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함 과잉. 그것이 내가 느낀 고려인들의 초기 정착 과정이었다. 알마티에서 우슈토베로 가는 길은 어찌나 황량하던지 비행기에서 느꼈던 들뜸을 눌러주며 내가 무엇을 보러 가는지 상기시켜주었다. 콜호스는 고려인이 카자흐스탄에서 경제적, 정치적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한 공간이다. 하지만 조사 당시 고려인의 기반이 되어준 콜호스들이 해체 이후 그 역사가 점차 잊히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직접 방문한 콜호스는 그 이야기와 같았다. 고려인들의 피와 땀이 마치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잊혀 가고 있었다. 최초 고려인 학교에서 더는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으며, 옛 고려극장 터에는 어떤 표지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허허벌판에 세워진 고려인 초기 정착지 기념비에서 대규모 고려인 무덤을 볼 때는 그 감정들이 증폭되어 외로움과 쓸쓸함이 나를 압도했다. 아무것도 없는 회갈색 들판에 수없이 세워진 묘비들은 세찬 칼바람을 보내주었다. 콜호스의 모든 것은 그들을 지워갔지만 새하얀 눈 만큼은 그 아픔을 잊지 못했는지 들판을 다 덮지 않았다. 듬성듬성 솟아오른 슬픔들은 우리네 아버지의 상처투성이 손을 보는 듯했다. 퍼렇게 물든 멍들은 잊힌 채 지워지고 있지만,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가족을 위한 마음으로. 차가운 비석들만 그 자리를 데우고 있었다.
고려인 콜호스들은 최악의 열악한 상황에서도 피와 땀으로 땅을 일궈냈다. 1948년부터 1976년까지 경제와 문화건설에서 높은 성과를 올린 사람들에게 부여하기 위해 제정된 사회주의 노력영웅 칭호를 206명이나 받게 된다. 이는 인구수 대비 소련의 소수민족 중 가장 높은 비율이다. 그중 선봉 콜호스는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주 칠리 구역에서 고려인 중심으로 결성된 콜호스로 벼재배에 엄청난 성과를 내며 소련 전체에서 벼농사의 중심지로 주목받는다. 전시상황 속 35만 루블 이상의 전쟁 비용을 기부하였으며, 16명의 노동영웅들을 배출했다. 크즐오르다 지역 박물관에서 그 내용 확인이 가능했다. 크즐오르다 사회주의 노동영웅 훈장을 받은 인원을 적어놓은 벽면엔 고려인의 이름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근면함은 고려인의 이명이었을 것이다. ‘근면 성실함’으로 인정을 받으며 콜호스를 바탕으로 안정적으로 2세들을 도시로 보낼 수 있었으며, 도시에서도 그 이름을 인정받은 이들은 오늘날 카자흐스탄의 자산가 순위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할 정도로 성공하였다.
카자흐스탄은 앞서 본 고려인들의 아픔들을 기억해주고 있는 것일까. 까라탈 고려인 역사 단지에서 정이 가득한 비빔밥을 먹었다. 기념관에는 고려인의 이주 과정이 상세하게 적혀져 있었고 고려인의 초기 정착 모습이 자세히 재현되어 있었다. 크즐오르다에서는 홍범도, 계봉우 선생의 기념관을 보았고 우정의 집에서 고려인분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또 알마티의 고려극장은 90년의 역사를 이어 그 의지를 계승하고 있었다. 고려일보 신문사는 1938년에 재개된 레닌기치를 이어 계속해서 고려일보를 간행해 오고 있었다. 옛 레닌기치는 100년의 고려인 역사를 잇는 동맥이었다.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줄 때에는 거목의 묵직하게 펄떡이는 혈관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역사의 무게에 숨쉬기 어려웠지만, 한층 마음이 편해지며 가슴이 뭉클했다. 누군가가 꺼슬거리는 멍투성이 손을 잡아주고, 기억해주고 있었다. 그들은 여기 있었으며 우리는 그들을 잊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있다.
고려인의 거목은 꼿꼿이 몸을 세우고 있었다. 약간의 아쉬움은 있었지만, 그 단단한 심을 본 이상 걱정할 이유는 없었다. 고려인의 역사가 한국과의 협력으로도 보존되고 있음을 보았다. 한국과의 원활한 소통으로 그 의지가 이어지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박원균
상명대 역사콘텐츠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