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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잔불이 꺼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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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잔불이 꺼질 때…
      등잔불이 꺼질 때…
      08.06.2026
      알마티의 리스쿨로브 거리에 있는 공동묘지는 다른 도시의 묘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콘크리트 담장, 녹슨 철제 울타리, 빛바랜 사진들, 조화, 기울어진 십자가들… 이곳에는 나의 부모님이 잠들어 계신다. 사람들은 그 무덤 앞을 지나며 잠시 걸음을 멈추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발걸음을 늦추곤 한다. 아버지 김준빈과 어머니 허(허가이) 올가의 묘 앞에는 한자 모양의 두 개의 화강암 비석이 서 있다. 그 비석들에는 권력자들의 거대한 위엄도, 졸부들의 화려한 대리석 장식도, 남보다 더 크고 화려해야 한다는 묘지의 허세도 없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대학생이었다. 그 당시 나는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기에, 어떤 비석을 세워야 할지 어른들에게 물어보곤 했다. 이런 일에서만큼은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와 일터와 생활 속에서 가까이 지냈던 나미리 아저씨는 우리 성시 ‘김’(金)을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보여주며 말했다.
      “이 글자 그대로 비석을 만들어 드려라”.

      나는 그 글자를 한참 바라보았다. 단순하면서도 강한 힘이 느껴졌다. 아직 한자를 읽을 줄도 몰랐던 시절이었지만, 그것이 단순한 성씨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그림을 학과에서 ‘화가’로 불리던 동기 겐나 솔로비요프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벽보를 꾸미면 지루한 날짜와 구호조차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곤 했다.
      “이걸 도화지에 크기까지 맞춰 그릴 수 있겠어?”
      그가 한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눈을 가늘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어!”
      나는 둥글게 말아 든 도화지를 가지고 석공들을 찾아갔다. 그들은 종이를 펼쳐 보더니 하나둘 둘러서서 혀를 차고 고개를 저었다. 일이 너무 어렵다느니, 거의 불가능하다느니 중얼거렸다. 마치 단순히 화강암에 글자를 새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자를 처음부터 만들어 내야 하는 사람들처럼 그 한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비석은 완성되었다. 거기에 한쪽 면을 반듯하게 연마한 화강암 판까지 함께 놓였는데, 훗날 제사 음식을 올리는 상이 되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비석에 대해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어머니의 비석 역시 아버지의 것처럼 엄격하고 간결해야 했으며, 한자와 비슷해야 했다. 그것은 단지 허(許)라는 한국 성씨를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두 개의 비석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손주들의 머리 냄새조차 맡아보지 못한 채였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보다 열네 해를 더 살았다. 그 세월 동안 부모님이 평생을 살아온 나라는 사라졌다. 국기가 바뀌고 돈의 가치는 무너졌으며, 익숙했던 말들은 더 이상 힘을 잃었다. 1990년대는 차가운 외풍처럼 사람들의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텅 빈 진열대와 밀린 월급, 분노와 불안이 일상이 되었다.
      어머니는 그 모든 시간을 견뎌냈다. 정치를 논하지도 않았고, 닥쳐온 불행을 한탄하지도 않았다. 그저 새벽이 밝기 전에 일어나 한밤중까지 일했다. 여섯 명의 자식을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모두를 제대로 사람으로 키우고 교육을 시켜야 했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고려인식 반찬을 팔았다. 1~2년도 아니고 수십 년 동안 같은 일을 했다. 그것은 단순한 장사가 아니라 가족을 먹여 살리는 어머니의 삶이었다. 우리도 모두 그 일을 도왔다. 채소를 씻고 다듬고 썰었고, 전분 반죽으로 국수를 뽑았으며, 장작을 패고 수도가에서 물을 길어 왔다. 뜨거운 다리미로 비닐봉지를 붙이는 일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작은 가족 공장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그저 “엄마 도와드리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나는 새벽마다 무거운 손수레를 끌고 니콜스키 시장까지 갔다. 그 시간의 도시는 텅 비어 있었다. 차도 사람도 없었다. 희뿌연 새벽빛과 드문 개 짖는 소리, 닫힌 창문들, 그리고 삐걱거리는 수레 바퀴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수레는 길의 움푹 팬 곳을 지날 때마다 크게 흔들렸고, 나는 그 소리를 온 도시 사람들이 다 듣는 것만 같았다.
