들어야만 했다. 이 세대는 농업 집단화의 폐해와 스탈린의 탄압, 그리고 대조국 전쟁(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의 혹독한 재건기까지, 역사의 모진 풍파를 온몸으로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소년 표트르는 어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들판으로 나가 일했다. 끈질기고 근면한 민족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고려인들은 척박한 황무지에서도 쌀과 밀, 옥수수, 채소를 훌륭하게 길러내며 점차 삶의 터전을 잡아갔다. 그러나 겨우 찾아온 평화도 잠시, 제2차 세계대전·대조국 전쟁이라는 또 다른 거대한 재앙이 닥쳐왔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배움을 이어간 표트르는 1944년 농업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청년의 나이에 탈디쿠르간 주 카라탈 구역에 있는 ‘프리모레츠’ 집단농장의 부회장으로 임명되며 본격적인 사회 활동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탈디쿠르간 주 출신이자 고려인 이주민 가정에서 자란 역사학자 김 게르만 교수는 자신의 저서『고려인 이민사(История иммиграции корейцев)』를 통해 당시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우슈토베 주변에는 ‘달니 보스토크(극동)’, ‘프리모레츠(연해주人)’, ‘도스치줴니예(업적)’, ‘레닌스키 푸치(레닌의 길)’ 등 10여 개의 고려인 집단농장이 형성되어 있었고, 물론 그곳들에는 예외 없이 고려인들이 모여 살았다. 실제 자리 잡은 중앙아시아의 풍경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던 이 이색적인 이름들(‘극동’, ‘연해주인’)만이, 우리 모두의 고향이 원래 어디였는지를 가만히 상기시켜 줄 뿐이었다.”
남카자흐스탄 지역의 뛰어난 행정가로 두각을 나타내다
30대에 접어든 한 표트르는 1952년 남카자흐스탄 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이곳에서 그는 침켄트(現 심켄트) 주 일리체프스크 구역의 집단농장 ‘프로그레스’ 부회장직을 시작으로 이후 구역 당위원회 서기까지 역임하며 유능한 행정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가 당의 요직을 맡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한 표트르는 1957년부터 1961년까지 알마아타(現 알마티) 고등당학교에서 수학하고 우등으로 졸업했다. 그가 졸업한 1961년은 소련이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를 배출하고 농업 혁신을 단행하는 등 국가 전반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유독 특별한 해이기도 했다.
배움을 마친 그는 남카자흐스탄 지역의 핵심 농·산업 현장을 두루 책임지기 시작했고 1973년까지 마크타아랄 구역 ‘슬라뱐스키’ 소브호스(국영농장), 사이람 구역 ‘나보이’ 소브호스, 레닌 구역 ‘카지구르트스키’ 소브호스 등의 책임자로 근무했다. 이어 1973년부터 1976년까지는 바담 기계화 국유림을 이끌었으며 1977년부터 1986년까지는 침켄트 기계화 식물보호소장을 역임하며 지역 농업 및 산업 발전에 헌신했다. 그가 이끈 사업장들은 매번 뛰어난 성과를 거두며 소비에트 연방 농업부로부터 수시로 최우수 깃발을 수훈하는 영예를 안았다.
<한> 운하
그의 행적 중 가장 널리 회고되는 것은 단연 ‘한 운하(Хан-канал)’ 건설에 얽힌 일화다. 당시 상황을 곁에서 생생하게 지켜보았던 언론인 고(故) 리 블라디미르의 미망인 마르지야 오마로바는 이렇게 증언했다.
“남카자흐스탄 주 사이람 구역 카라불락 마을의 집단농장 총괄책임자를 지낼 당시, 한 표트르 마카로비치는 비옥한 토지가 농업용수 부족으로 제대로 결실을 내지 못하는 것을 두고 몹시 안타까워했습니다. 철저히 현장을 분석한 그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지요. ‘이곳 주민들은 근면하고 땅은 비옥하여 풍작을 이룰 수 있지만, 농업용수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렇다, 운하가 필요하다! 매우 어려운 과제이지만, 이들과 함께라면 해낼 수 있다!’라고요.”
뛰어난 조직력과 당원으로서의 굳은 책임감을 지녔던 한 표트르는 수자원 관리자들이 참석한 구역 당위원회 회의에서 과감히 선언했다. 어떤 기관에서든 이 사업의 타당성을 입증해 보일 것이며, 설령 실패할 경우 지금껏 자신이 받았던 모든 국가 훈장과 당원증을 반납해서라도 카라불락과 인근 마을 주민들을 위한 ‘대형 관개 운하’ 건설 권리를 지켜내겠노라고 말이다.
