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도시 전체를 휩쓸뻔한 ‘토석류 대참사’ 막아낸 고려인 수문기술자의 헌신적 일생
지난주 네팔의 라수와(Rasuwa) 산악 지대를 덮친 초유의 재난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날씨 속에서, 수천년간 제자리를 지켜오던 히말라야 만년설이 녹아내리며 일어난 이 토석류(土石流) 참사는 나날이 극심해지는 지구 온난화 속에서 인류가 마주할 재앙의 미래를 단편적으로 예고하고 있다.그런데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카자흐스탄 땅에서도 정확히 똑같은 원인에 의한 참극이 일어난 적이 있다. 바로 1963년 7월 7일 알마티 주에서 발생한 ‘이싁(Иссык)’ 참사다. 이상 고온으로 상류의 빙하가 급격히 녹아내렸고, 이로 인해 형성된 고산 빙하호의 수위가 급기야 한계치를 넘어서며 터져버렸다. 쏟아져 나온 거대한 물줄기는 산비탈을 따라 내려오며 수백만 톤의 자갈과 진흙, 거대한 바위를 휩쓸어 무서운 속도의 토석류로 돌변했고, 당시 인기 휴양지였던 이싁 호수를 직격했다.
엄청난 양의 진흙과 바위 더미가 호수로 밀려들며 발생한 수압과 파도로 인해 호수의 천연 둑이 무너져 내렸으며 불과 몇 시간 만에 이싁 호수 전체가 파괴되어 바닥을 드러냈다. 하필 여름 휴가철 주말이었던 이날, 호숫가에서 평화로운 한때를 즐기던 피서객과 주민 등 공식 집계로만 100여 명(비공식 수백 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이 발생했다.
이 참사는 소련 정부에 커다란 경각심을 안겼다. 비슷한 지리적 조건에 놓인 당시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 알마티(당시 알마아타) 역시 고산지대 빙하호가 터질 경우 도시 전체가 흔적도 없이 괴멸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진 것이다. 이에 당국은 도시와 산의 경계인 메데우(Медеу, 당시 표기상 Медео/메데오) 계곡에 거대한 방사 댐을 건설하기로 전격 결정한다.
그렇게 탄생한 ‘메데오 제방(плотина Медео)’은 완공 후 불과 1년 만인 1973년, 도시 전체를 집어삼킬 기세로 밀려든 초대형 토석류를 완벽히 막아내며 제 역할을 증명해냈다. 당시 이 제방이 없었다면 알마티시가 입었을 피해는 수천 명의 인명 손실은 물론, 오늘날 화폐 가치로 10억 달러 이상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처럼 대형 악재를 미리 읽어내고 도시의 괴멸을 막아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고려인 수력·지질공학자이자 수문 기술의 거장인 故 허가이 알렉세이(Хегай Алексей Юриевич, 1929-2011) 선생의 숨은 공로가 있었다. 카자흐스탄 도시 방재의 기틀을 깔고 한민족 동포사회의 위상을 드높인 그의 일생을 조명한다.
허가이 알렉세이 유리예비치
(Хегай Алексей Юриевич, 1929-2011)
강제이주의 아픔과 신분의 벽을 뚫어낸 배움의 열정
1929년 9월 26일 러시아 연해주의 파블롭스키 만(Бухта Павловского)에서 태어난 허가이 알렉세이는 1930년대 고려인 강제이주라는 역사의 비극에 휘말려 가족과 함께 구리예프(현 아티라우) 주의 치칼로프 마을로 쫒겨왔다. 당시 고려인들에게는 엄격한 감시와 극심한 거주·이동의 제한이 가해졌다. 척박한 거주지 내에서 어린 알렉세이가 접할 수 있는 세상은 학교가 전부였기에, 그가 아는 직업 또한 농부와 교사 뿐이었다. 유달리 수학적 재능을 타고났던 소년 알렉세이의 꿈이 자연스럽게 교사로 기울었던 이유다.
