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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귤락(橘絡) - 귤을 까면 손끝에 달라붙는 그 하얀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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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귤락(橘絡) - 귤을 까면 손끝에 달라붙는 그 하얀 실
      귤락(橘絡) - 귤을 까면 손끝에 달라붙는 그 하얀 실
      23.07.2026
      정태철의 한국에서 부치는 편지
      숨은 이름 찾기

      첫 번째 숨 겨울이 오면 누구의 손에나 귤이 들립니다. 거실 한쪽에는 귤 상자가 놓이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는 한 손으로 껍질을 까서 알맹이를 입에 넣습니다. 엄지손톱이 노랗게 물들도록 하루에도 몇 개씩 까먹는 것이 겨울의 흔한 풍경입니다. 그런데 알맹이를 떼어 들면 늘 따라오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과육에 실처럼 엉겨 붙은 하얀 섬유질입니다. 우리는 대개 이것을 손끝으로 떼어 냅니다. 굵은 것은 길게 벗겨 내고, 가는 것은 손바닥에 대고 비벼서 털어 냅니다. 그러고는 아무 생각 없이 버립니다. 어릴 적부터 수백 번을 되풀이해 온, 거의 본능에 가까운 동작입니다.

      사람마다 이 실을 대하는 솜씨도 제각각입니다. 누구는 한 올도 남기지 않으려 꼼꼼히 떼어 내고, 누구는 굵은 것만 대충 걷어 낸 뒤 그냥 입에 넣습니다. 한집 식구끼리도 떼어 내는 방식을 두고 한마디씩 거들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매일같이 떼어 내면서도, 정작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는지는 잘 모릅니다. 누가 물으면 우리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거 있잖아, 귤에 붙은 그 하얀 거"라고 답하고 맙니다. 세상의 거의 모든 것에는 이름이 있는데, 손에 매일같이 닿는 이 흔한 것에는 마치 이름이 없는 듯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오늘은 그 하얀 실의 이름을 찾아 드리려 합니다. 그리고 이름을 따라가다 보면, 버릇처럼 버리던 그 실이 생각보다 훨씬 흥미로운 물건이라는 것도 알게 되실 것입니다.


      그 하얀 실의 이름

      이 하얀 실의 이름은 귤락(橘絡)입니다. 앞 글자는 한자 귤(橘)이고, 뒤에 붙은 락(絡)은 잇다, 얽히다, 두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귤락은 글자 그대로 풀면 귤을 두르고 얽힌 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락(絡)이라는 글자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한의학에서는 사람의 몸을 길의 그물로 봅니다. 기운과 피가 흐르는 굵은 큰길을 경맥(經脈)이라 하고, 거기서 갈라져 나와 살갗 구석구석까지 퍼지는 가는 샛길을 낙맥(絡脈)이라 합니다. 큰 줄기에서 잔가지가 뻗어 나가듯, 온몸을 빈틈없이 잇는 길입니다. 침을 놓는 자리도 바로 이 길 위에 있습니다.