그리고 같은 시각, 당 청사 밖에서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던 주민 대표단 역시 한목소리로 외쳤다. “우리는 운하를 원한다! 우리가 직접 만들겠다!”
이러한 완강한 결의 앞에 당위원회 관계자들도 끝내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집단농장 회장의 굳은 신념과 4만여 카라불락 주민들의 절박한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기적 같은 건설 허가가 떨어졌다.
카라불락 주민들은 고대부터 내려온 카자흐 민족의 전통 공동체 협동 관습인 ‘아사르(Асар)’ 정신에 기초하여 자발적으로 힘을 모았다. 개인이나 소규모의 집단이 감당하기 힘든 큰일을 온 공동체가 무상으로 돕는 이 연대의 힘으로 주민들은 직접 삽을 들고 마침내 대형 운하를 완공해 냈다.
이들은 이 위대한 역사를 앞장서 이끌어낸 한 표트르 옹을 향한 깊은 경의와 감사를 담아 본 시설을 ‘한 운하(Хан-канал)’라 명명했다. 그리고 이 명칭은 국가 공식 등록부와 지도에까지 그대로 등재되었다. 이 기적 같은 일이 실현된 것은 1980년대 중반 무렵이었다.
한 표트르 옹은 평생 모든 일에 늘 이러한 자세로 임했다. 개인의 영달이나 상급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비롯한 고려인 동포들을 따뜻하게 품어주고 길러준 제2의 조국, 카자흐스탄과 그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들을 향한 순수한 헌신이 그가 평생을 움직인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남카자흐스탄 주 교육계 인사이자 심켄트 소재 무사바예프 김나지움의 박 로자 교장은 그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비록 생전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지만, 한 표트르 마카로비치 옹이 뿌려둔 선행과 위대한 업적들에 대해서는 귀가 닳도록 들었습니다. 남카자흐스탄 주 고려인 민족문화센터의 초대 회장이기도 했던 그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존재였습니다. 대단히 박식하고 애국심이 강하면서도, 한없이 겸손한 분이셨지요.
운하 건설에 얽힌 비화를 조금 더 보태자면, 당시 그는 지역의 고질적인 농업용수 문제를 해결할 대안이 도저히 보이지 않자,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아산바이 아스카로프 당시 주당위원회 제1서기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수로를 건설하지 않고는 이 집단농장이 살아갈 길이 없다’며 허가해달라는 간청에, 서기는 ‘사정은 이해하지만 당장 지원해 줄 예산이 없다’고 했지요. 이에 표트르 옹은 테이블 위에 자신의 평생이 담긴 메달과 훈장들을 꺼내놓으며 ‘실패 시 이 모든 것을 반납하겠으니 허가만 해주시오. 그러면 주민들과 함께 맨손으로 모든 것을 알아서 짓겠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진심 어린 호소에 마음이 동한 아스카로프 서기는 ‘훈장은 도로 넣어두고, 운하 건설을 시작하라’며 마침내 승인을 내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카라불락에 건설된 이 수로는 오늘날까지도 ‘한 운하’라는 이름으로 흐르며 주민들의 젖줄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설령 이 물길에 깃든 역사적 배경을 다 알지 못하는 세대일지라도 말입니다.
언젠가 저는 지역 행정부 내무정책부장과 함께 카라불락 지역에서 발생한 민족 간 갈등을 중재하는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그 자리에서 저는 분쟁 당사자들에게 바로 이 ‘한 운하’ 일화를 들려주었습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민족을 가리지 않고 오직 조국과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함께 땀 흘렸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내가 나고 자란 이 땅에 기여하는 삶이다’라고요. 이 호소는 얼어붙었던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다행히 갈등은 평화롭게 가라앉았습니다. 바로 이처럼 우리 원로들이 남긴 훌륭한 삶의 궤적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청년들을 가르치는 교훈으로 쓰여야 합니다.”
생전 표트르 옹의 동료이자 지역 농업 행정의 전설적인 수장이었던 고(故) 리 보리스 그리고리에비치의 딸, 올가 씨 역시 그에 대한 기억을 담담히 꺼내놓는다.
“한 표트르 옹의 인생에서 일은 언제나 늘 최우선 순위에 있었습니다. 지역 지도부는 가장 어렵고 낙후된 현장이 생길 때마다 어김없이 그를 보냈고, 그는 발령받는 곳마다 쓰러져 가던 농장들을 구해내며 그 무거운 신뢰에 항상 보답해 냈습니다.”
