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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범도 장군의 알려지지 않은 생의 한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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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범도 장군의 알려지지 않은 생의 한 페이지
      27.11.2025
      크즐오르다의 역사는 영원히 홍범도 장군의 이름과 함께한다. 그의 마지막 생애가 이 곳에서 흘러갔고,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의 홍범도 장군 추모 기념비를 찾아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운 영웅에게 경의를 표한다.

      홍범도 장군(아카이브 문서에는 ‘홍뼘도’(Хон Пем До), ‘홍뱀도(Хон Бемдо)’ 등으로 표기됨)은 일제 식민 지배에 맞선 조선 민족해방운동의 영웅이었다. 복잡하고 험난한 삶을 살았지만 끝까지 신념과 인간적 용기를 잃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크즐오르다의 열악한 생활 여건 속에서도 양심과 의리를 지키며 자신의 신념을 굳건히 지켰다. 이곳 카자흐 초원에서 그는 한 농민으로 시작해 민족 영웅에 이르기까지의 생애 여정을 마감했다.
      홍범도 장군의 생애는 여러 연구와 자료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의 삶의 모든 장면이 문헌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크즐오르다 주립문서보관소의 자료를 통해 우리는 그를 단순한 장군이 아니라 소박하고 따뜻하며, 사람과 정의를 위해 헌신한 인간 홍범도로 바라볼 수 있다. 그는 노년에도 정의와 민중을 위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 오늘날 크즐오르다의 가장 긴 거리 중 하나가 그의 이름을 따르고 있으며, 그의 기념비는 역사와 추모의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다.
      홍범도 장군이 붉은 군대 외투와 부듀노프카(붉은 군대식 모자)를 착용한 사진은 그의 초상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이미지 중 하나이다. 이 사진은 1921년에 촬영된 것으로, 현재 주(州)문서보관소에 소장된 원본 뒷면에는 항일 무장투쟁 참가자 이인섭이 남긴 글이 적혀 있다. ‘’그는 민족이 낳은 전설적인 영웅이자 동지 홍뼘도였다. 그는 평생을 조선과 연해주에서 일본 침략자들과 싸우는 데 바쳤다. 그의 아내와 아들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함께 전사했다. 이 사진은 위대한 지도자 V.I.레닌으로부터 권총을 하사받은 것을 기념해 촬영된 것이다.’’
      1937년, 연해주에서 고려인이 강제이주됨에 따라 고려극장 (68 명) 또한 크즐오르다로 함께 이전되었다. 이어 1938년2월20일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 제201-34ss호 「고려인 이주민의 생활 정착에 관한 결의」에 따라 극장 보수 및 장비 마련을 위해 25만 루블의 예산이 배정되었다. 당시 고려극장은 극도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활동했다. 가장 큰 문제는 전용 극장 시설 부족과 새로운 작품을 위한 무대 장치 제작 자재의 절대적 부족이었다.
      1939년 당시 극장의 레퍼토리에는 투르 형제와 엘. 셰이닌의 《대질 심문(Очная ставка)》, 태장춘(Тхай Дян Чун)의 《카자흐스탄의 삶(Жизнь Казахстана)》, 막심 고리키의 《적(Враги)》, 연성용(Ен Сен Нен)의 《춘향전(Чун Хян Ден)》, 코르네이추크의 《함대의 난선(Гибель эскадры)》, 염사일(Ем Саир)의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사랑(Любовь к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ой родине)》 등이 포함돼 있었다. 이 해에 총 140편의 연극이 이루어졌으며, 관객 수는 4만4,500명에 달했다. 1940년에는 총6만6606 명의 관객을 동원했으나 자체 공연장을 확보하지 못한 탓에 공연과 연습이 취소되는 일이 잦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은 홍범도가 새로운 방식으로 민중에게 헌신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그는 난방을 담당하는 보일러공이자 경비원으로 일했지만, 단순한 육체노동에 그치지 않았다. 여러 기록 보관 문서를 보면, 그는 극장의 순회공연 계획을 논의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배우들과 직원들의 활동을 진심으로 걱정했으며, 당 조직 강화와 정치적 소양 향상의 필요성을 자주 강조했다. 또한 중요한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제시했다.
      극장 당(黨) 조직 회의록에는 그의 살아 있는 진심 어린 발언들이 다수 남아 있다. 그는 극장이 어떻게 발전해야 하는지, 형식주의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 그리고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이 있는 집단농장(콜호스)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등을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다.
      홍범도 장군의 발언들 (1938~1941년):
      ‘’저는 당 학습(партучеба)을 성실하게 임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점이 하나 있는데, 현재 볼셰비키 공산당 역사(ВКП(б))가 러시아어로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초 단계의 소모임에서 공부하며 배우고 있습니다.'' (1938년)
      ''계획에 따르면 극장이 크즐오르다 지역으로 가야 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먼저 타슈켄트에서 순회 공연을 하는 것이 더 편리하고 합리적이라고 봅니다. 그곳의 기후 조건이 아랄스크나 카잘린스크 지역보다 훨씬 나아 공연 활동이 더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1939년)
      ‘’혁명투사들을 지원하는 국제단체(MORP)의 사업에 최대한 관심을 기울여, 대중 선전∙설명 활동을 철저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내는 ‘1코페이카(소련의 화폐 단위 루블의 100분의 1에 해당하는 가치를 가진 동전)가 혁명가들을 돕는 데 쓰인다는 사실을 모두가 분명히 이해하도록 해야 합니다.’’ (1939년)
      ‘’문화적 수준에서 극장 종사자들은 항상 앞장서야 합니다 <…생략> 가까운 시일 안에 순회 공연 준비를 마쳐, 가능한 많은 집단농장(콜호즈) 주민들을 공연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1939년)
      ‘’극장에는 자체 건물이 없습니다. 그로 인해 공연 준비와 연습이 자주 중단되고 있습니다.’’ (1941년)
      ‘’우리 당초급 조직에는 당원이 단 세 명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활동하기 어렵습니다. 검증된 우수한 사람들을 당으로 적극 끌어들이는 데 진지하게 힘써야 합니다.’’ (1941년)
      ‘’우리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 투기꾼들과 허위 소문 유포에 대해 단호하게 싸워야 합니다.’’ (1941년)