      귤도 가만히 보면 작은 몸과 같습니다. 얇은 속껍질에 싸인 알갱이들이 조각조각 모여 한 알을 이루고, 그 위로 하얀 실이 골을 따라 흐릅니다. 귤을 반으로 갈라 들여다보면, 과육 위에 바로 그 낙맥을 닮은 하얀 실들이 촘촘하게 뻗어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그 모습에서 사람 몸의 낙맥을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귤의 경락이라는 뜻을 담아 귤락이라 불렀습니다. 흔히 성가시다고 버리는 실 한 올에, 사람 몸을 빗댄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작은 과일 하나에서도 사람의 몸을 읽어 내려 한, 옛 동양의 눈길이 그 이름에 배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귤만큼 사람들이 꼼꼼히 들여다본 과일도 드뭅니다. 우리 조상들은 귤의 부위마다 다른 이름을 붙였습니다. 겉껍질은 귤피(橘皮)라 하고, 그 껍질 안쪽의 도톰한 흰 부분은 귤백(橘白)이라 했으며, 과육 쪽에 붙어 그물처럼 퍼진 흰 실은 따로 귤락이라 불렀습니다. 한 알의 작은 과일을 이렇게 부위별로 나누어 이름 붙였다는 것은, 그만큼 오래 가까이 두고 살뜰히 살펴 왔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거라 부르는 물건들은 흔히 마땅한 우리말 이름이 없어 영어나 외래어를 빌려 쓰곤 합니다. 그런데 귤락은 정반대입니다. 우리 곁의 이 작고 흔한 흰 실에는, 오히려 사람의 경락에 빗댄 그윽한 이름이 진작부터 붙어 있었습니다. 흔하다고 해서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식물학에서는 이 흰 부분을 알베도(albedo)라 부릅니다. 라틴어로 흰빛을 뜻하는 말입니다. 같은 흰 실을 두고, 한쪽은 사람의 경락에 빗대었고 다른 한쪽은 그저 흰빛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동양은 몸속의 길을 떠올렸고, 서양은 눈에 비친 빛깔을 보았습니다. 이름에는 이렇게, 그것을 바라본 사람의 눈과 마음이 함께 담깁니다.

      이름이 하나가 아닌 사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그럴듯한 이름을 가진 귤락이 정작 국어사전에는 표준어로 올라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쓰인 토박이말이라는 근거도 뚜렷하지 않습니다. 귤락은 본디 한의학에서 온 말에 가깝고, 옛 의서는 같은 부위를 귤낭상근막(橘囊上筋膜)처럼 전혀 다른 이름으로 적기도 했습니다. 결국 하나의 하얀 실을 두고, 한의학의 이름과 식물학의 이름과 사전의 빈자리가 나란히 놓여 있는 셈입니다. 말이란 사전에 오르기 한참 전부터 사람들의 입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모두가 부르는 이름이 아직 표준어가 아닐 수도 있고, 그 어긋남 자체가 말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름이 여럿인 김에 한 가지 더 짚겠습니다. 우리가 자주 헷갈리는 대목입니다. 잘 익은 귤껍질을 말린 것은 진피(陳皮)라 하여 예부터 약재로 귀하게 썼고, 덜 익은 푸른 껍질을 말린 것은 청피(靑皮)라 하여 또 달리 썼습니다. 그러나 이 진피도 청피도 모두 껍질이지, 과육에 붙은 귤락이 아닙니다. 같은 귤 한 알에서 나왔어도 껍질과 흰 실은 이름도 쓰임도 다릅니다. 흔히 귤락을 진피라 잘못 부르기도 하는데, 둘은 분명히 다릅니다.

      옛 의서들도 귤의 흰 부분을 그저 버릴 것으로만 보지는 않았습니다. 오래된 본초서들은 귤의 껍질과 흰 막이 갈증을 멎게 하고 속을 다스리는 데 쓰인다고 적었습니다. 입에는 쓰고 텁텁해도 몸에는 약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영양학의 눈으로 보아도 그렇습니다. 귤락이 질기고 텁텁한 것은 펙틴이라는 식이섬유 때문이고, 입에 쓴 것은 나린진이라는 성분 때문인데, 둘 다 몸에는 이로운 것들입니다. 펙틴은 장을 부지런히 움직이게 하여 묵은 것을 내보내고, 귤락에 든 헤스페리딘이라는 성분은 가는 혈관의 벽을 튼튼하게 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 연구는 이 흰 부분에 몸에 이로운 항산화 성분이 오히려 과육보다 많다고 전합니다. 신기하게도, 입에서 가장 꺼리던 그 쓴맛과 텁텁함이 사실은 몸에 가장 이로운 부분이었습니다. 맛없다고 떼어 낸 바로 그 자리가, 알고 보면 알맹이 못지않게 알뜰한 곳이었습니다. 물론 무엇이든 지나치면 그만이니, 하루에 두세 개면 넉넉합니다.

