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벡인
오늘날 카자흐스탄 총인구 대비 카자흐인과 러시아인 다음으로 가장 큰 비중(3.3%, 약 67만 8천 명)을 차지하고 있는 우즈벡인들. 예로부터 카자흐 민족과 가장 가까이 국경을 맞대고 살아왔던 이웃 민족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이들이 카자흐스탄 내에서 3번째로 많은 인구를 보유한 민족집단이라는 사실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부분이다(마찬가지로 현재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내 카자흐인 인구 또한 85만 명에 달하며, 카자흐인들 역시 우즈베키스탄 내에서 우즈벡인, 타지크인에 이어 3번째로 큰 민족집단을 구성하고 있다). 우즈벡인들이 카자흐스탄 영토에서 살아가게 된 역사적 배경은 대부분 강제이주를 통해 카자흐 땅에 유입된 다른 민족들의 경우와는 뚜렷한 차별점을 가진다. 이들이 카자흐스탄에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은 시기는 19세기로, 우즈벡 민족이 중앙아시아에 세웠던 나라 ‘코칸트 칸국(1709~1876)’이 1820년대 들어 카자흐스탄 남부 지역을 점령하면서 이곳에 우즈벡인들의 정착촌들이 생겨난 것이 시초다. 이후 19세기 후반 코칸트 칸국이 멸망함과 더불어 중앙아시아 지역의 대부분이 러시아 제국에 흡수될 무렵에는 카자흐스탄 남부 지역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우즈벡인들의 수가 이미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있었던 것으로 역사 문헌은 기록하고 있다.오늘날 카자흐스탄의 우즈벡인 디아스포라가 운영하는 민족 단체로는 카자흐스탄 민족회의 산하의 우즈벡 민족문화 연합 ‘두스틀릭(Doʻstlik - 친선)’이 있다. 1995년 창설되었으며 현재 아스타나, 알마티, 심켄트, 카라간디, 크즐오르다, 코스타나이, 망기스타우, 남카자흐스탄 주 등 전국 각지의 우즈벡 민족 문화원들을 하나로 잇는 역할을 하고 있다. 본 민족문화 연합이 발행하는 대표적인 인쇄매체로는 1991년 창간된 우즈벡 민족신문 ‘자누비 코조기스톤(Janubiy Qozog'iston - 남카자흐스탄)’이 있다.
이 밖에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는 우즈벡 문화원들을 중심으로 카자흐스탄 전역에는 136개에 이르는 우즈벡어 학교들이 운영되고 있으며 10개 이상의 우즈벡 문화예술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특히 그 중 카자흐스탄에서 우즈벡인들이 가장 많이 밀집해 살아가고 있는 심켄트 시에는 2003년부터 우즈벡 민족 극장이 ‘카자흐스탄 국립 아카데미 우즈벡 극장(Узбекский национальный академический драматический театр)’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본 극장은 현재 심켄트 시의 한 행정구역으로 분류되고 있지만 한때 찬란한 번영을 누렸던 유구한 역사의 고도(古都) ‘사이람(Сайрам)’에 위치해 있다.
정식 우즈벡 극장이 세워진 지는 이제 20년이 조금 넘었지만, 카자흐 땅에서 꽃 피워 온 우즈벡 민족의 공연예술 문화는 그보다 더 오랜 역사를 품고 있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사이 소련 전역에서는 노동자들의 고된 일상을 위로하고 기력과 사기를 북돋우기 위하여 각 지역 소재 공장들 산하에 소규모 공연단들을 조직하는 문화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우즈벡인 밀집 지역이었던 심켄트 지역에서도 이 시기 주류 민족인 러시아, 카자흐인들로 구성된 공연단들과 더불어 우즈벡 민족 공연단이 여러 공장들 산하에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차츰 지역민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모으며 단일 공연예술 연합체를 구성하게 되고 이를 기반으로 소재지인 심켄트 뿐만 아니라 주변 소도시 및 농촌 지역들을 순회하며 공연 활동을 이어갈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후 1930년대 중반부터는 심켄트 주립 교향악단 소속의 우즈벡 민족 공연단으로 활동하며 더욱 높은 인기를 구가하기에 이르렀는데, 안타깝게도 독소 전쟁(1941~1945)이 발발한 직후 남성 공연단원들의 대다수가 징집되어가면서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어 버린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인원 수가 크게 줄어든 공연단(전장에 나갔던 단원들의 대다수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을 꾸려 본거지를 당시 고려극장의 활동지이기도 했던 크즐오르다로 옮겼으나, 공연 수요가 높은 우즈벡인 밀집 지역에서 멀리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전쟁 직후의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극단은 활동에 침체를 겪게 되고, 결국 얼마 가지 않아 활동을 전면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한참의 세월이 흘러 2003년이 되어서야 우즈벡 민족 공연단은 ‘카자흐스탄 국립 우즈벡 극장’으로서 다시 탄생하게 되었으며, 유서 깊은 고도이자 예로부터 카자흐 땅에서 살아가는 우즈벡 민족 문화유산의 요람으로 자리잡았던 사이람을 활동의 본거지로 삼게 되었다.
