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먹던 ‘물만밥’의 전통이 이역만리 타향살이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지다 - ‘밥이 물이(Паби-мури)’

본래 한민족은 오래 전부터 맹물에 밥을 마는 것이 전부인 단출한 음식, ‘물만밥’을 즐겨 먹어왔다. 소박한 형태 탓에 언뜻 가난한 백성들의 전유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역사 문헌을 찾아보면 고려시대 관료들과 조선시대 임금들도 일상적으로 즐겨먹던 음식으로서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많은 사랑을 받았던 전통적인 먹거리였음을 알 수 있다.
‘쌀’과 ‘물’이라는 두 가지 재료만으로 간단히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이 음식이 한반도를 떠나 연해주,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야 했던 고려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밥상 메뉴가 된 것은 당연지사. 특히 소비에트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인정받기 위해 부지런히 일하느라 늘 시간에 쫓기던 이들에게 ‘밥이 물이’는 너무도 요긴하고 고마운 존재였을 것이다. 평소 ‘밥이 물이’를 즐겨먹는 고려인들의 모습이 다른 민족들에게는 인상적이었는지 한때 소련 사회에서는 “고려인들은 쌀을 어찌나 소중히 여기는지 밥을 짓기 전에 한번, 그리고 밥이 완성되고 난 후 한번, 총 두 차례나 씻어 먹는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생겨나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먹거리가 풍족해진 오늘날에도 ‘밥이 물이’는 다른 요리들의 자극적인 맛을 담백하게 중화해 주는 음식으로서 여전히 고려인들 사이에서 사랑받고 있다.
고려인 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민족들의 일상 식탁에도 올라오는
고려인 샐러드, ‘까레이스키예 살라티(Корейские салаты)’

알마티의 재래시장에서 ‘까레이스키예 살라티(고려인式 샐러드)’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는 각종 반찬들. 구소련 지역, 특히 중앙아시아의 일반 재래시장들에서 흔히 접할 수 있다.
오늘날 공식적으로 124개에 이르는 민족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답게 카자흐스탄 국민들의 일상 속 식탁에는 우즈벡 전통음식 ‘플롭’, 카자흐식 튀김빵 ‘바우르삭’, 위구르족의 전통 국수 ‘라그만’, 러시아식 만두 ‘펠메니’ 등 여러 민족들의 갖가지 요리가 함께 오르곤 한다. 이러한 카자흐스탄 사람들의 일상 속 단골메뉴에는 고려인 요리 또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꼽을 수 있는 음식은 단연 ‘까레이스키예 살라티’다. 러시아어로 ‘고려인 샐러드’를 의미하는 ‘까레이스키예 살라티’는 ‘마르코프차’, ‘왜차’, ‘스파르자 뽀 까레이스키’, ‘침치’ 등 고려사람들이 평상시 먹는 반찬류를 하나로 묶어 이르는 명칭이다.
마르코프차(Морковча)

당근을 의미하는 러시아어 단어 ‘마르코프(Морковь)’와 우리말 ‘채(채소를 가늘게 썬 것)’가 합성되어 탄생한 이름이다.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이후, 현지에서 김장에 쓸 재료로 배추와 무를 구하는 것이 여의치 않아 대신 당근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탄생한 음식. 채를 친 당근을 식초와 고춧가루, 후추, 마늘 등의 향신료에 절여 만든다. 특유의 새콤하고 톡 쏘는 풍미가 현지 타 민족들의 고기류 및 기름진 요리들과 훌륭히 조화를 이루어 고려인 뿐만 아니라 구소련 지역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두루 사랑받는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리잡았다.
스파르자 뽀 까레이스키(Спаржа по-корейски)

두유를 끓이는 과정에서 형성된 막을 식혀 짧은 막대 형태로 잘라낸 뒤 당근과 마늘·후추·소금 등에 버무린 샐러드. 스파르자(Спаржа)는 본래 러시아어로 식용 식물인 ‘아스파라거스’를 일컫는 단어로, 본 음식명을 직역하면 ‘고려인(코리안) 아스파라거스’가 된다. 즉, 두유가 주 재료인 이 음식의 내용물과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이 음식명의 유래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지난 90년대 들어 이 샐러드가 본격적으로 대중화 되면서 막대 형태로 잘라낸 굳힌 두유막(한국에서는 ‘며느리두부’ 혹은 ‘유바’로 불린다)의 외형이 당시 경제난을 겪던 구소련 국가들의 국민들에게는 ‘그림의 떡’과도 같았던 값비싼 아스파라거스를 연상시킨다 하여 이 같은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재미있는 설이 존재한다. 높은 식물성 단백질 함량 덕에 근래에는 건강식 혹은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
왜차(Ве-ча)

