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오월 어느날 아침 아파트관리사무소에 갔다.
관리사무소 앞 벤치에 앉아있던 아가씨는 나를 보자 “안녕하세요” 하며 일어나서 인사한다. 까만 눈 보다 더 까만 머리는 차분히 흘러내려 햇빛에 반짝인다. “베트남 새댁이네” 하며 나도 웃어주었다. 이것이 가슴으로 낳은 딸 콰를 처음 만나던 장면이다.
관리사무소에서 차 한잔 마시고 좀 늦게 나오니 그때까지 앉아있던 그녀는 “나 이모집에가서 차한잔 마셔도 되요?” 서툰 한국말이지만 나는 다 알아들었다. 그렇게 집으로 함께 와 차를 마시며 말을 시켜보니 부족한 표현이지만, 전형적인 베트남 가정의 세 자매의 장녀였고, 이름은 레티 홍콰 라고 했다.
친정집을 살리기 위해 한국행 결혼을 택한 효녀의 전형이다.
한국 남편은 그녀 나이의 배가 되는 48세이고 이혼남에 남매를 키우는 직장인이라고 한다. 나는 그녀와 친해지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도와주고 싶었다.
우선 한국말부터 제대로 할수 있게 시간날 때마다 만나서 함께 공부하기로 했다.
그 애를 만나면 나도 기분이 좋았다. 영리한 그 애는 하나를 가르쳐주면 여러 단어를 이어서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한글의 특성을 쉽게 파악한 것이다. 기억력도 뛰어나 내 전화번호는 물론 이웃 아주머니들의 전화번호마저 적지 않고 외웠다. 짧은 시간에 한글을 떼고 말하고 쓰는 데 지장없이 해냈다. 꽈는 이웃 아주머니들한테도 사랑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 항상 생글거리며 웃는다. 그렇게 상냥한 사람을 누가 싫어하겠는가. 집으로 초대해 음식을 해주고 작아서 못 입는 옷을 챙겨주고 사랑해 주었다.
우리 가족들도 물론 꽈를 가족처럼 챙겼다. 하루만 보지않아도 서로 궁금해 하는 조카와 이모사이가 되었다.
슈퍼에서 물건 고르는 방법, 재래시장에서 물건값을 깍는 방법 등 한국에서 살아가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가르쳤다. 우리 민속놀이 등도 현장에 가서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1년여가 지났을 어느날 밤12시가 넘어서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레티 홍콰를 아느냐? 부부싸움으로 콰가 남편한테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서둘러 그의 집으로 가니 경찰관이 둘이나 와 있었고, 콰는 울고 있었다. 그동안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내가 걱정할까봐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단 우리집으로 데려와 쉬게 했다.
그동안 싸움이 잦았고, 애들과의 사이도 원만하지 않았고, 남편은 헤어진 전 부인과 다시 만나고, 부인이 집에까지 찾아와 콰를 나가라고 했다 하며, 더 이상 버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베트남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남편마저 베트남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눈치다. 위자료도 없이 그냥 차비만 주겠다고 다른 동남아 부인들도 결혼한 뒤 그냥 도망쳐 버리는 일도 허다한데, 콰 한테는 차비라도 넉넉히 주어서 보내겠다고 한다. 그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설득해도 효과가 없다.
나는 이것은 아니다 싶었다. 콰에게 진심을 물었더니, 한국에서 돈 벌어 가난을 면해 보려고 왔고, 돈 버는 것이 목적이고 한국에서 잘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때 우리 가족들은 남의 일에 깊이 관여한다고 나를 염려했다.
그러나 콰는 남이 아니다. 이미 나의 조카다. 어찌 모른척 하겠는가. 우리는 답을 얻지 못하고 진정으로 콰가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아니 콰를 위한 길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했다.
그때 마침 콰와 함께 한국에 온 베트남 부인이 대전에서 쌀국수 장사를 하는데, 콰 소식을 듣고, 종업원으로 쓰기 위해 나를 찾아왔다. 콰도 대전에 가기를 원했고, 콰 남편 또한 가도 좋다는 답이다. 그러나 무조건 보낼 수는 없다. 남편의 허락하에 간다는 문서라도 작성해서 싸인이라도 받아야 불이익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편의 허락하에 취직한 것이라는 서류는 석장을 준비해서 셋이서 싸인했고, 나도 한장 보관하게 되었다.
대전 친구 가게에 데려다 주며 조심해야 할 것들을 녹음 테이프 틀듯 반복해서 말했다. 나중에 콰가 이모 녹음테이프가 이미 내 귀에 들어와 있으니 그만하라고 하며 웃었다. 그 뒤 서로 전화하며, 녹음테이프를 듣느냐 확인 하는 것도 내 일이 되었다. 그렇게 대전에서 2년여 동안 있으며 한 달 월급 130만원을 받아서, 120만원을 베트남에 보내고, 콰는 10만원으로 한 달을 지낸다 한다. 전형적인 베트남 효녀였다. 가끔 가서 콰가 고생하는 것을 보며 고생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마음 아파 했는데 시간은 더디 흐르는 듯 해도 한국에서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았다. 주민등록이 나오던 날 우리는 서로 안고 울었다.