현재 우즈벡 극장은 현대 우즈벡 희곡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 받는 우즈벡 극작가 샤로프 보시베코프(Шароф Бошбеков)의 희극 ‘테미르 호틴(Temir xotin - 철의 여인)’ 등 우즈벡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작품들 뿐만 아니라 아우에조프, 체호프 등 카자흐, 러시아 및 여러 다른 민족 출신 대문호들의 작품 또한 무대에 올리고 있으며, 우즈베키스탄 본토 극단들과 활발한 교류를 펼치며 다양한 초청 공연을 마련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본 극장에서는 중앙아시아 각국 예술인들이 참가하는 연례 희극 축제와 전국 시인 경연대회 등 다채로운 국내외 행사들이 개최되고 있다.


현재는 심켄트 시에 속해 있는 고대도시 사이람에 위치한 우즈벡 극장 / 우즈벡 극장 소속 공연단
튀르키예인
2025년 현재 카자흐스탄에서 튀르키예인들은 10만 명에 못 미치는(약 9만 2천 명) 적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지만 민족별 규모 면에서는 고려인 다음으로 큰 소수민족으로서 카자흐스탄 총인구 대비 10위에 해당하는 비중(0.4%)을 차지하고 있다.오늘날 카자흐스탄에서 살아가는 대다수의 튀르키예인들은 튀르키예 본토가 아닌 현 조지아의 메스헤티(Meskheti) 지역에서 건너온 튀르키예인들, 이른바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의 후손이다. 이들은 본래 1570년대 후반부터 오스만 제국이 현재의 조지아 땅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메스헤티 지방에 들어와 정착한 이래 조지아 영토가 1820년대 후반부터는 제정 러시아, 1921년부터는 소비에트 연방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이후에도 이곳 일대에 계속해서 정주하던 튀르키예 민족 집단이었다. 그러나 1940년대에 접어들며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스탈린은 이들이 조지아와 인접한 튀르키예 본국과 내통하여 간첩 행위와 밀수, 사회 교란 등을 자행하고 있다는 죄목 하에 카자흐스탄 남부 지방과 그 주변의 여러 중앙아시아 국가들로 이들을 강제 이주시킬 것을 명한다. 그렇게 1944년, 약 11만 5천 명에 달하는 튀르키예인들이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지의 여러 농촌 지역들에 유배되었다. 1956년 소련 당국은 이들에 대한 거주지 제한을 해제했으나 조지아 지역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허했으며, 이에 소수의 튀르키예인들만이 아제르바이잔, 카바르디노발카리야 등 조지아 이외의 코카서스(캅카스)의 여러 지역들로 떠나간 반면 대다수는 기존 유배되어 살아왔던 거주지들에 잔류했다. 1989년 소련 정부가 실시한 인구조사에 따르면 당시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던 튀르키예인 수는 약 5만 명이었다.
소련 해체 이후에는 조지아 정부가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의 귀환을 거부하여 이들의 오랜 염원이었던 조지아로의 재정착은 끝내 좌절되었고, 일부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미국 등을 새로운 정착지 삼아 떠나갔으나 여전히 대다수는 중앙아시아 지역에 남기를 택했다. 특히 카자흐스탄 튀르키예인들의 경우 1990년대 초중반 카자흐인들을 제외한 대다수 민족들이 저마다의 본국으로 대거 귀환이주하는 현상이 나타나던 때에도 별다른 인구 감소를 겪지 않은 유일한 민족집단으로 집계될 정도로 카자흐스탄을 자신들의 정착지이자 모국으로 여기고 있음을 드러낸 바 있다.
오늘날 카자흐스탄에는 튀르키예인 협회 ‘아흐스카(Ahiska – 조지아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튀르키예인들, 즉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을 일컫는 튀르크어 명칭)’가 튀르키예 민족의 전통 및 문화의 보존·발전과 카자흐스탄 사회의 민족 간 화합·다문화 발전 도모라는 기치 아래 카자흐스탄 민족회의 일원으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1991년 ‘튀르키야(Туркия)’라는 단체명으로 출범한 본 협회는 1996년부터 현재의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지난 2004년부터는 동명의 튀르키예 민족신문 ‘아흐스카’와 잡지 ‘튀르크 비를리이(Türk Birliği' - 튀르크 연합)’를 발행해오고 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지난 호에 소개했던 카자흐스탄의 아제르바이잔인 공동체가 한때 자체적으로 발행하던 신문이 폐간된 이후부터는 자신들의 민족 활동과 관련한 중대 소식 또는 입장을 디아스포라 내부 혹은 대외적으로 알릴 필요성이 발생하는 경우, 튀르키예인 협회가 발행하는 상기 신문과 잡지의 지면을 빌려 그에 대한 내용을 실어 내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협업이 가능한 것에는 물론 튀르키예 민족과 아제르바이잔 민족이 같은 튀르크족으로서 언어·문화·역사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는 배경적 요인(국제무대에서도 튀르키예와 아제르바이잔 양국을 가리켜 ‘한 민족, 두 국가’로 지칭하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이 둘은 이러한 공통점들을 바탕으로 매우 두터운 친선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이 주효한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카자흐스탄 민족회의라는 매개체를 통해 오늘날 카자흐스탄 사회 안에서 여러 민족 단체들 간 소통과 합일이 한층 더 원활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또 하나의 긍정적인 사례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카자흐스탄에서 발행되는 튀르키예 민족신문 ‘Ahiska’ /잡지 ‘TÜRK BİRLİĞİ’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