      홍범도 장군은 조선어 자료가 없어 당 역사 공부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의 이러한 진솔함은 오히려 깊은 존경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1927년부터 당원입니다. 하지만 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 당의 정책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그는 1939년 회의에서 말했다.
      당 정책을 온전히 공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러시아어를 알지 못했고, 조선어로 된 교재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들은 약함이 아니라, 당시 공식적인 당 담론에서 보기 드문 솔직함과 자기비판의 사례였다. 홍범도는 비록 완전한 형태로 참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다.
      1941년 위대한 조국전쟁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홍범도는 다시 한 번 시민이자 애국자로서의 본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그의 나이는 73세였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 군사위원부를 찾아가 전선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비록 그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다. 홍범도는 가장 먼저 국방기금에 250루블 상당의 채권과 한 켤레의 발렌키(겨울에 신는 러시아 전통 부츠)를 기부했다. 그가 바친 것은 물건 몇 점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진심 어린 각오였다.
      또한 기갑부대 건설을 위한 기금에는 다음과 같은 기부가 이루어졌다. ‘’김관학 – 100 루블, 홍범도 – 30 루블, 정후겸 – 40 루블, 박충섭 – 35 루블, 김옥춘 – 30 루블’’이다. 그는 주민들과 극장 직원들을 대상으로 지속적인 계몽 활동을 펼쳐 전쟁 시기 필요했던 사기 진작에 기여했다. 홍범도는 전쟁터에서 싸울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 그의 삶은 늘 그랬듯이, 전투하듯이 완전한 헌신으로 채워져 있었다.

      홍범도 장군은 1943년10월25일 크즐오르다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사후, 묘지는 점차 방치되기 시작했다. 1951년과 1959년에 그의 무덤을 방문한 이인섭은 그 황폐한 상태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개인적으로 묘지 보수 비용을 마련했고, 크즐오르다의 당 기관에 공식 서신을 보내 홍범도 장군에 대한 정당한 예우를 요구했다. 그는 ‘’홍범도 동지의 묘는 크즐오르다의 다른 형제묘와 마찬가지로 마땅히 관심을 받아야 한다. 그는 기억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영웅이다’’라고 강조했다. 또한 홍범도의 초상이 반드시 크즐오르다 박물관 전시관에 다른 혁명가들과 함께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인섭의 이러한 노력은 홍범도 장군의 이름이 역사 속에 잊히지 않도록 하는 첫걸음이 되었다.
      이후 수십년 동안, 많은 이들의 노력과 더불어 국가와 사회의 지원으로 홍범도 장군의 이름은 역사적 기억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유산 보존에 특히 큰 기여를 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로, 크즐오르다에 위치한 그의 모역에 독립기념관을 건립하는 사업을 지원했다. 크즐오르다 주와 시 당국 역시 많은 도움을 제공하여 부지 제공 및 정비, 주변 환경 개선 등이 이루어졌다. 해마다 크즐오르다에서는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 주카자흐스탄 대한민국 대사관, 지역 행정기관 등이 함께하는 추모 행사와 헌화식이 진행되고 있다. 이 모든 노력은 홍범도 장군의 기억이 단지 역사 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세대의 마음 속에서도 계속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보여준다.
      홍범도의 삶은 명예와 굳건함, 그리고 조국과 민족에 대한 헌신을 보여주는 모범과도 같다. 그의 이야기는 유배의 기록이지 패배의 역사는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조국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한 사람이, 결국 그 조국을 상징하는 인물로 자리하게 된 여정이기도 하다. 홍범도는 가난한 농민에서 출발해 민족 영웅에 이르기까지 비범한 길을 걸어온 인물이다. 타지에서, 사람들에게 잊힌 채, 공식 역사에서도 벗어난 채 살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민중을 위한 길을 멈추지 않았다. 극장 동료들을 돕고, 부당함에 맞서며, 주변 사람들에게 삶으로써 용기와 영감을 주었다. 홍범도의 이야기는 살아 있는 인간, 진짜 투사의 이야기다. 겉으로 꾸며진 영웅상이 아니라 아픔도 있고, 흔들림도 있고, 믿음과 끝없는 의지가 있었던 사람의 삶이다. 그는 19세기말 ~ 20세기 초 한∙중∙러의 주요 역사적 격변 속에서 의병, 지휘관, 병사로서 싸웠고 이후에는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보일러공과 경비원으로 살아갔다. 그러나 어떤 역할을 맡았든, 그는 언제나 똑같았다. 정직했고, 헌신적이었으며, 품위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아직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 하지만 당시 기록과 회고록을 넘기고 있으면 마치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크게 말하게 않지만 강하고 단단한 목소리. 평생을 조국을 위해, 사람들을 위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간 사람의 목소리이다.

      김이리나,
      경제학박사, 크즐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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