그 뒤 콰의 주변이 많이 변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혼도 하고, 남편의 전 부인이 있는 자리에서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며 이혼만찬도 하고....,
그때 마침 대전 친구가 산후조리로 가게를 못하게 되어 콰가 인수하고 보증금도 벌어서 주기로 했다. 1년 뒤 베트남 사람이 많은 화성에서 자리 잡았다.
나는 대전에 가지 않고 화성에 가는 게 편했다.
그 뒤 콰의 가게가 베트남 사람 만나 결혼도 하고, 가게도 인천에 하나 더 내고, 그 애한테는 이모가 필요 없게 되었다.
세무서며 시청 등 혼자서도 잘 해냈다.
나는 콰가 성공한 것을 보며 진정으로 기뻐했다.
집과 자동차도 사고, 무엇보다 불우이웃 돕기도 앞장섰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콰가 tv 방송에 나가기로 했는데, 방송 내용중 사전에 이모에게 허락을 안 받아서 걱정이라고 한다.
모 방송국에서 한국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소개하는 프로가 있는데, 이모의 이야기를 했다 한다. 이모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였다고 공을 나한테 넘겼다 해서 내가 화를 냈다. 내가 한 일이 없는데, 왜 그렇게 말을 했느냐고...., 뜬눈으로 밤을 새운 나는 촬영장으로 운전하며 이동하는데 손이 떨렸다. 일단 가서 결정하자. 방송국에서 오기 전에 우선 나는 쌀국수를 먹었다. 따뜻한 국물에 아삭아삭 씹히는 숙주나물 먹는 것을 얼마나 즐기는지, 쌀국수의 목 넘김의 부드러움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콰 한테서 얻은 예기치 않은 기쁨이다.
내가 국수 그릇을 채 비우기도 전에 방송국에서 나왔다. 나는 먹던 입을 닦기도 전에 앞치마부터 입어야 했다. 나도 뭔가 이 가게의 일원으로 콰를 도와 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야 될 참인가 보다. 콰가 나한테 숙주나물을 갔다주며 다듬는 역할을 시키고 방송 카메라 앞에서 나를 소개한다. 한국 엄마라고... 나는 놀랐다. 내가 이모라고 밝히기도 전에 콰는 한국 엄마가 없었으면 나는 아마 지금 한국에 없었을 것이다. 한국 엄마의 사랑으로 자기가 더 열심히 살았고 한국에서 잘 정착할 수 있었다는 고마움을 표현했다. 내가 말해야 하는 대목에서 나도 무슨 말인가 했는데, 지금은 기억이 안 난다. 나를 엄마로 호칭한 것만 충격으로 다가왔다. 콰는 역시 이번에도 잘 해냈다. 노련하게 카메라를 안내해서 주방이며 쌀국수 먹는 손님들을 안내하는 콰를 보며 콰는 역시 무엇이든 잘 한다는 믿음을 확인했다. 저녁에 집으로 전화하는 콰는 내가 당황한 것을 기억하고 허락도 없이 엄마라고 불러서 미안하다고 한다. 처음부터 엄마라고 부르고 싶었다고 덧붙인다. 한국 엄마가 되어 달라고 사정하는 그 애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엄마노릇 하기가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 만은 아닌것을 아는 내가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우선 가족들의 의견을 들어봤다. 남편도 아들도 좋단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은 동생이 생겨서 좋다고 한다. 꽈의 성실함을 그들이 알기에 반대가 없을 줄 알았지만, 의외로 크게 반겼다. 아들 하나 낳고 다음에 형편 풀리면 고아원에서 딸 하나 데려가 키우면 그것도 사회에 좋은 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공부하는 남편과 다짐 했는데...
1970년대는 사회 분위기가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였다.
그렇게 나는 꽈의 이모에서 엄마가 되었다. 하늘에서 보내준 딸 이라고 믿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믿은 나는 우리 형제들에게도 전화로 알렸다. 모두들 잘 했다고 한다. 그렇게 내 딸이 된 꽈는 열심히 살았고, 딸 하나 아들 둘을 낳았다. 다섯을 낳을 생각 이였는데, 콰가 고도 비만이여서 셋만 낳았다. 신랑이 못내 아쉬워한단다. 어느 날 나는 사위를 데려다 혼냈다. 콰가 애를 더 낳으면 위험하다는데, 어찌 그리 미련하냐 했더니, 장모님이 무섭다고 하더란다.
콰가 낳은 세 아이들은 영리해서, 내가 방학 때가 되면 데려다 공부시키는데, 이미 유치원 다닐 때 한글을 떼고 구구단도 12단까지 외우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러니 손주 자랑을 안 할 수 없다. 내가 복이 많다. 아들도 착하지만, 하늘에서 내려준 가슴으로 낳은 딸도 착하니 말이다. 언젠가 친구 모임에 가서 손주 자랑 실컷 하고 내가 점심을 사고 강아지 자랑을 한 친구는 커피 값을 낸 일이 있다.
나는 가을이면 배추를 많이 산다. 딸 집 포함해 김장을 하기 위해서다. 힘들어도 재미있는 것을 보면, 나도 여느 엄마나 다를게 없다. 사흘이 멀다하고 전화하는 콰는 안마의자는 잘 되느냐, 일하지 마라, 식사는 잘 챙기느냐, 오빠는 집에 자주 오느냐, 김치냉장고는 잘 돌아가느냐 말이 많다. 이래서 딸이 있어야 된다고 하나보다. 나는 지금 행복하게 딸 시집살이를 하는 중이다.
화가 정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