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지에서 맺은 인연

알마티의 가가린 거리와 레위탄 거리가 만나는 교차점에는 작은 옷수선 가게가 하나 있다. 나는 종종 그곳을 들르곤 한다. 이 가게에는 마리나라는 재봉사가 근무하는데, 늘 손님들의 의뢰가 밀려 있을 정도로 손이 빠르고 실력이 좋다. 처음에는 그녀가 혼혈로 보였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당시엔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일손이 덜 바쁠 때면 인생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알고 보니 마리나의 어머니는 고려인이었고, 아버지는 우크라이나인이었다.

 -요즘은 젊은이들이 사랑이나 결혼생활을 가볍게 여기는 것 같아요. 우리 부모님 세대는 정말 사랑을 귀하게 여겼죠…

지금은 타민족과 결혼하는 것이 흔하지만, 1950년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고려인 아가씨가 우크라이나 청년과 결혼한다? 분명 적잖은 난관이 있었을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그 이야기가 궁금했다. 마리나는 조심스럽게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마리나는 가족이 이삿짐을 정리하는 것을 도왔다. 할아버지가 직장에서 새 집을 배정받아 이사를 하게 된 것이었다. 옷장을 정리하던 중, 마리나는옷장 위 박스를 꺼내다가 떨어뜨렸고, 안에 들어있던 물건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그중 편지 묶음이 눈에 들어왔다. 중학생이던 마리나는 남의 편지를 읽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그녀는 중요한 비밀을 곧 알게될 듯이 떨리는 손으로 편지 한 통을 꺼내어 열어보았다…

 <… 사랑하는 류드밀라! 우리가 헤어진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몇십 년이 흐른 것만 같구나. 다 무사하리라고 믿는다. 달력을 한장 한장 뜯으면서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귀여운 밀라 ('류드밀라' 애칭), 류드밀라! 너를 못견디게 보고 싶어, 나래가 있었더라면 훨훨 날아 갔을 걸… 꿈에서 너와 함께 넓은 벌판의 곡식밭을 걷는 모습을 보았는데, 깨고 나니 너무 아쉬웠어…>

 마리나는 나머지 편지들도 아마 처녀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편지를 읽으며 마리나는 이것이 아버지의 편지임을 직감했다. 어머니는 이 편지들을 오랫동안 간직해 온 것이다. 버리지 못했을까, 아니면 버리기 싫었던 걸까… 편지의 문장은 마치 시와 같았고, 필체는 고왔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다니던 시절이 되어서야 마리나는 어머니에게 조심스레 그 편지에 대해 물을 수 있었다.
…
1950년대, 소련에서는 ‘처녀지 개간 운동’이 한창이었다. 소련의 모든 공화국 공청동맹원들이 당의 호소에 따라 처녀지 개간에 나섰다. 우크라이나 크리버이로그 시에 살던 벨리츠코 알렉산드르도 1958년 당의 호소에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향했다. 그는 카라간다 주 꾸우체크 마을 인근의 세노꼬스나야 솝호스 (구소련 국영 농장)에서 트랙터 운전수로 일하며, 자식 없는 러시아 노부부 아냐 할머니와 야곱 할아버지의 집에 머물렀다. 사샤 (알렉산드르의 애칭)는 그 집에서 친자식처럼 지냈다. 2년 후 군 입대를 했고, 제대 후 고향에 잠시 들른 뒤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돌아왔다. 푸른 자연과 나무를 사랑하던 그는 이곳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사샤가 특히 나무를 좋아했다. 그는 젊었을 때 아냐 할머니의 마당에 심은 여러가지 애목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하늘을 찌를듯이 높이 자라났다…

아냐 할머니와 야곱 할아버지는 사샤를 반갑게 받아들였다. 역시 이 집에서 살명서 세노꼬스나야 솝호스에서 일했다.
한편 꾸우체크 마을의 중학교 졸업한 학생이던 고려인 소녀 최 류드밀라는 어느 날 친구들과 구락부에 갔다. 당시에는 젊은 남녀들이 영화관에 가거나 구락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반적인 여가였다. 무도장에서는 한 쌍, 두 쌍씩 젊은이들이 나타나 왈츠를 추기 시작했다.