      흔하지만 귀했던 것

      이름을 알고 나니 귤이 조금 달리 보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귤이라는 과일도 처음부터 흔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는 겨울이면 누구나 상자째 쌓아 두고 먹지만, 조선 시대만 해도 귤은 제주에서만 나는 매우 귀한 진상품이었습니다. 바다를 건너 임금께 올리던 과일이라, 일반 백성은 쉬이 맛보기 어려웠습니다. 귤이 궁에 올라오면 이를 기념하여 성균관 유생들에게 귤을 나누어 주고 특별한 과거 시험을 치르기까지 했는데, 이 시험을 황감제(黃柑製)라 불렀습니다. 글을 써서 귤을 받던 셈입니다. 손톱으로 무심히 까서 실을 떼어 버리는 이 흔한 과일이, 한때는 시험의 상으로 내려질 만큼 귀한 것이었습니다. 제주에서 바다를 건너 실어 오는 동안 귤이 상하기 일쑤여서, 진상할 양을 채우느라 제주 백성이 겪은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귀하던 귤이 누구나 겨울에 상자째 먹는 흔한 과일이 된 것은, 사실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새해를 여는 향기

      귤을 귀하게 여긴 것은 이 땅만이 아니었습니다. 고려인의 삶이 뿌리내린 이 너른 땅에서도, 겨울이 길고 신선한 과일이 드물던 시절에 귤은 오래도록 쉬이 얻기 어려운 과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밝아 올 무렵이면, 상자로 실려 온 귤이 집집마다 상 위에 올랐습니다. 다른 과일이 드물던 한겨울에 코끝으로 번지는 그 상큼한 향은, 어느새 새해의 냄새가 되었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 손에 귤을 하나씩 쥐여 주었고, 그 노란 알들은 한 해의 복을 나누는 작은 선물이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귤은 오래전부터 복과 잘 어울리는 과일이었습니다. 그 둥글고 환한 빛깔이 금빛을 닮았다 하여, 멀리 동쪽에서는 예부터 귤을 넉넉함과 행운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새해 첫 상에 오른 귤은 그저 겨울 간식이 아니라, 한 해의 안녕과 복을 비는 마음이 담긴 과일이었습니다. 같은 귤을 두고 한쪽에서는 임금께 올렸고 다른 한쪽에서는 새해의 복으로 나누었으니, 이 작은 과일이 지나온 사연이 참으로 깁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

      사물의 이름을 알고 나면 그 사물이 달리 보입니다. 사람의 이름을 알게 될 때와 비슷합니다. 그저 스쳐 가던 사람도 이름을 부르는 순간 특별한 한 사람이 되듯이, 이름 없이 버려지던 물건도 이름을 얻는 순간 비로소 눈에 들어옵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작은 일 같지만, 늘 보던 세상을 조금 더 또렷하게 들여다보는 돋보기를 하나 얻는 일입니다.

      새해를 맞아 귤을 까다가 그 하얀 실이 손끝에 붙거든, 잠시 멈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의 숨은 이름은 귤락입니다. 귤의 몸을 그물처럼 두른 가는 경락이고, 우리가 모르고 버려 온 작은 영양 덩어리이며, 사전조차 아직 자리를 마련하지 못한 떠도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름 하나를 알았을 뿐인데, 손안의 흔한 귤 한 알이 사뭇 달리 보입니다. 그거라고 불리던 세상의 수많은 것들에게도, 실은 저마다 이런 이름과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이름을 하나 알 때마다, 늘 곁에 있어도 보이지 않던 세상이 한 뼘씩 또렷해집니다. 작은 이름 하나가 큰 세상을 새로 열어 줍니다. 그 이름들을 하나씩 찾아 드리는 것이, 이 글이 앞으로 할 일입니다.

      정태철
      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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