‘왜차’는 오이를 일컫는 함경도 방언 ‘왜’와 얇게 썬 채소를 뜻하는 ‘채’가 합쳐져 탄생한 요리명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함경도 지방에서 유래된 음식으로 오늘날 한국에서 흔히 먹는 ‘오이무침’과의 차이점은 오이를 먼저 식용유에 볶은 후 양념에 무친다는 것에 있다.
‘왜차’는 오늘날 인기 있는 ‘고려인 샐러드’ 메뉴 중 하나로서 반찬 형태로 많이 소비되고 있기도 하지만, 또다른 대표적 고려인 음식인 ‘국시’를 만들 때에도 빠트릴 수 없는 핵심 재료로 쓰인다.
국수와 닮은 듯 다른 ‘국시(Кукси)’

소면 위에 오이, 토마토, 당근 등의 채소와 달걀지단 및 고기를 고명으로 얹고 육수를 부어 먹는 ‘국시’는 전반적으로 한국의 잔치국수와 유사해 보이지만 맛과 외형 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띤다. 가장 큰 차이는 멸치, 다시마, 고기로 우린 육수를 기반으로 하는 잔치국수와는 달리 고수 등의 허브로 향을 낸 새콤한 국물에 기름과 식초, 각종 조미료로 양념한 채소와 달걀지단, 소고기 볶음 등을 올려 맛을 낸다는 점에 있다. 기호 및 계절에 따라 차가운 면으로도, 따뜻하게 데운 형태로도 먹는다.
함경·강원·경상 지역의 요리에서 유래한 ‘해(Хе)’

생선 또는 소·닭고기에 식초 기반의 양념을 버무려 만드는 반찬 ‘해(Хе)’. 발음상의 유사성 탓에 언뜻 오늘날 한국에서 날생선 및 생고기 요리를 일컫는 ‘회(膾)’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사실 함경도(강원도·경상도 지방의 요리이기도 하다) 지방의 전통 해산물 요리인 ‘식해(食醢)’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음식이다. ‘식해’가 본디 가자미, 명태, 갈치 등의 생선을 주 재료로 하여 여기에 무, 고춧가루, 마늘, 소금, 엿기름 등을 밥과 함께 넣고 발효시켜 만든 음식인 것에 반해 고려인들의 ‘해’는 창꼬치, 송어, 잉어, 청어 등의 물고기 뿐만 아니라 소·닭고기까지 주 재료로 삼고 있으며 양념 재료로는 양파, 마늘, 고수, 식초, 후추, 고춧가루, 간장, 설탕 등이 사용된다.
돼지고기와 된장을 넣고 만든 국물요리,
‘시래기장물이(Сиряги-тямури)’와 ‘북짜이(Пуктяй)’

‘시래기’와 ‘된장국’이 합쳐져 붙여진 이름 ‘시래기장물(정확한 현지식 발음은 ‘씨랴기짠무리’에 가깝다)’은 기름기가 많은 돼지고기와 매운 고추로 육수를 만들고 된장과 시레기, 고추, 파, 배추 또는 양배추를 넣어 끓이는 국으로 고려인들의 국물 요리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음식이다. 한편 돼지고기를 주재료로 하는 고려인들의 또다른 국물 요리로 ‘북짜이’가 있다. 된장을 일컫는 함경도 말 ‘북장’에서 그 이름이 비롯된 요리로서 시래기장물과 마찬가지로 돼지고기 육수와 된장을 베이스로 하며, 고춧가루·마늘·무 등의 재료가 듬뿍 들어가 시래기장물보다 진하고 매콤한 풍미를 띤다.
잔치상 위의 필수 메뉴,
찰떠기(Чальтоги/чартоги)와 침페니(Чимпени)

돌과 환갑 잔치, 결혼식 등 고려인들의 잔칫상에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간식거리인 찰떠기와 침페니는 모두 쌀가루를 재료로 만들어지는 떡이다. 찹쌀 반죽으로 만든 떡에 고소한 팥고물을 묻혀 먹는 ‘찰떠기(찰떡)’는 고려인들의 돌잔치 시 돌잡이상에도 반드시 올라가는 아이템으로, 아기가 ‘찰떠기’를 집는 경우는 그에게는 평생 행운이 따르게 되며 늘 맛있는 음식이 가득한 집에서 살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한편 새콤달콤한 맛이 특징인 또다른 쌀가루 재질의 떡 ‘침페니’는 ‘증편(술떡)’이 러시아식 발음으로 변형되어 붙여지게 된 이름으로 아기자기한 모양새를 가진 한국의 술떡과는 달리 납작하고 둥그스름하게 퍼진 형태가 특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