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 서울올림픽 이전까지 한국은 소련 사람들에게 ‘나라’라기보다 지도 위에 적힌 이름에 가까웠다. 소련 사람들은 한국이 중국 너머 어딘가 그리고 좀처럼 들춰지지 않는 철의 장막 저편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당시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거나 불편한 질문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올림픽을 1년 앞둔 어느 날, 그 장막이 갑자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활짝 열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호기심 많은 연구자의 코끝이 슬쩍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아주 조금 올렸을 뿐이었다.
그 무렵 나는 아직 본격적인 한국학자는 아니었지만, 이미 한국을 주제로 졸업논문을 쓴 상태였다.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윗선’으로부터 미지의 땅과도 같았던 한국을 소개하는 소책자를 집필해 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원고가 모스크바의 승인을 받아 출판된다면 1988년 서울올림픽 대표단에 합류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암시도 함께였다. 원고는 무사히 통과됐고, 소책자는 ‘업무용’이라는 제한 배포 문구를 달고 인쇄됐다. 대표단은 서울로 떠났다. 소책자도 함께 떠났다. 하지만 정작 나는 집에 남겨졌다.
그러나 결국 나도 한국 땅을 밟게 됐다. 다만 관광객도, 올림픽 대표단의 일원도 아니었다. 잊고 지냈던 모국어를 배우기 위한 장학금을 받은 늦깎이 유학생의 신분이었다. 한국 땅에 발을 디딘 순간,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느꼈다. 그 감정은 묘했고 조금은 서운하기도 했다. 아프리카 같은 낯선 나라에 온 것도 아니고, 조상들의 고향이자 ‘내 편’이 있을 것이라 믿었던 곳에 왔기 때문이다.
반면 독일에서는 모든 것이 훨씬 단순했다. 나는 대학에서 6 년 동안 독일어를 공부했고, 당시 동독 곳곳을 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언어도 거의 제 2의 모국어처럼 익숙해졌고, 사람들이 나를 외국인으로 여긴다고 해서 특별히 신경 쓸 일도 없었다. 그런데 한국은 달랐다. 겉모습만 보면 나는 첫 관문을 무난히 통과한 듯했다. 한국식 성 (姓), 누런 피부, 검은 머리카락, 동양인의 얼굴. 하지만 내 안에는 알렉산드르 지노비예프(Александр Зиновьев)가 말한 ‘호모 소비에티쿠스(Homo Sovieticus)’, 즉 전형적인 소련 사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학 졸업장을 가진 사람, 빵과 성냥을 사기 위해 줄을 서던 기억을 가진 사람, 알루미늄 숟가락을 문화적 유산처럼 간직한 사람, 세상을 역사적 유물론으로 설명하려 했던 사람, 그리고 필요하다면 러시아 욕설로도 세상을 이해할 수 있었던 사람이 바로 나였다.
미국 문화에 익숙해진 재미교포들을 가리켜 흔히 ‘바나나’라고 부른다. 겉은 노랗지만 속은 하얗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훨씬 복잡한 과일∙이념 혼합형 인간에 속했다. 만약 내 속의 색깔을 하나 고르라면 아마도 빨간색이었을 것이다.
당시 한국 사람들은 소련 출신 고려인들을 ‘пальгяин’-‘빨갱이’라고 부르곤 했다. 공산주의자, 북쪽에서 온 사람들. 그들의 상상 속에서 우리는 모두 털외투를 입고 모자를 눌러쓴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모자가 내가 ‘한국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벌인 첫 번째 시도의 실패 원인이 됐다.
서울에 도착한 다음 날, 나는 의기양양하게 대학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지나가는 행인을 흘끗 보는 정도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의아한 눈길로, 어떤 사람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또 어떤 사람은 뜻밖에 공짜 코미디를 선물받은 사람처럼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속으로는 적잖이 당황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지? 나도 한국 사람처럼 생겼는데…”
적어도 거의 똑같이 생겼다고...
문제는 바로 그 ‘거의’에 있었다.
내 머리 위에는 토끼털 귀마개 모자가 얹혀 있었고, 그것은 3월의 서울 거리에서 마치 한밤중에 타오르는 횃불처럼 유난히 눈에 띄고 있었다. 사람들은 개미 떼처럼 바쁘게 오가며 서로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았지만, 군중 속에서 단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귀마개 달린 털모자를 쓴 남자.
바로 나였다.
소련의 겨울이 보낸 살아 있는 인사장 같은 존재…
결국 나는 모자를 쓰레기통에 힘껏 던져 넣었다. 그리고 맨머리로 다시 길을 걸었다. 그러자 신기할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서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랬다.
‘내 편인가, 남인가’를 가르는 두 번째 시험은 젓가락이었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 나는 젓가락을 한번도 써 본 적이 없었다. 당시 서울에서는 값비싼 식당에 가도 포크가 식탁 위에 놓여 있지 않았다. 포크는 마치 비상사태에만 지급되는 비밀 병기처럼, 손님이 특별히 요청해야만 모습을 드러냈다.
게다가 한국 젓가락은 금속으로 만들어졌고 납작하며 미끄러웠다. 그것은 음식을 먹기 위한 도구라기보다 민족적 정체성을 시험하기 위한 장치처럼 느껴졌다.
젓가락을 집으면 손에서 미끄러졌고, 반찬 한 점을 집으려 하면 양쪽으로 벌어졌다. 가끔은 젓가락을 거꾸로 쥔 채 식사를 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젓가락끼리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것만 같았다.
“또 한 명 걸렸군. 겉모습은 우리와 비슷한데 말이야.”
식사 시간마다 나는 작은 지진이라도 일으키는 사람처럼 소란을 피웠다. 젓가락은 식탁과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고, 놋그릇과 사기그릇은 마치 동정이라도 하듯 맑은 울림으로 화답했다. 나만의 착각이었겠지만, 그때마다 식당 안 모든 사람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나를 보고 있던 사람은 같은 식탁에 앉은 몇 명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의 그들은 마치 ‘젓가락 사용 능력 심사 국제재판소’의 심사위원들처럼 보였다.
결국 나는 기숙사에서 특별훈련에 돌입했다.
식당에서 가져온 젓가락으로 눈에 띄는 것은 무엇이든 집어 옮겼다. 처음에는 큰 물건부터 시작했고, 다음에는 작은 물건, 그다음에는 접시에서 접시로 쌀알을 옮기는 단계까지 나아갔다. 음식 먹는 연습이라기보다 ‘젓가락 조작 역학’ 분야의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는 기분이었다.
일주일쯤 지나자 음식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횟수보다 입 안으로 들어가는 횟수가 더 많아졌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나자 내 젓가락질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내 민족적 뿌리를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 게르만 교수
본 이미지는 저자의 지시에 따라 ChatGPT 생성형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