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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모이세이, 깨뜨려진 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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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모이세이, 깨뜨려진 그의 삶
      김 모이세이, 깨뜨려진 그의 삶
      17.09.2025
      김 모이세이 세묘노비치(1906~1959)의 삶은 혁명의 밝은 이상을 믿었던 한 세대의 역사이며,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른 이야기이기도 하다. ''혁명은 스스로의 자녀를 삼킨다''라는 역사적 문구 (프랑스 혁명가 단통(Georges Jacques Danton), 베리니오(Pierre Victurnien Vergniaud) 등에게 귀속됨)는 나의 종조부 모이세이의 운명을 돌아볼 때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김 알렉세이,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김 모이세이는 1906년9월6일 극동 지방 시넬니코보-2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김 이반 공배는 현지 교회 부속 학교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다. 가족은 그 지역 기준으로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다. 외동 아들 (위로 세 명의 누이가 있었다)인 모이세이는 어린 시절부터 각별한 보살핌과 관심을 받으며 자랐다. 장차 집안의 상속자라는 이유로 식탁조차 누이들과 따로 차려질 정도였다.
      누이 하나는 이미 혁명 전에 병으로 죽고 둘째 누이는 부유한 총각과 결혼하였으며 셋째 누이 따찌야나가 나의 할머니였는데 그는 김 로만 빠블로비치와 결혼했다. 김 로만은 유식한 분이였다. 그는 러어를 잘 모르는 한인들이 청원서를 쓰는 데 도와주기도 했다. 김 로만이 주로 농업을 했는데 좀 떨어져 있는 경작지에는 아편도 심었다. 아편은 약으로 되는 동시에 상품으로도 되었다. 그 시기에는 현재 금지되여 있는 마약 제품 아편, 모르핀, 헤로인에 대한 태도가 지금과 달랐다. 많은 나라들에서는 의사의 처방에 따라 상기 제품을 약으로 판매했다.

      모이세이는 러시아어로 교육하는 촌 학교를 1920년에 필하고 한국어로 2학년 2단계를 1925년에 필했다.
      프리모르스키 지역은 1917년 혁명 이후 정치적·사회적 불안정이 극도로 심했던 곳이었다. 이 지역에는 패주하는 백위군 콜차크(Александр Колчак)파, 세묘노프(Григорий Семёнов)파 (러시아 백군 군벌 중 하나), 카펠(Владимир Каппель)파 부대와 안탄트 (삼국협상/triple entente) 병력, 적군(볼셰비키) 게릴라, 일본 원정군, 그리고 이미 점령된 조국의 해방을 위해 싸우던 조선인 독립군 부대까지 뒤섞여 활동하고 있었다.
      1922년 말 극동 지역에 소비에트 정권이 최종적으로 수립된 이후, 많은 조선 청년들은 1917년 10월 혁명의 이념 - “토지는 농민에게”, “공장은 노동자에게”, “제3인터내셔널”, “모든 이가 평등한 새로운 정의로운 사회”- 에 고무되어 러시아 중앙 지역으로 향했다. 그들은 학업과 새로운 삶의 건설을 위해 길을 떠났으며, 프리모르스키 지역에서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등지로 이동한 조선 청년들 가운데는 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조선공산당,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추천과 배정을 받은 이들도 많았다.
      러시아 국방부가 2021년 7월 7일 발급한 자료에 따르면, 김 모이세이는 1927년 10월 1일 자발적으로 노동·농민 적군(РККА)에 입대하여 '이오시프 운스리프트(Иосиф Уншлихт )' 명칭 모스크바 보병학교 사관생도로 편입되었다. 보병학교를 마친 뒤 그는 모스크바에 주둔한 적군의 여러 부대에서 소대장과 소총중대장으로 복무했으며, 이 가운데는 크렘린 경비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1932년 당에 입당했으나, 1935년에는 “출신 성분 은폐”라는 사유로 제명되었다. 이는 그의 부친이 1929년 ‘부농(쿨락/кулак – 러시아 제국 말기부터 소련 초기까지 상당한 토지와 가축을 소유한 농민)’으로 규정되어 재산을 몰수당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37년 2월 1일, 김 모이세이 상위는 「제43조, 항목 B: 근무 부적합에 따른 평가 결과」라는 조항에 의해 적군에서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이어 같은 해 4월, 그는 체포되었다.
      그의 형사 사건 기록에는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건이 보존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1929년 1월 11일 작성된 「김 이반 공배의 1917년 전후 재산 상황에 관한 보고서 및 쿨락 지정 의결서 발췌문」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모이세이의 부친은 15데샤틴(약 15헥타르)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쟁기와 써레, 소·말·돼지 등의 가축을 소유하고 일부 토지는 임대했다. 또한 두 명의 상시 고용인을 두었고 계절 노동자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쿨락 지정’ 의결서는 이른바 ‘청원 심사 위원회’ 3인에 의해 서명되었는데, 위원장은조린 А.А.(Зорин А.А.), 위원은 슈베도프(Шведов)와 손원석이었다.

