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 구전 서사시를 모티브 삼아 제정한 새로운 ‘연인의 날’…
카자흐스탄에서 매년 2월 14일은 전세계 많은 나라들과 다를 바 없이 연인들이 서로 사랑의 메시지를 주고 받는 ‘발렌타인 데이(Valentine's Day)’로 기념되고 있다. 러시아어로는 ‘젠 스뱌또바 발렌찌나(День Святого Валентина, 성 발렌틴의 날)’로 불리는 이날, 카자흐스탄을 포함한 구소련권에서는 선물과 함께 하트 형상의 작은 카드에 애정의 메시지를 담아 사랑하는 이에게 전달하는 것이 관례로 자리 잡았다. 또한 ‘여성이 남성에게 사랑의 표시로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로 인식이 굳어진 한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카자흐스탄에서는 발렌타인 데이가 서양 문화권에서 처음 탄생했을 때부터 가졌던 본연의 의미 그대로 남녀 구분 없이 자유롭게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는 날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문화, 그리고 종교의 다양성이 존중되는 카자흐스탄 사회이기에 이처럼 발렌타인 데이는 오늘날 많은 이들에 의해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기념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날이 서구 문화, 특히 카톨릭에서 유래된 풍습이라는 점과 ‘자본주의적 상술’이 짙게 녹아들어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하며 관련 풍속을 탐탁지 않아 하는 시선들 또한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특히 근래 들어 카자흐 민족 고유의 문화를 현대화하고 이러한 프로세스에 젊은 세대의 대대적 참여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정부의 이니셔티브가 가속화됨에 따라 ‘오늘날 젊은이들이 향유하는 문화생활 속에서도 외국 풍습의 무분별한 도입 및 모방을 지양하고, 대신 우리 정서에 맞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자’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기존의 발렌타인 데이를 대체하자는 취지로 기획되어 지난 2011년 처음 선보이게 된 날이 바로 ‘울틱 가쉭타르 쿠느 (Ұлттық ғашықтар күні – 국가 연인의 날)’다.
지난 2011년 1월 알마티 시청 산하 청소년 문화 정책 관리부 측은 신년 계획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당해부터 향후 매년 4월 15일을 ‘국가 연인의 날’로 기념할 것임을 공포한 바 있다. 그와 함께 당국은 전국 각 학교들에 기존에 진행하던 발렌타인 데이 기념 교내 행사들을 새로운 기념일로 옮겨 시행할 것을 권장하는 내용의 공문을 발송하기도 했다. 새로운 ‘연인의 날’ 제정을 추진한 이들은 “추운 겨울보다는 만물이 소성하는 탄생의 계절인 봄중으로 본 기념일을 제정한 것도 물론 지당한 이치이지만, 무엇보다 기존 발렌타인 데이에서 단순히 기념 날짜만을 옮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기념일 자체의 성격을 바꾸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강조한다. 특히 새롭게 만든 ‘국가 연인의 날’이 카자흐 민족의 대표적인 사랑 이야기를 담은 서사시인 <코즈 코르페쉬와 바얀 술루(Козы Корпеш — Баян сулу)>의 주인공 남녀를 주요 소재로 설정한 기념일인 만큼,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최우선 가치로 내걸고 이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는 날로서 대중의 인식에 각인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국가 연인의 날’이 각 지자체들의 주도 하에 발렌타인 데이를 대체할 ‘사랑 축일’로 선포된 지도 어느덧 14년이 흘렀다. 냉정히 평가해 그동안 정부가 쏟아온 노력에 비해 아직까지는 이 날에 대한 카자흐스탄 국민들의 인식도는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일반 대중은 물론, 공무원들 사이에서조차 ‘그런 날이 있는 줄 이번에 처음 알았다’고 말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일 정도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실태의 개선을 위해 젊은층을 대상으로 온·오프라인에서 다양한 행사 및 이벤트를 마련하는 등 인식 고취를 위해 적극적으로 홍보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입장이다. 각 지자체들은 시내 번화가 및 대학가 등에서는 젊은 남녀 커플을 대상으로 사랑시 낭독 및 사랑가 가창 대회, 커플 춤 경연 대회 등을 개최하고 중고등 과정의 일반학교들에서는 ‘코즈 코르페쉬와 바얀 술루’ 이야기를 중심으로 시 창작 대회와 벽보 포스터 만들기 대회 등을 정기적으로 진행한다.