      그 수레는 단지 반찬 봉지만 싣고 가는 것이 아니었다. 내 사춘기의 부끄러움까지 함께 싣고 가고 있었다. 나는 시장에서 일하는 어머니가 부끄러웠던 것은 아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어머니가 얼마나 힘든 삶을 버티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새벽 거리에서 손수레를 끌고 가는 내 모습이 싫었다. 혹시 아는 사람이 나를 볼까 두려웠다. 나는 손수레를 끄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든 사람이 되고 싶었다. 김치 냄새 대신 책 냄새가 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수십 년이 흐른 뒤, 나는 서울대학교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게 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한 번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무언가로 돌아가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원래는 장학 프로그램에 따라 1년 반 동안 공부해야 했지만, 가족에게 빨리 돌아가야 했기에 반 년 만에 최종 시험을 치렀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을 네 명의 교사가 가르쳤다. 젊은 여성 교사 세 명과 나이 지긋한 남성 교사 한 명이었다. 그분의 이름도, 무엇을 가르쳤는지도 이제는 또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날 그 남자 교사가 들려준 이야기는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한국 사람이라면 거의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어머니들이 떡을 만들며 이야기하곤 하는 이야기다.
      옛날에 한호라는 소년이 살았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할아버지에게 글 읽기와 쓰기를 배웠지만 할아버지마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홀로 남은 어머니는 떡을 만들어 팔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다. 종이와 붓을 살 돈조차 없었던 소년은 물에 적신 손가락으로 질그릇과 나뭇잎, 돌 위에 글씨를 쓰며 공부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절에 보내 공부하게 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 날 밤, 아들은 집으로 돌아와 이제는 배울 것을 다 배웠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등잔불을 껐다. 그리고는 배운 글씨를 써 보라고 한 뒤, 자신은 계속 떡을 썰었다.
      잠시 후 다시 불을 켰다. 어머니가 썬 떡은 하나같이 반듯하고 고르게 놓여 있었지만, 아들이 쓴 글씨는 종이 위에서 이리저리 삐뚤어져 있었다. 그제야 한호는 어머너의 뜻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절로 돌아가 공부를 이어갔고, 훗날 ‘한석봉’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뛰어난 서예가가 되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서예나 옛 조선에 대해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 집 부엌과 칼, 배추와 당근을 떠올렸다. 그리고 어머니를 생각했다. 내 기억 속에서도 어머니는 어둠 속에서 채소를 썰고 있었다. 내 재능을 시험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시절 우리 삶에는 늘 빛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두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졌다. 한석봉의 어머니는 떡을 썰었고, 우리 어머니는 채소를 썰었다. 한 사람은 위대한 서예가를 길러냈고, 다른 한 사람은 여섯 남매를 키워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시대도, 나라와 언어도, 입는 옷과 먹는 음식도 모두 달랐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같았다. 가난이 허락하는 자리보다 아들이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두 어머니 모두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미래를 말로 설명하지 않았다. 자신의 두 손으로 묵묵히 미래를 만들어 갔다.


      지난 호에서 필자는 리스쿨로브 거리 공동묘지의 부모님 묘비에서 시작해, 시장의 손수레와 새벽의 기억, 그리고 한석봉 어머니 이야기를 따라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둠 속에서도 자식들의 미래를 만들어 갔던 어머니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이번 호에서도 계속된다.

      어머니는 일흔이 넘어서야 비로소 그 고된 삶의 일을 내려놓았다. 휴양소에 다니며 건강을 돌보기 시작했고, 오래전부터 옷장 속에 걸려 있던 새 옷도 꺼내 입었다. 집에 또래 할머니들을 불러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고려인 행사와 명절 모임에도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교회에도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거기서 영혼의 구원을 찾으려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주변의 아는 사람들이 하나둘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어머니도 자연스럽게 그들 곁에 섞여 들어간 것이었다.