고려인 민족문화센터
1989년 ‘페레스트로이카(개혁)’의 물결 속에서 심켄트에도 여러 민족문화센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는 거대한 변화의 서막이었다. 그간 모국어와 문화적 전통을 잃고 살아가던 소수 민족들이 저마다의 언어와 풍습을 부활시킬 권리를 얻게 된 것이다. 고려인 동포들 역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표트르 한은 리 텐한, 김 V., 최 A., 리 V. 등 선구적인 활동가들과 힘을 모아 고려인 문화센터를 설립하는 데 앞장섰으며, 이 단체의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렇게 출범한 고려인 문화센터의 목표는 명확했다. 바로 남카자흐스탄 지역의 고려인들을 결속시키고 고유의 풍습과 전통을 부활·보존시키며 한민족의 말을 배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초기 몇 년 만에 지역 내 고려인 동포 1,200여 명이 회원으로 동참했다. 마크타아랄, 제티사이, 사리아가쉬, 사이람, 톨레비 구역에 차례로 지부가 개설되었고, 심켄트 제8학교와 제9학교 중등부에는 수십 개의 한글 학습 반이 마련되었다. 남카자흐스탄 주 고려인 문화센터의 활동은 이렇듯 빠르게 활기를 띠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러한 결실 속에서 주카자흐스탄 한국 대사가 직접 연락을 취해 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대사는 모국어 교육과 고려인 문화·전통 보존에 기여한 표트르 옹의 공로를 기려 대한민국 정부가 그에게 수여하는 ‘우정훈장’ 서훈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이 훈장을 직접 가슴에 달지 못했다. 1996년 1월 16일, 한 표트르 옹은 세상을 떠났다. 이 값진 훈장은 결국 그의 자녀들에게 대신 전달되었다. 타계할 당시 그는 네 자녀와 다섯 손주, 그리고 증손주를 둔 향년 74세의 원로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30년이 지났지만, 오늘날 남카자흐스탄 주 고려인 문화센터가 이룩한 모든 성과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서훈과 평가
세간의 평가와 인정이라는 측면에서 한 표트르 옹의 삶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주민들의 깊은 신망을 얻었으며, 국가 역시 그의 공헌을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그를 가리켜 “인간적이고 공정하면서도 일에 있어서는 엄격했으며, 말만 앞서는 이를 멀리했다”고 회고한다. 일터에서 아랫사람들은 그를 아버지처럼 따랐고, 동료와 윗사람들은 그를 친형제처럼 신뢰했다. 그는 오늘날 보기 드문 철저하고 도덕적인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가 남긴 훈장과 메달은 이러한 평생의 행적을 증명한다. 한 표트르 옹은 ‘노동적기훈장’, 두 개의 ‘명예표지훈장’을 비롯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여하는 ‘우정훈장’까지 수훈했다. 또한 ‘1941-1945년 대조국전쟁 노고 메달’, ‘레닌 탄생 100주년 기념 메달’을 비롯해 총 5개의 메달이 그의 상훈 목록에 올라 있다.
그는 카자흐스탄 공화국 공로 농업인이기도 했다. 1995년에는 남카자흐스탄 주 행정부가 수여하는 인도주의 상인 ‘바우이르말’을 수상했다. 이외에도 학교와 아동 기관을 후원한 공로로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민교육 우수자’ 및 ‘소련 민방위 우수자’ 휘장을 받는 등 평생에 걸쳐 수많은 메달과 표창을 전해 받았다.
에필로그

필자가 글의 서두에서 ‘사람이 삶의 여정을 마친 뒤 세상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자문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가장 바람직한 답은 그를 향한 고마운 기억과 그가 남긴 선행일 테다. 표트르 옹의 삶이 바로 그러했다.
그의 손녀 한 나탈리야 씨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할아버님은 평소 엄격하고 말수가 적으셨지만, 가족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은퇴하신 뒤에도 오직 고려인 문화의 부활과 청년들의 전통 계승만을 생각하며 온 마음을 쏟으셨지요.
현직에서 물러나신 뒤에도 사회공헌 활동에 늘 앞장서셨는데, 특히 문화센터 설립 논의가 시작되었을 때 할아버지는 그 일에 온전히 몰입하셨습니다. 모국 문화를 되살리는 데 기여하고, 젊은이들이 한민족의 전통을 배워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할아버지에게 영혼과 마음을 채워주는 가장 큰 행복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에게 할아버지는 삶의 나침반이자 지향점입니다. 저는 늘 제 삶을 할아버지의 삶에 비추어 보며 힘든 선택의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할아버지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자문해 보곤 합니다. 그러면 언제나 한결같은 대답이 들려옵니다. ‘양심에 어긋남 없이 행동하라’는 그 묵직한 가르침 말입니다.”
(러시아어 원문: 파리다 샤라풋지노바/Otyrar.kz)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