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 때 카자흐스탄으로 이주
100여명 세계정상급선수 길러내
올림픽 체조 영웅 넬리 김 선발
"산을 넘고 들을 지나 우리 사단 나아간다~"
"백파군대 근거지인 연해주를 점령하리"
모두 5절까지 있는 이 노래는 ‘연해주의 빨찌산가’라는 노래인데, 황마이 선생의 애창곡들 중의 하나이다.
최근 우슈토베 학교에 최첨단 전자칠판 등 교육기자재 지원 차 카자흐스탄에 온 나의 한국 친구들과의 만찬자리에 초대된 황마이 선생은 이날도 어김없이 이 노래를 불렀다.
‘레닌기치’ 1979년 5월 5일자에 <전설적인 노래>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러시아인이 가사를 썼고 붉은 군대 협주단이 연주했다고 쓰고 있지만, 상당수의 고려인들은 이 노래가 우리 한인 파르티잔 부대들이 지어 부른 노래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 노래가 나올 당시 연해주에서는 1918년 가을 소비에트 붉은 군대와 짜르 백군 간에 내전이 일어났다. 일본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은 자국으로 혁명의 기운이 전파되는 것을 두려워해서 백군과 합세했고, 왜놈이라면 치를 떨던 고려인들은 일본군이 짜르 백군을 지원하면서 독립군 부대들을 토벌하자 일본군을 연해주에서 몰아내기 위해 소비에트 붉은 군대와 연합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의 아버지 황운정을 비롯해서 홍범도, 영화 ‘놈놈놈’의 모티브가 되었던 ‘15만원 탈취사건의 주인공’ 최계립, 한창걸, 오하묵 등 독립군 대장들은 한인 파르티잔 부대를 결성하여 볼로차옙까, 소왕령, 이만, 수청, 뽀시예트 등지에서 영웅적 전투를 치렀으며, 러시아 내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바로 이들 한인 파르티잔들의 노래이자 자신의 아버지의 삶이 담긴 노래를 그는 동포들이 모이는 다양한 연회에서 자주 불렀고 “한인 파르티잔들의 마을이었던 연해주 ‘싸말리’마을에서 자란 나는 어린 시절 동네 아저씨들이 부르는 이 노래를 자주 들었기 때문에 아직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다”고 말했다.
황 마이 운데예비치씨(95)는 1929년 5월1일, 항일독립운동가 황운정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황운정 지사는 함경북도 온성에서 태어나 온성과 종성에서 벌어진 3·1운동에 참여한 뒤 만주를 거쳐 러시아로 건너가 연해주 솔밭관부대에서 독립군 간부로 항일무장투쟁에 가담한 분이다.
그러나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되어 1930년대말까지 서구 자본주의를 뒤흔든 세계대공황은 연해주에 사는 황운정 지사와 그 가족의 운명까지도 순식간에 뒤바꿔 놓았다. 당시,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독일은 ‘나치독일’로, 이탈리아는 ‘파시즘’으로,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며 극우 군국주의에 빠지게 되자 절대절명의 국가적 위기를 느낀 소련은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는 등의 대대적인 내부 단속에 들어가는데 이 와중에 황운정 지사는 일본의 첩자라는 죄명으로 3년 형을 선고받고 지금의 카자흐스탄 카라간다로 유배를 당하게 된다.
이 사건은 당시 6살에 불과한 어린이였던 황마이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갑자기 가장을 잃은 어머니와 3남매들은 극심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어머니는 삵바느질을 해서 우리를 키우셨는데, 굶는 게 다반사였고 배고픔이 일상이었지" 라고 말하는 황마이는 “이런 어려운 환경은 나를 굳은 의지의 사나이로 담금질 했어”라고 설명했다.
1937년 고려인들의 강제이주 당시 카자흐스탄 북부 아크몰라 지역에 도착한 그와 그의 가족은 석탄 수송 기차에서 떨어진 석탄 덩어리들을 주워서 불을 피웠고 그렇게 추운 겨울을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아버지로 부터 물려 받은 튼튼한 육체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면서 길러진 굳은 의지는 훗날 그가 카자흐스탄 최초의 소련공훈체육인 칭호를 받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1941년 그의 아버지가 출소해 가족 곁으로 왔으나 나찌 독일이 소련을 기습적으로 침략함으로써 시작된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그의 가족을 포함한 모든 이들의 삶이 또다시 고난속에 빠지게 된다.
◆ 꿈을 안고 러시아로 ~
2차 대전이 끝난 후 카자흐스탄의 카즈셀 마쉬라는 농장 건설현장에서 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잠시 경험한 뒤, 황마이는 청운의 꿈을 안고 러시아 유학을 결심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려인들에 대한 거주이전의 자유가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거주하는 꼴호즈 외 타 지역으로 이주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일반열차가 아닌 화물열차를 타고 러시아 모스크바로 향했다.