      여든이 가까워지자 어머니는 혈압 때문에 자주 힘들어했다. 그러다 이따금 우리 모두에게 전화를 걸어 “이제 죽을 것 같다”고 말씀하곤 했다. 우리는 하던 일을 급히 접고 어머니 집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 보면 어머니는 멀쩡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조금 전까지 몸이 안 좋았는데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말하셨다. 어느새 식탁에는 음식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고, 우리는 둘러앉아 먹고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어머니는 죽음을 핑계 삼아 우리를 불러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예전에는 음식 냄새로 자식들을 불러 모았다면, 이제는 “죽겠다”는 말로 우리를 한자리에 앉히고 있었다.

      우리는 급히 달려올 때마다 그런 어머니의 ‘연극’을 보며 웃곤 했다. 하지만 그 모습에는 어딘가 아이 같은 순진함과 말로 다 할 수 없는 쓸쓸함이 함께 담겨 있었다. 어머니는 정말 죽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식탁에 다시 한 번 자식들이 모두 둘러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날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모두 전화를 돌렸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형제들이 다 와 있었다. 집 안 공기는 늘 그렇듯 익숙하고 평온했다. 병실 같은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부엌에는 음식도 준비되어 있었다. 어머니 역시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죽음이 오기 전에 어떤 신호를 보낼 거라고 생각한다. 얼굴빛이 달라지거나, 목소리가 변하거나, 방 안의 공기마저 달라질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죽음은 대개 예고 없이 찾아온다. 조용히 방 한구석에 앉아 있다가 사람들이 이제 괜찮겠구나 안심하는 순간을 기다린다.

      나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큰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시 회사로 돌아가도 되겠다고 마음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어머니는 문가에 서서 가슴에 두 팔을 모은 채 조용히 말했다.
      “가지 마라…”
      명령하는 말도 아니었고, 서운함을 드러내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울지도 않았다. 그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지 마…”
      나는 웃으며 금방 다시 오겠다고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집을 나왔다.

      그날 저녁, 어머니 곁에서 자고 가기로 한 큰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나는 어머니가 괜찮고 이미 주무시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이번에는 누나가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어머니가 떠나셨다는 소식이었다.
      잠든 사이, 아주 조용히.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은 채.

      마치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머니 방식대로 모든 것을 정리한 것만 같았다. 미리 자식들을 모두 불러 모으고, 밥을 먹이고,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바라본 뒤, 모두가 곁에 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떠날 수 있었던 것처럼.

      나는 자주 그날 문 앞의 순간으로 돌아간다. 어머니는 팔짱을 낀 채 서 있고, 조용히 말한다.
      “가지 마라…”
      나는 “금방 다시 올게요”라고 대답하고, 그대로 떠난다.

      이런 장면들은 시간이 지나도 낡지 않는다. 빛이 바래지도 않고 먼지가 쌓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세월이 흐를수록 더 선명해진다. 주변의 다른 기억들은 희미해지는데, 그런 순간들만은 끝내 남는다. 문 앞에 서 있던 어머니의 모습, 가슴 앞에 모은 두 손, 낮고 조용한 목소리, 그리고 아무 일도 아닐 거라고 믿었던 나의 어리석은 안심….

      사람마다 마음속에서 끝내 지워지지 않는 말 한마디가 있다. 마치 끝내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자꾸만 다시 떠올리게 되는 말이다.

      내게 그 말은 바로 “가지 마라”였다.
      어머니가 떠난 뒤, 집은 달라졌다. 하지만 집이 곧바로 텅 비어 버리는 것은 아니다. 물건들은 한동안 여전히 어머니의 자리를 기억하고 있다. 부엌에는 병들이 그대로 놓여 있고, 장롱 안에는 어머니의 손수건이 남아 있다. 선반에는 약이 놓여 있고, 어디엔가 ‘혹시 모를 일’을 위해 숨겨 둔 돈도 있다. 어머니들에게는 늘 그런 ‘혹시 모를 일’이 있기 마련이다. 침대는 아직도 몸의 흔적을 기억하고 있고, 컵은 마지막으로 놓아둔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진짜 공허함은 그보다 훨씬 나중에 찾아온다.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려고 무심코 전화를 걸고 싶어질 때. 누군가의 말투에서 어머니의 억양이 들릴 때. 가족들이 한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도 있고 웃음도 있는데, 정작 어머니만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어머니가 없는 뒤에도 가족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모든 것은 이전과 달라진다. 마치 해체된 뒤의 나라처럼. 사람도 같고, 언어도 같고, 익숙한 생활도 그대로인데, 가장 중요한 무언가만 조용히 사라져 버린 것처럼 말이다…