류드밀라는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여유를 즐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춤 한 곡 추실래요?”라는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키가 크고 파란 눈을 가진 청년이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 류드밀라는 평소 무도장을 자주 찾지 않았기에 춤도 익숙하지 않아 머뭇거리며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친구 중 한 명이 류다의 등을 살짝 밀며 “나가서 춤워봐”하고 등을 떠밀었다.
춤을 추며 청년은 자신을 소개했다. 이름은 벨리츠코 알렉산드르이고, 콜호스에서 일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 출신이라고 했다. 이어서 가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지만, 류드밀라의 가슴은 두근거렸고, 그의 말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했다. 류드밀라는 보통 친구들과 짝을 이루어 춤을 추거나, 알고 지내던 남성과만 무대를 나선 적이 있었기에 낯선 청년과의 춤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구락부에 들어선 싸샤의 시선은 겸손한 옷차림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고려인 아가씨에게 꽂혔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용기를 내어 류다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처음으로 만났다. 헤어질 때 싸샤는 다음 주 휴일에도 구락부에 올 것이냐고 물었지만, 어머니가 엄격한 편이라 류다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 후로 특별한 약속은 없었지만, 마치 마음의 이끌림을 따르듯 두 사람은 구락부에서 가끔 마주쳤다. 친구들도 눈치를 채고는, 구락부에 갈 때는 함께 갔지만 돌아올 때는 슬쩍 사라져 주곤 했다. 만남을 거듭할수록 두 사람의 우정은 점점 깊어졌고, 때로는 둘이서 조심스럽게 산책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고 애썼지만, 작은 부락인지라 결국 소문은 어머니 귀에까지 들어갔다.
어느 날, 어머니는 딸을 불러 앉히고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얘야, 네가 우크라이나인 총각과 사귄다던데, 정말이냐? 고려인 총각들은 다 어디 갔니? 왜 하필 우크라이나 총각이야? 내가 민족주의자는 아니지만, 어느 부모든 자기 민족과 결혼하길 바라게 마련이란다. 그 총각과 결혼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절대 안 된다! 네가 곧 전문학교에 입학해서 부락을 떠나게 될 테니 다행이다. 멀리 떨어지면 자연히 서로 잊게 될 거야..."
류드밀라는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어머니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잊어진다고 생각했던 어머니의 기대는 현실과 어긋났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류드밀라는 알마아타 상업전문학교에 진학했다. 상품관리 전공을 마친 후, 그녀는 코스타나이 시로 발령을 받았다. 한편 알렉산드르는 노천탄광으로 일터를 옮기고, 대형 카마즈 자동덤프 트럭 운전사로 일하고 있었다. 수입도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괴로운 것은 사랑하는 류드밀라가 곁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류드밀라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고, 애타는 마음으로 답장을 기다렸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딸 마리나가 바로 그 편지 중 하나를 우연히 읽게 된 것이다…

이별의 아픔을 견디지 못한 알렉산드르는 결국 사직서를 제출하고 코스타나이로 이주했다. 두 사람은 결혼등록을 마치고 새 삶을 시작했다. 물론 이 사실을 부모님께 알리지는 않았다. 몇 달이 지나서야 그들은 부모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류드밀라의 어머니는 부부가 된 딸과 사위를 바라보며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류드밀라의 아버지는 안방으로 아내를 데리고 들어가 조심스럽게 설득했다.
“이제 와서 말해봤자 깨진 사발 붙이는 것밖에 더 되겠어. 민족이 중요한 게 아니라 좋은 사람을 만나 잘 살면 그걸로 된 거요…”
부모들의 마음을 얻은 두 사람은 세 자녀를 낳아 키우며 반세기 동안 행복하게 살아갔다. 그러나 2009년, 벨리츠코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는 세상을 떠났다.

- 마리나,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요?”
- 제 생각에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정말 많이 사랑하셨던 것 같아요. 항상 어머니를 배려했고, 시간이 나면 어머니 일을 도와주려고 애쓰셨어요. 보통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셨는데, 부엌에서는 벌써 구수한 냄새가 풍겨왔어요. 우리가 일어나면 아버지가 구워놓은 드란니끼(으깬 감자로 만든 팬케이크)가 식탁 위에 놓여 있었죠. 아버지가 끓인 보르쉬도 정말 특별한 맛이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참 행복한 삶을 사셨다고 생각해요.

- 혹시 아버지가 가족을 데리고 고향인 우크라이나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하신 적은 없었나요?
- 아니요,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어머니의 친척들이 모두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었거든요. 대신 우크라이나에서는 소포를 보내오거나 따뜻한 편지를 보내오곤 했어요.

- 마리나는 누구와 결혼했나요?
- 저도 타민족인 독일인 남편과 결혼했어요.

- 그럼 마리나도 어머니의 운명을 되풀이한 셈이네요?
- 그런 것 같아요. 마리나는 웃으며 말했다.

남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