      형식적으로 모이세이 김의 체포 사유는 간첩 활동 및 밀수 행위 혐의였다. 그의 사건을 담당한 수사관들은 국가안전기관 소속의 스비르스키 I.(И. Свирский)(1906년생)와 볼프손 I. (И. Вольфсон)(1901년생)으로, 당대에도 악명이 높았던 인물들이었다. 두 사람은 이후 1939년 ‘형사사건 조작 및 불법 수사 방법 사용' 혐의로 처벌을 받았다. 이들은 수많은 사건을 조작하면서도 서류와 진술을 맞추지 못할 정도로 서둘러 꾸몄기에, 심지어 내부의 내무인민위원부(NKVD) 요원들조차 그들의 조작 행태에 경악했다고 한다.
      김 모이세이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1937년 4월부터 7월까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갈비뼈가 모두 부러지고 치아가 뽑혔으며, 의식을 잃으면 물을 끼얹어 깨운 뒤 다시 구타가 이어졌다. 수사관들은 그에게 일본을 위한 간첩 활동을 자백하라고 강요했다. 그는 “자백하면 곧바로 총살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끝까지 버티고 부인한다면 혹시 살아남을 수도 있다”라고 판단했다. 실제로 그의 사건 기록에는 “외국 정보기관의 포섭 사실을 부인함”이라는 문구가 남아 있다.
      그 결과 그는 사실상 아무 죄목 없이 5년형을 선고받았고, 이 형벌은 최종적으로 19년간의 수형 생활로 이어졌다. 모이세이는 1956년 4월 10일에야 석방되었으며, 이후 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범죄 구성요건이 없음”을 이유로 전면적으로 복권되었다.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모이세이의 말에 의하면 1956년에 그에게 모스크바에 돌아올 것을 권했으며 아파트도 주고 군칭도 다 복귀시켜 준다고 했으나 모이세이가 거절했다고 한다. 강제수용소에서 지내는 기간에 건강을 다 잃었다고 했다. 석방된 후에 그는 마지막 판결에 의해 <영원한 정배살이>를 한 크라스노야르스크 변강에서 멀지 않은 볼샤야 무르타 촌에서 거의 일년을 보냈다. 다음 친척들을 찾아보려고 카자흐스탄의 우슈토베 시로 왔다. 행운이 좋아 그는 우슈토베에서 크즐오르다 사범대학 학생을 만났다. 그 학생은 저의 어머니 김 라이사 로마노브나가 교편을 잡고 있는 대학에서 공부했다. 이야기를 듣고 모이세이는 이 가정이 자식 세명을 거느린 그의 누이 김 따지야냐의 가정과 비슷하다고 예측했다. 할머니에게 전문을 보냈다. 할머니는 그것을 읽고 실신했다. 그 전문은 19년만에 동생에게서 받은 첫 소식이였다.

      1958년에 모이세이가 크즐오르다에 왔었다. 그는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예를 들어 죽음을 두번 면했다고 했다. 첫번은 수인들을 다른 곳으로 발송하는 과정에 12명의 수인들과 함께 그를 열매 따러 보냈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나머지 수인들을 다 어디론가 실어가서 총살했다는 것이였다. 두 번째는 전 크렘린 병원의 의사였던 한 인물 덕분이었다. 그는 모이세이를 알아보고 운명적인 이송에서 구해주었다. 인위적인 단식과 치료를 지시하고 포도당 주사를 맞게 해, 결국 모이세이는 영양실조 환자로 분류되면서 죽음의 수송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나중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 운명적인 섬으로 보내진 1천 명 가운데 봄까지 살아남은 이는 고작 2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모이세이가 남긴 세 번째 증언은 더욱 인상적이다. 그는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가 “언젠가 단 한 명이라도 같은 고향 출신의 조선인을 만나, 자신의 운명을 이야기하겠다”는 간절한 꿈이었음을 고백했다.
      김 모이세이 세묘노비치는 중병으로 앓다가 1959년에 사망하였다. 그가 안치된 곳이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삶은 부서진 꿈의 역사이자 동시에 지옥과도 같은 시련을 겪고도 끝내 인간으로 남아 있었던 한 사람의 용기와 불굴의 의지의 기록이다.
      그에게는 찬란한 출발이 있었다. 약 10년간의 흠잡을 데 없는 군 복무와 성공적인 군 경력이 뒤따랐다. 그러나 내무인민위원부 (NKVD) 당국이 내린 “고칠 수 없는 결함”이라는 낙인은 그에게서 탄압을 피할 모든 기회를 빼앗았고, 결국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모이세이의 운명은 곧 인간의 강인함과 고통, 그리고 부당함의 이야기이자 자신이 일생을 바쳐 헌신한 바로 그 사상과 체제의 희생양이 얼마나 쉽게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역사적 증언이다.

      번역: 남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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