결코 녹록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그는 절망에 갇히지 않았다. 타고난 열정과 리더십으로 학창 시절 내내 모범을 보였고, 운동장에서도 남다른 기량을 발휘하며 강인한 체력을 다졌다.
이후 그가 자란 고려인 마을 최초로 모스크바 유학이라는 원대한 꿈을 품고 도전했으나, 신분증에 명시된 고려인이라는 ‘주홍글씨’는 냉혹한 차별의 벽이 되어 끝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는 대신 정면으로 난관을 뚫어냈다. 1948년, 마침내 알마아타 소재 카자흐 국립대학교(KazGU) 물리학·수학부에 당당히 입학하며 학문의 길을 열어젖혔다.
탄탄대로의 교사 길을 걸어갈 것으로 보였던 그의 인생은 예기치 못한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한다. 바로 그해 소련 정부가 대규모 국책 사업인 ‘자연개조계획(План преобразования природы)’을 발표하면서 수문공학 기술자 양성에 사활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해당 전공생들에게는 기숙사와 장학금 등의 혜택이 파격적으로 보장되었다.
생소한 분야였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직감한 알렉세이는 주저 없이 카자흐 농업연구소 수리개간학부로 적을 옮겼다. 그리고 이 선택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새로운 학업에 매진하며 그는 수자원의 최적화와 자연 제어를 다루는 이 학문이야말로 자신의 천직이자 향후 국가의 운명을 바꿀 유망한 분야임을 깊이 확신하게 되었다.
전문 기술과 실무 역량으로 소비에트 시대 카자흐스탄 사회 발전에 기여하다
그렇게 탄탄한 배움을 뒤로하고 수문공학 분야의 신참 전문가가 된 청년 알렉세이에게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농업부의 첫 발령이 내려졌다. 임지는 구리예프시 노보보가틴스키 기계·간척소였으며, 직책은 수석엔지니어였다. 당시 주요 기업과 공공기관의 수장은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주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출신의 당원 중에서 임명되곤 했다. 알렉세이의 발령지에서도 역시 간척소 소장직에 관련 전문 교육을 받지 않은 볼고그라드 출신의 당 활동가가 부임했다. 그러나 기관장이 기술 문외한이었기에, 곧 현장에 쌓여가는 복잡한 실무와 공사 운영을 주도적으로 해결해 나갈 숙련된 전문가의 존재가 절실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허가이 알렉세이의 탁월한 현장 통찰력과 업무 역량을 눈여겨본 주(州) 당위원회의 추천으로 그는 부임 단 6개월 만에 불과 24세의 나이로 소장에 전격 임명되었다. 소련 농업부 직속 카스피 연안(노보보가틴스키) 기계·간척소의 최고 책임자가 된 것이다. 그는 이후 약 7년간 이 직책에 재직하며 지역 내 농업 발전에 필수적인 수리·방재 시설들을 대거 건설해 나갔다. 그의 전문 기술과 현장 지휘가 성과를 내면서 노보보가틴스키 지역은 당시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내 주요 농산물 생산지 중 하나로 당당히 올라서게 되었다.
1959년, 허가이 알렉세이는 알마아타 소재 국영 도로·수리(水利) 건설공사 산하의 제2건설설치관리국 국장으로 이직했다. 해당 관리국의 핵심 과제는 도로망 구축과 도시 기반 시설 정비였다. 1961년에는 정부 발령에 따라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무회의 산하 수자원이용·보호 국가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어 1963년까지 재직했다. 이 시기 위원회의 주도로 카자흐스탄 전역 수계의 효율적 이용과 수자원 보호를 위한 법적·기술적 기틀이 본격적으로 마련되었다.
이어 1963년에는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알마아타 관할 특수건설연합 부본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년 반 뒤 최고 책임자로 승진해 1972년까지 조직을 이끌었다. 해당 건설연합은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일대의 대형 수리·방재 시설 건설은 물론, 카자흐스탄 남부의 핵심 화학공업 인프라 구축을 전담했다.