열차표를 살 돈이 없어 화물칸에 몰래 탔는데 발각돼 쫓겨나면 또 다른 화물열차로 바꿔 타고 결국 그는 러시아에 입성하여 소르토발스키 체육기술대학에 들어간다. 이후 다시 레닌그라드 해군양성학교(현 체육기술대학)로 전학해서 학업을 이어갔던 그는 만 18세에 불과했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글 읽어라! 글을 읽지 않으면 머저리가 된다 라는 말씀을 듣고 자랐기 때문에 공부에 전념할 수 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막상 막내아들이 러시아 유학을 간다고 하자 이에 반대하던 어머니에게 그는 "레닌그라드에 있는 해군양성학교에 가면 공부도 시켜주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준다"면서 설득했다고 한다.
◆ 독립군 아버지의 유전자가 스포츠에서 발현되다
항일무장투쟁을 펼쳤던 아버지 황운정 지사의 유전자는 그에게 튼튼한 몸과 천부적인 운동신경을 물려주었다. 그는 1952년 스케이팅 트레이너의 권유로 스케이팅에 입문했다.
1953년 레닌그라드 체육기술대학 졸업 후 카자흐스탄 메데우 스포츠팀 일원으로 스피드스케이팅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1954년부터 카자흐스탄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코치 겸 선수로 활약했던 그는 1956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동계올림픽 소련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출전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된다.
56년 이탈리아 동계올림픽은 여러모로 의미있는 대회였는데, 동계 올림픽 처녀 출전국 소련은 이 대회에서 종합 메달 수에서 1위를 기록하며 동계 스포츠 최강국임을 만방에 알리게 되는 기념비적인 대회였다.
이때 황마이가 가르친 선수들이 큰 기여를 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이후 이어진 국제빙상대회에서 그의 제자들은 금메달을 휩쓸다시피 함으로써 소련의 위상을 크게 올려놓았다. 그런 공로를 인정받아 황마이는 1960년 고려인으로선 옛 소련연방이 수여하는 카자흐스탄공화국 최초의 스피드스케이팅 공훈트레이너가 됐다.
이후 황 마이 운데예비치는 스피드스케이팅 지도자를 20여 년간 역임하면서 수많은 선수들을 양성했고 그 중에서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한 선수를 포함한 세계정상급 선수들만 해도 100여 명이나 된다. 또한 그가 가르친 제자 중 30여 명이 현재 러시아를 비롯한 CIS국가의 공훈트레이너가 됐다.
1990년 카자흐스탄 국립 체육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를 각각 획득해 구소련의 국가적 영웅이 된 세계적인 체조 선수 넬리 김을 발굴하기도 했다.
또한 황마이는 피겨학과를 설립하여 제자들을 길렀는데, 그 제자가 훗날 카자흐스탄의 피겨 영웅이 되는 데니스 텐을 발굴한다. 데니스 텐은 황마이의 영향권하에서 발굴되고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동포사회에 활기를 불어넣는 사람
그는 카자흐스탄공화국 문화체육발전 훈장을 수훈하고, 10대 명예스포츠 인사에도 포함되었을 뿐만 아니라 2023년 11월, 사랑하는 부인과 사별하고 혼자서 살고 있는 그는 지금도 여전히 동포사회의 어른으로서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팔을 걷어붙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낙천적이고 소탈한 성격으로 언제 어디서라도 동료, 후배 체육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겨한다. 구순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후배들과 함께 당구치는 걸 즐긴다. 그의 당구실력은 일반인들의 수준을 능가하는데, 이에 얽힌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다.
황마이 선생은 은퇴를 하고 막상 일상으로 돌아와 보니깐 주위의 친구들은 벌써 은퇴를 하고 모여서 당구를 즐겼는데, 실력이 없는 그를 끼워주질 않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는 친구들 곁에서 가만히 당구 동작을 분석했다고 한다.
그후 그는 집에서 밥을 먹을 때나 텔레비젼을 볼 때에도 테이블 위에 왼쪽을 올려놓고 오른손으로는 당구를 치는 시늉을 하며 그가 분석한 그 스트로크 동작을 반복했다고 한다. 20년 먼저 당구를 배운 친구들을 3개월 만에 따라 잡을려면 최소한 친구들만큼의 당구 스트로크 횟수 이상을 팔 근육을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하루 1000번 이상씩 스트로크를 했다고 한다.
결국 3개월 뒤 그는 20년이나 먼저 당구를 치기 시작한 동료들 만큼이나 부드럽고 안정적인 당구 스트로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급기야 친구들과의 당구 게임에서 그들을 당당히 꺽을 수 있었고 이런 결과에 당시 친구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집념의 소유자였기에 수많은 선수들을 조련해서 세계적 선수로 성장시킬 수 있었으리라. 카자흐스탄 최초의 공훈체육인 칭호는 그런 결과에 따르는 부수적인 산물이었뿐…
인터뷰를 마치고 감사의 인사를 건네는 나의 손을 잡는 그의 손아귀 힘이 얼마나 세던지 마치 삳바를 웅켜쥐는 씨름선수와 악수를 하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 손은 좀 아팠지만 내심 기분이 무척 좋았다. 황마이 선생이 그만큼 건강하다는 증표이기 때문이었고 매일 아침 댁에서 나와 삿빠예바 거리를 2시간씩 걸으시며 건강관리를 하시던 그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글은 황마이 선생님의 다가오는 95번째 생신을 축하드리며, 더욱 건강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하는 마음에서 쓴 글이다.>
알마티에서 김상욱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