      가끔 낯선 사람들이 묘 앞에 다가와 묻곤 한다.
      “이거 중국 글자인가요?”
      그러면 나는 대답한다.
      “한국 글자입니다.”
      물론 나 자신도 그것이 그렇게 단순한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오래전 동아시아 문화 속에서 건너온 한자(漢字)의 형태이자 오래된 문자다. 이제 그 글자는 리스쿨로브 거리 공동묘지 한편에서 소비에트식 양철 묘비와 정교회의 나무 십자가들, 중국산 플라스틱 조화들 사이에 서 있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 정도 설명이면 충분하다는 듯이.

      하지만 내게는 그렇지 않다.

      내게 그 글자들은 아주 긴 길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잃어버린 한국에 대한 기억이다. 모든 과거를 대신해 주겠다고 했던 소련에 대한 기억이다. 시장에서 반찬을 팔며 가족을 지켜냈던 고려인 어머니들의 삶에 대한 기억이다.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했지만, 사실은 이미 어머니들의 노동과 삶을 등에 지고 살아가고 있었던 아이들에 대한 기억이다.

      그리고 늦은 나이에야 배우게 되었지만, 결국 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해하게 해준 언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가끔 서울에서 만났던 그 나이 든 선생님을 떠올린다. 아마 그는 오래전에 외국인 학생들을 모두 잊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어느 날 한석봉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나는 그 이야기 속에서 내 어머니를 보았다.

      기억은 그렇게 전해진다. 교과서처럼 곧고 분명한 방식이 아니다. 기억은 이상한 길을 따라 흘러간다. 강의실을 지나고, 낯선 옛이야기를 지나고, 꺼진 등잔불과 떡을 써는 칼을 지나고, 당근을 썰던 칼과 공동묘지의 붉은 화강암 비석들 사이를 지나 우리에게 닿는다.
      한석봉의 어머니는 이름조차 남지 않았다. 하지만 내 어머니에게는 이름이 있었다. 허가이 올가.

      그러나 또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이름 없이 살아갔을까. 공식적인 역사 속에는 남지 않았지만, 가족과 삶을 지탱하며 시대를 건너온 사람들 말이다.

      어머니는 어려운 말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 숙제를 봐주지도 않았고, 잠들기 전 책을 읽어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정말 놀라운 일을 해냈다. 노동과 규율, 음식과 가족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사랑을 통해 문화를 전해온 것이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고려인답게 살아야 한다”고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 어머니들이 늘 해오던 방식대로 음식을 만들었고, 우리 어머니들처럼 일했고, 우리 어머니들처럼 참고 견뎠다. 그리고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머니에게 교육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손수레가 책으로 바뀔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었다.

      그것이 어머니의 믿음이었다. 종교적인 믿음도, 이념도, 책 속의 지식도 아니었다.

      자식은 어머니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강의를 하다 보면 가끔 내가 어머니의 말투를 따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똑같은 말이 아니라 그 억양이다. 단호하지만 차분하고, 쓸데없는 변명을 허락하지 않는 목소리.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에 “이제 더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을 볼 때면, 문득 등잔불을 꺼 버리고 싶어진다.

      아마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어둠이 한 번쯤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떡을 반듯하게 썰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어둠 말이다.

      세월은 흘렀다. 리스쿨로브 거리 공동묘지도 많이 달라졌다. 새로운 무덤들이 생겨났고, 새로운 울타리와 새로운 이름들이 자리 잡았다. 어떤 곳은 콘크리트가 갈라졌고, 어떤 곳은 사진이 바랬으며, 어떤 대리석은 아직도 빛을 잃지 않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이곳을 찾아온다. 울고, 꽃을 고쳐 놓고, 사탕을 두고 가고, 기도를 드리고, 때로는 말없이 서 있다.

      나 역시 두 개의 한자 비석 앞을 찾는다. 비가 내린 뒤에는 화강암 색이 짙어지는데, 그럴 때면 마치 먹으로 방금 써 내려간 글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차가운 비석 표면을 손으로 천천히 쓸어 본다.