특히 알마아타 관할 특수건설연합은 카자흐스탄 최초로 대도시 단위의 중앙집중식 난방 시스템 전환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간선 및 구역 열수송관 망을 집중적으로 구축해 나갔고, 이를 통해 당시 알마티 대기 오염의 주원인이었던 소형 공장 및 난방시설의 분산된 굴뚝 500여 곳을 폐쇄하는 실질적인 환경 개선 성과를 이끌어냈다.
전대미문의 토석류로부터 알마티를 지켜내다
이러한 도시·공업 인프라 구축 성과에 이어, 드디어 엔지니어로서 허가이 알렉세이의 이력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기가 될 메데오 방재 댐 건설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다.
일찍이 1963년 알마아타에서 약 70km 떨어진 이싁 호수를 파괴하고 다수의 인명 피해를 낸 대형 참사를 계기로, 알마티 도심의 상습적인 토석류 재해를 근본적으로 막기 위한 메데오 제방 공사가 1966년 시작되었다. 이 건설 과정에는 세계 최초로 고도의 공학 기술인 ‘제어발파 공법(방향조절발파 공법)’이 도입되었다.
메데오 방재 댐 공사는 총 3단계로 구획되어 진행되었다. 1단계는 제어 발파를 통해 목표 댐 높이의 약 80%에 달하는 초벌 제방을 조성하는 작업이었으며, 2단계는 제방을 최종 설계 높이까지 증축하는 공사, 3단계는 댐 본체와 토사 방출로(배수로) 및 부속 시설을 완공하고 정비하는 과정이었다. 특히 1, 2단계 공사는 토석류 발생 위험이 낮은 8개월의 제한된 시기 내에 완료되어야 했으며, 현장 엔지니어들과 연구진은 엄격한 공기를 준수하며 계획을 완수해냈다.
허가이 알렉세이는 이 프로젝트에서 대규모 방재 시스템 구축 초기 단계부터 협곡을 가로지르는 대형 토석 방재댐 축조 공정을 총괄하고, 산악 지형 제방의 대규모 폭파 공법과 토사 이행 작업에서 현장 기술진을 조율하며 시공 타당성을 검증하는 중책을 맡았으며 댐 완공 이후에도 산사태 방어 시설의 유지·보수와 추가적인 방재 인프라 확장 공정을 관리하며 알마티 시 전체를 위협하던 대규모 자연재해를 원천 차단하는 방재 시스템의 뼈대를 다졌다.
1972년, 마침내 메데오 방재 시설이 완공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듬해 이 거대한 제방은 실전에서 방재 성능을 입증할 결정적 시험대에 오른다.
1973년 7월 13일, 300톤에 달하는 거석들을 삼킨 채 수직 높이 15m에 이르는 미증유의 토석류가 솟구쳐 내리기 시작했다. 이 재앙급 이류는 알마티 시내를 관통하는 ‘말라야 알마틴카(Малая Алматинка)’ 강 줄기를 따라 가공할 위세로 도심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시가지 직전, 메데오 제방이 이 파국적인 폭주를 전량 차단해 냈다. 단 한 번의 방어로 알마티 시는 도시 전체를 삼킬 뻔했던 대형 인명 참사는 물론, 10억 달러 규모에 달하는 막대한 물적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체계적인 국가 방재 시스템을 전담할 전문 기관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 산하에 ‘이류방지시설 건설·운영국’이 신설되었다. 허가이 알렉세이는 해당 기관의 제1차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83년에는 총국장 자리에까지 올라 방재 행정을 이끌었다.
성공적인 방재 공적으로 입증된 역량··· 방재 분야의 세계적 거목으로 우뚝 서다
1979년에는 댐 건설과 1973년의 긴박했던 사건을 토대로 영화 <쉬트 고로다(Щит города, 도시의 방패)>가 제작되었으며, 이 영화의 줄거리를 통해 그의 일대기가 조명되었다.