새로운 ‘연인의 날’ 모티브는 13세기 무렵부터
카자흐 대중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러브스토리
‘울틱 가쉭타르 쿠느(국가 연인의 날)’의 모티브로 쓰인 서사시 <코즈 코르페쉬와 바얀 술루>는 제목에 나와 있는 그대로 ‘코즈 코르페쉬(Козы-Корпеш)’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과 ‘바얀 술루(Баян-Сулу)’라는 이름의 처녀를 주인공으로 하여 이들이 그려나가는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주내용으로 한다.
13-14세기 무렵부터 아큰(акын, 시인 및 가수)들과 쥐르쉬(Жыршы, 민담을 노래 형식으로 구술하는 가수)들을 중심으로 구전 서사시 형태로 전승되어 오다 19세기 중반 들어서야 비로소 글로 기록된 <코즈 코르페쉬와 바얀 술루>는 다음과 같은 줄거리를 품고 있다(다만 오랜 세월 동안 일절 문자로 기록되지 않고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어 온 구전서사의 특성상 이 이야기에는 세부 내용이나 결말이 각기 다른 버전이 다수 존재하며, 카자흐인들 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투르크족 사이에서도 널리 퍼져 계승되어 온 소재임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죽마고우 사이인 ‘사릐바이(Сарыбай)’와 ‘카라바이(Қарабай)’는 총각시절부터 일찌감치 먼 훗날 각자의 자식이 태어나면 그 둘을 혼인 시키기로 굳게 약속한다. 그러나 사릐바이는 자신의 아들이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사냥터에서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만다. 세월이 흘러 어엿한 청년이 된 사릐바이의 아들 ‘코즈 코르페쉬’는 우연히 자신에게 정혼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정혼 상대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한 그는 초원의 이곳저곳을 모험하다 드디어 운명의 짝 ‘바얀 술루’를 만나게 되고, 둘은 이내 깊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바얀 술루의 아버지 카라바이는 작고한 친구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언젠가 자신이 키우던 가축들을 떼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준 이름난 장사(壯士) ‘코다르’에게 그녀를 시집 보내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얄궂은 운명의 장난으로 형성된 삼각관계 속에서 세 사람 사이의 갈등은 시간이 흐를수록 고조되고, 급기야 질투심에 눈이 먼 코다르는 코즈 코르페쉬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하루 아침에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바얀 술루는 복수를 위해 본심을 숨기고 마치 코다르에게로 마음을 돌린 듯 행동하며 그에게 자신을 위해 맑은 샘물이 솟아나는 우물을 손수 파내어 선물하면 그의 청혼을 승낙하겠노라고 말한다.
기쁜 마음으로 우물 파기에 돌입한 코다르는 곁에서 바얀 술루가 밧줄삼아 내어준 그녀의 길게 땋아 내린 머리카락에 의지한 채로 점점 더 깊이 땅을 파내려 간다. 이윽고 코다르가 자력으로 올라올 수 없을 정도의 깊이까지 내려가자, 바얀 술루는 별안간 품 속에 숨겨둔 단검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린다. 그렇게 코즈 코르페쉬의 원수는 깊은 우물 구덩이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바얀 술르 또한 자신이 깊이 사랑했던 연인의 무덤 앞에서 단검으로 스스로를 찔러 생을 마감한다.
이처럼 가슴 시리도록 슬프고도 아름다운 옛 카자흐 연인의 사랑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카자흐스탄의 많은 문학 및 음악 작품들에서 빈번히 다루어져 왔으며,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연극·뮤지컬·발레, 나아가 영화·애니메이션·만화 등의 형태로 꾸준히 재탄생되고 있을 정도로 카자흐인들 사이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저명한 카자흐 극작가 가비트 무스레포프(Ғабит Мүсірепов)는 이 서사시를 토대로 현재까지도 수 많은 무대들에 올려지고 있는 연극 <코즈 코르페쉬 – 바얀 술루(Қозы көрпеш – Баян сұлу)>의 시나리오를 써냈으며, 1954년 촬영된 동일한 소재의 영화 ‘포에마 오 류비(Поэма о любви, 사랑에 관한 시)’는 오늘날까지 카자흐스탄 영화사에서 손꼽히는 고전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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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카자흐스탄 주 아야고즈 지구에 위치한 ‘코지 코르페쉬와 바얀 술루’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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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의 한 제과업체가 ‘코즈 코르페쉬와 바얀 술루’를 캐릭터화하여 출시한 초콜릿 제품. 제조사명 또한 여주인공의 이름인 ‘BAYAN SULU’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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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처음으로 영화화된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영상물로 제작된 바 있는 ‘코즈 코르페쉬와 바얀 술루’ . 사진은 지난 2017년 제작된 드라마 버전의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