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년대부터 극동의 프리모르스키 (연해주)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한 한인들은 그 지역의 다른 아시아 민족들과 구별하기 쉬웠다. 바로 흰옷 때문이었다. 이들은 "백조"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멀리서 보면 검은 갓을 쓴 흰색 옷차림의 모습이 실제로 백조를 연상케 했기 때문이다.
프르제발스키는 1867년부터 1869년까지의 우수리 지역 여행기에서 한인들을 "지독히 더러운" 중국인들과 대조하며, 흰색 의복 선택이 "청결에 대한 사랑"과 근면함을 나타낸다고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이 흰옷에는 극동 지역 한인의 역사에서 슬픈 한 장면이 숨어 있다. 바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수십 년 동안 지속된 "백조 사냥"이라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분명히 비극적이었다.
한인들은 흰옷 때문에 멀리서도 쉽게 눈에 띄었고, 이는 그들을 군인, 약탈자, 밀렵꾼의 표적으로 만들었다. 블라디슬라프 아르세니예프는 그의 책 <우수리 지역 탐험기>에서 1906년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산업가 (당시 모피 사냥꾼들을 이렇게 불렀다)’는 사냥을 위해 타이가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생업’을 위해 들어간다. 그는 총 외에도 삽과 산을 탐사하는 데 쓰이는 화학 약품을 들고 다닌다. 그는 금을 찾지만, 기회가 되면 ‘수멧닭/‘코사치’ (중국인)’나 ‘백조 (한인)’를 사냥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다름 사람의 배를 훔치거나 소를 죽여 그 고기를 사슴고기로 속여 팔기도 한다.’’
이후 1928년10월9일, 미하일 프리쉬빈과의 대화에서 아르세니예프는 자신의 일기에 “타이가 사람들 사이에 형성된 풍조에서는 ‘동물' 백조와 흰옷을 입은 ‘사람’ 백조(한인)를 사냥하는 것에는 별다른 차이점이 없는 듯이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기록했다. 1896년의 여행기에서 가린-미하일롭스키도 비슷한 내용을 쓴다.
‘’아주 최근까지 ‘흰 백조’, 즉 흰옷을 입고 좁다랗고 우스꽝스러운 모양의 검은 모자를 쓴 한인들을 사냥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4년 전, 어떤 병사가 바위가 많은 길을 따라 줄지어 걷고 있던 네 ‘마리’를 쏴 죽이고는 읊조렸다: ‘저들을 딱히 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잖은가? 어차피 저들에게 영혼 따위는 없고, 그저 죽으면 한 줌의 기체나 뿜어내며 삭아 없어질 존재에 불과한데 말일쎄’.”
그는 또 현지 한인들에게 들은 한 이야기를 덧붙인다.
‘’1896년 늦은 봄, 조선 국적의 현이라는 사람이 크라스노예 마을 그 부근의 세가르티 (Сегарти) 촌 근처 센데늪이 (Сенденыпи) 호숫가에서 얼어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의 먼 친척들은 이 소식을 현의 아내와 아들에게 전했다. 16세 그의 아들은 다른 두 명의 한인과 함께 시신을 수습하러 갔다. 아들이 아버지의 시신 위로 몸을 숙이는 순간, 멀리 1km 떨어진 곳에서 대기 중이던 병사들의 총성이 들렸고, 이 소년은 이마에 총상을 입고 아버지의 시신 위에 쓰러져 즉사했다. 소년과 함께 온 한인 두 명은 도망가 버렸다. 조사 결과 병사들은 한인들을 백조로 착각해 쏜 것으로 밝혀졌고, 사건은 종결되었다.’’
안타깝게도 소수의 이방민족들을 대상으로 이 같은 인간성 말살 행위가 버젓이 자행되던 작태는 비단 이 지역 내에서만 만연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제정 러시아가 체계적·전방위적으로 식민화 정책을 펼치던 곳들 전반에 걸쳐 공통적으로 나타나던 현상이었다. 실제로 이러한 풍조에서 비롯된 사례들은 이보다 한차례 앞서 이루어졌던 중앙아시아 및 캅카스 지역에 대한 러시아 제국의 식민화 과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제정 러시아인들에게 있어 당시 이 모든 식민 개척지들에서 살아가던 비(非)슬라브계 이방민족들은 공통적으로 '여태껏 문명화를 이루지 못한, 덜 떨어지고 미개한 족속' 쯤의 이미지로 비추어졌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자연스레 이들은 제정 러시아인들로부터 거만함 섞인 동정의 눈길을 받으면 그나마 요행이요, 운이 나쁘면 앞서 언급했던 '백조 사냥'의 경우처럼 저들이 겨누는 총부리에 처참히 목숨을 잃고도 "어차피 존엄성 따위는 없는 한낱 들짐승과도 같은 미개한 족속이니 쏘아 죽여도 상관없다"는 식의 주장을 통해 자신의 죽임당함이 너무도 간단히 정당화되는 입장에 놓였던 것이다.