      돌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원래 돌은 대답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저 묵묵히 형태를 지키고 서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손주를 보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할머니가 되어 거대한 나라의 몰락과 가난, 시장과 질병, 그리고 1990년대를 모두 견뎌 낸 어머니를 떠올린다. 겨우 평온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때 어머니에게 남아 있던 시간은 너무 짧았다.

      나는 우리가 언제나 감사의 말을 너무 늦게 전한다는 생각을 한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해도 결국은 늦고 만다. 진짜 감사는 어쩌면 바로 그때 전했어야 했다. 새벽마다 채소를 썰던 순간에. 저녁마다 돈을 세던 순간에. 추운 시장에서 서 있던 순간에. 손끝이 베인 채 집안일을 하던 순간에. 그리고 문 앞에서 어머니가 “가지 마라…”라고 말했을 때.

      하지만 어쩌면 감사는 늦었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단지 다른 모습으로 남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되고, 비석이 되고, 강의가 되고, 우리가 자식들을 대하는 방식이 된다. 그리고 언젠가는 손수레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는 마음이 된다.

      가끔 니콜스키 시장으로 향하던 새벽길을 떠올린다. 텅 빈 거리와 무거운 손수레, 반찬 냄새, 그리고 어린 시절의 부끄러움까지도. 그런데 이제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 길과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이 사실은 같은 길이었다는 생각이다. 그때의 나는 어머니의 반찬을 시장으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어머니의 기억을 다시 삶 속으로 옮기고 있다. 그때는 내가 가난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나는 사랑 속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는 것을. 어쩌면 우리 모두는 사랑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닫게 될 뿐이다.

      밤이 되면 내 기억 속에서 다시 등잔불이 꺼진다. 어둠 속에서는 한석봉의 어머니가 조용히 떡을 썰고 있다. 그 곁에서는 우리 어머니가 채소를 썰고 있다. 두 사람의 칼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반듯하게 이어진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서로를 소개할 필요도 없다.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처럼 보인다.

      한 사람은 옛 개성의 가난한 조선 여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소비에트 시대와 혼란스러웠던 포스트소비에트 시절을 살아낸 고려인 여성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수백 년의 시간이 놓여 있지만, 어둠 속에서는 시간조차 의미를 잃는다.

      그리고 다시 불이 켜지면 알게 된다. 떡은 반듯하게 썰려 있고, 반찬은 다 준비되어 있으며, 아이들은 어느새 자라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다만 아들이 남긴 글만은 아직도 반듯하지 못하다. 그 안에는 너무 늦은 후회와 늦게 찾아온 다정함, 그리고 끝내 제때 하지 못했던 말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어쩌면 어머니는 그런 것마저 이미 용서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들은 자식들이 끝내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일들까지도 먼저 품어 주곤 하니까.

      나는 두 개의 비석 앞에 서서 생각한다. 어머니는 조용히 떠났지만, 아직도 우리 목소리 속에 남아 있다는 것을. 우리의 얼굴과 습관 속에, 쉽게 포기하지 않는 고집 속에, 배우고 일하며 끝까지 버텨 내려는 마음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을.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열네 해 늦게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두 분의 비석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지금도 길가 어디쯤 함께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부르지도 않고, 재촉하지도 않고, 원망하지도 않은 채.

      아버지는 이제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처럼 조용히 침묵하고 있고, 어머니는 내가 또 너무 일찍 떠나려는 사람처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묘지 위로 바람이 분다. 바람은 마른 풀잎을 흔들고, 조화를 스치고 지나가며, 길 건너 자동차 소리까지 함께 실어 온다. 바로 곁에서는 삶이 아무렇지 않게, 때로는 거칠고도 담담하게 계속되고 있다. 누군가는 바쁘게 서둘러 가고,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전화로 언성을 높인다. 누군가는 빵을 사고, 누군가는 시장으로 물건을 나르고, 누군가는 외국어 단어를 외우고 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 어머니에게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금방 다녀올게요.”
      그 말이 평생 마음속에 남게 될지도 모른 채.
      나는 조용히 서서 생각한다.

      어머니들은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고. 그저 어느 날 등잔불처럼 조용히 꺼질 뿐이라고.

      그리고 우리는 그 어둠 속에 들어서고 나서야 비로소 가장 중요한 것들을 보기 시작한다는 것을.

      김게르만 교수,
      알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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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잔불이 꺼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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