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삼촌, 김 겐나지 로마노비치를 기리며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38년 원동사범대학을 기반으로 크즐오르다 사범대학이 설립되었다. 현재 이 대학은 코르킷아타 명칭 크즐오르다 종합대학교로 불린다. 1937년 강제이주된 많은 고려인들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중에는 김 겐나지 로마노비치도 있었다. 그의 삶은 강인함과 용기 그리고 자신의 업적에 대한 헌신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훌륭한 분이었다.
김 겐나지는 1925년3월21일, 원동 변강 한카이 지역 모로조프카 (Морозовка) 마을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세 명의 어린 자녀와 아내를 남겨두고 1934년 세상을 떠났다. 1937년, 김겐나지는 수많은 고려인들과 함께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되었으며, 그의 가족은 크즐오르다로 보내졌다. 당시 크즐오르다는 아직 남카자흐스탄주에 속해 있었다. 러시아 연해주의 국립문서보관소에는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의 명단이 남아 있으며, 그중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3호 열차 (1~49번 객차, 보로실로프-우수리스크 역에서 출발, 1937년), 9번 객차… 김 타티야나 – 과부, 아픈 자. 김겐나지 – 아들 (1925년생)…» 간혹한 강제이주 상황 속에서 그는 수많은 시련을 겪었으나 결국 살아남아 새로운 삶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대조국전쟁 (1941∼45 년의 독일과 소련의 전쟁) 당시, 많은 고려인들과 마찬가지로 김겐나지는 전선에 동원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후방에서 최선을 다해 노동에 기여했다. 1943년2월, 그는 스탈리노고르스크 (현 러시아 툴라 주 노보모스콥스크 시) 탄광으로 동원되어 석탄을 채굴했다. 그는 생전에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번은 탄광이 지하수에 침수되었고, 이웃 갱도의 화장실까지 물에 잠겨 우리 모두 오물이 목까지 차오른 상황에서 겨우 빠져나왔다. 그때 정말 목숨을 잃을 것 같았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모든 위험과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탄광에서 계속 일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간절한 부탁으로 결국 귀가하게 되었다. 가족을 책임져야 할 유일한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소련 정부는 후방에서 헌신한 노종자들에게 <1941-1945년 대조국전쟁 시기의 노동 영웅>이라는 메달을 수여했다. 김겐나지도 전시 노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 메달을 받았다.
1943년10월, 제대 후 그는 크즐오르다 국립사범대 물리∙수학과에 입학했다. 학업을 병행하면서도 그는 가족을 돕기 위해 꾸준히 일을 했다. 철도학교에서 체조 선수들을 지도하고, 그 대가로 당시 '철도 노동자 빵 (500g)'을 받았다. 혹시 누가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지 이것이 그당시 크즐오르다에서 가장 맛있는 빵이었다. 취주악단에서 드럼을 연주했으며, 특히 장례식 연주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었다. 드럼이 가장 무거운 악기였기 때문이었다.그리고 무도장에서 스텝댄스를 선보이며 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로디오노바 발랴, 이후 태 타냐와 함께 왈츠를 춰 우승을 거뒀다.
1956년부터 그는 크즐오르다 사범대 기초수학 강좌에서 교사로 일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최고의 교수 중 한 명으로 명성을 쌓았다.
김겐나지는 '화법 기하학과 제도학' 과목을 강의하며 학생들과 동료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았다. 학생들은 그를 존경의 의미로 '겐로마' (이름과 아버지 호칭을 겹쳐 줄인 말)라고 불렀다. 김 겐나지 로마노비치는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교수였다. ''노력하는 학생은 끝까지 돕지만, 게으른 학생은 그에 걸맞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그는 이 원칙을 철저히 지켰으며, 어떤 부탁이나 청탁도 허용하지 않았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화법 기하학 시험을 통과하면 비로소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였다.
김겐나지는 어린 자녀들을 홀로 키우게 되었다. 1970년, 그는 소련 교육과학 아카데미 산하 모스크바 교수법연구원에 입학했을 당시 그의 자녀들은 각각 5세와 9세였다. 대학원 졸업 후, 그는 '제도학에서 묘사 변환 기법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했으며, 연구원 생활을 마친 후에도 수많은 교육 자료와 연구 논문을 집필했다. 1986년, 조교수 칭호를 받았고 1996년에 크즐오르다 종합대학교 명예교수로 선정되었다.
김 겐나지 로마노비치는 뛰어난 교육자였을 뿐만 아니라 매우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평생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으며, 특히 러시아인 바다 화가인 아이바좁스키 '아홉 번째 파도' 등 유명 작품의 복제화를 매우 정교하게 그렸다. 그의 재능은 학창 시절에도 빛을 발했다. 한 번은 학교 벽보에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너무 정교해서 학생들이 붙여놓은 그림인지 확인하려고 손톱으로 긁어보기도 했다. 또한, 그는 노동 현장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동승자들에게 직접 트럼프 카드를 그려 주었으며,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다양한 음식을 대접받았다고 회상했다.
김 겐나지 로마노비치의 가장 큰 열정 중 하나는 낚시였다. 그는 항상 낚싯대와 낚시 도구를 준비해 두었으며, 미끼로 사용할 지렁이까지 직접 키웠다. 계절에 상관없이 언제든지 낚시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자연 속에서 휴식을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 또한, 그는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을 즐겼고, 체스를 두는 것도 좋아했다. 더불어 전문카메라와 장비를 활용한 사진 촬영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자식들과 관계에서 그는 엄격하면서도 공정한 아버지였다. 그는 자녀들에게 사랑을 큰소리로 표현하는 법이 없었으며, 이는 감정을 절제하는 것이 일반적인 조선문화의 영향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었고, 자녀들의 잘못을 심하게 꾸짖지도 않았다.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지만, 아이들은 언제나 그가 곁에 있으며, 자신들을 보호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 겐나지 로마노비치는 거의 40년간 교육에 헌신했다. 그의 제자들은 지역 내외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오늘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과 인품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의 삶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 탁월한 재능과 성실함, 끊임없는 노력으로 시련을 극복하고, 교육의 역사와 많은 이들의 삶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한 고려인의 이야기였다.
김 이리나, 크즐오르다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