민족지학자 야코프 두브로프는 칼미크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칼미크족이 이제는 썩어가는 시체와 같아졌을 때에야, 우리는 그들의 미래 운명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시체’에 영혼을 불어넣고, 그것을 써레와 쟁기 같은 농기구에 매어 밭을 갈게 하며, 그들이 고요히 죽어가던 유르트에서 벗어나 양배추밭이 있는 농가로 이사하도록 만들려는 듯한다.’’
같은 19세기에 민족지학자 카르기노프는 오세트족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들 스스로의 세계 안에 갇혀 있고, 산악 지역에서 주변의 교양 있는 영향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세트족은 문화적, 경제적 발전에서 수십 년 동안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이와 유사한 묘사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극동 지역의 한인들에 대해서도 나타난다. 이들은 게으름, 무기력함, 야만성 등의 이미지로 그려졌다. 예를 들어, <루스키예 베도모스티> 신문의 기자 D.I.슈레이더는 그의 영국인 동료의 말을 이렇게 전한다.
‘’우리 유럽인들은… 생동감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살고 있으며, 후견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힘에 의존해 살아간다. 그러나 한인은 아직 반쯤 죽은 상태의 사람이다. 그는 아직 잠들어 있으며, 이제 겨우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 모든 사례는 식민주의적인 사고방식의 엄청난 위험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곧 인간 사이의 계급∙민족들 간의 서열화로 귀결되며, 이러한 인식이 공동체 내에 만연하게 되면 일개 병사조차도 일말의 죄책감 없이 ‘하등한 저 이방의 족속은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가지지 못한, 어차피 이미 반쯤 죽어 있는 상태에 있는 존재들이기에 죽여도 상관 없다’는 생각을 품게 되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러한 사고방식은 때로 그것의 피해자였던 사람들, 혹은 그들의 후손들에게서 발견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강제 이주를 겪은 한인의 자녀와 손자들 중에서는 스탈린을 숭배하거나, 현대 러시아의 제국적 야망에 동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들이 종종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흰옷을 입은 한인들이 자신들을 ‘가진 영혼이라고는 없이, 죽으면 그저 한 줌의 기체만 내뿜고는 삭아 없어질 존재’로 여긴 이들에 의해 희생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 비극적인 죽음들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던 사상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오늘날 새롭게 변모된 형태로 나타나는 그 사상을 인식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래야만 희생된 이들의 ‘’백조의 노래’’가 들리지 않은 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백인인 우리를 본 죽어가는 한인 옆에 서 있다. <…> 거무스레한 곱고 성상 (聖像)과 같은 얼굴, 놀랍도록 큰 눈, 인도인을 연상케 하는 검은 수염. 평온함, 단순함 속의 위엄…”
한인들의 설화를 수집했던 가린-미하일롭스키는 이렇게 ‘’백조’’의 죽음을 묘사했다. 그의 공로를 인정하자면, 그가 묘사한 한인은 야만인처럼 보였을지언정, ‘자연’ 러시아인처럼 고귀하게 그려졌다.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며, 유럽인들이 결코 가질 수 없는 지혜를 가진 존재로 말이다.
“백조처럼 한인들은 싸우지도, 사람의 피를 흘리지도 못한다.
백조처럼 그들은 오직 노래하고 옛날이야기를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로부터 모든 것을, 심지어 삶까지 빼앗는 일은 아이들 혹은 백조로부터 그것을 빼앗는 것만큼이나 쉽다.
좋은 총과 정확한 눈만 있으면 된다…
아, 그들은 아직도 동화 속에 살고 있는 것 같은 아름다운 아이들이다!”
한인들은 어떤 노래를 불렀던가? 그 노래는 어떻게 들렸던가? 아마도 이러한 슬픈 선율은 퉁소라는 피리를 통해 전해졌을 것이다. 퉁소는 당시 거의 모든 조선 가정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악기였다. 민속학자 올림피아다 바실리예바의 관찰에 따르면, “…한인들은 소박하게 만든 악기를 통해 자신의 영혼을 표현한다. 이 악기의 멜로디는 그들 말에 따르면 고향과의 이별과 그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낸다”고 그는 1875년에 기록했다.
대나무 피리의 이 단순한 멜로디가, 종종 이미 사라져버린 고향에 고향에 대한 애수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은 어떤 씁쓸한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다. 이 멜로디는 과거 극동으로 이주했던 조상들로부터 이어져 온 모든 후대 한인들의 운명에 변함없는 반주가 되었다.
김 세르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