또한 허가이 알렉세이는 생전 <우크로셰니예 쵸르노보 드라꼬나(Укрощение Черного Дракона, 흑룡 길들이기)> 및 <브례몌니 븨스트라야 례까(Времени быстрая река, 빠른 시간의 강)> 등 직접 2권의 저서를 집필하고 20편 이상에 달하는 이류 방지 기술 관련 학술논문을 발표했다. 특히 그 중 <오뽈즈니 이 셸리(Оползни и сели, 산사태 및 이류)>는 유네스코를 통해 간행되기도 했다.
이처럼 본 분야 내에서 끊임없이 계속된 그의 연구 활동은 카자흐스탄 비상사태부 산하 방사청을 통해 사상 최초로 국내 이류 위험지대들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를 목적으로 한 ‘카자흐스탄 지역별 이류 위험 평가 지도’ 시스템이 수립되는 데 결정적으로 일조했다.
1992년에는 6천 여 명에 달하는 세계 유수의 지질학 전문가들이 참가한 일본 교토 국제지질학총회에서 카자흐스탄의 이류 방지시설 건축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임을 인정받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허가이 알렉세이의 성과는 일본, 네덜란드, 중국, 미국 및 기타 여러 국가들의 과학 학술지들에 잇따라 실리며 세계적인 방사 전문가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한편 1987년 기존 몸담고 있던 이류방지시설 건설·운영국이 공공도로부 소관으로 이관됨에 따라 그는 공공도로부 차관으로 직함을 옮겨 방재 행정 총괄직을 이어갔으며, 1992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국가 기반 인프라 운영을 이끌었다.
거리명으로 남은 그의 이름··· 고려인 공동체와 후학 양성에 여생을 바치다
1992년 정년퇴직 후에도 특유의 소명 의식과 공익을 향한 허가이 알렉세이 선생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카자흐스탄·한국 합작 건설업체 ELD의 이사회장을 맡아 현역 엔지니어로서의 경험을 나눈 한편 알마티 고려문화중앙회 원로회장,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 이사 등을 역임하며 오랜 기간 동포 사회를 위한 공익 활동에 앞장섰다.
특히 차세대 청년들을 향한 그의 애정은 각별했다. 그의 주도로 구성된 고려인 아마추어 예술단 청년들이 미국 25개 도시 순회공연 길에 올랐고, 현지에서 큰 호응을 끌어냈다. 이 대규모 문화 투어를 성공적으로 조직한 공로로 미국 가든그로브(Garden Grove) 시는 그에게 명예 시민권을 수여하기도 했다. 또한 카자흐스탄이 경제적 시련을 겪던 시기에는 150명이 넘는 현지 노동자들의 한국 취업을 지원하며 동포와 이웃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돌보았다.
평생을 국가와 고려인 사회를 가슴에 품고 살아온 그의 공적은 수많은 국가 포상으로 입증된다. 공직 및 공학 분야에서의 헌신을 인정받아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공로 수문기술자’ 칭호, ‘노동적기훈장’, ‘민족우호훈장’을 비롯해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명예 표창을 3회 수훈했다.
오늘날 허가이 알렉세이 선생의 생애를 돌아볼 때, 카자흐스탄의 현대적 발전과 고려인 사회의 정립, 그리고 후학 양성에 기여한 이 위대한 개척자의 공헌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부족함이 없다.
이러한 그의 숭고한 업적과 유산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21년 알마티 시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탄생했다. 알마티 시 나우르즈바이 구 타스틔불락 지역의 기존 ‘아이볼릿-2’ 거리가 시청과 시의회의 공동 결정에 따라 ‘알렉세이 허가이(Алексей Хегай көшесі)’ 거리로 공식 개칭된 것이다.
재난으로부터 도시를 구하고, 국가 기반 시설의 기틀을 세웠으며, 평생 동포 사회를 지탱했던 허가이 알렉세이 선생. 그가 걸어온 삶의 여정은 새로운 조국이 되어준 카자흐 땅을 향한 헌신과 고려인 사회의 자부심을 보여주는 영원한 귀감으로 남아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