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선조들에 대한 이야기는 왜 자손들에게 필요한 것일까?
시간이 흘러 세기가 바뀌고, 나라의 체제도 달라진다. 때로는 한 세대에게 소중했던 것들이 다음 세대에게는 아무런 관심거리도 되지 못하는 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조용히 머릿속 한켠에 자리한 조상들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 우리 삶의 길잡이가 되기도 한다.
류드밀라는 이렇게 말문을 연다.
- 강 블라디미르 콘스탄티노비치 (Кан Владимир Константинович)는 우리 어머니의 아버지입니다. 그에 대해 제가 아는 것은 모두 그의 아내, 즉 제 할머니인 차 리디야 알렉산드로브나 (Цха Лид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의 이야기를 통해 전해들은 것입니다.
비범한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본사 기자는 그의 아들인 강 빅토르 블라디미로비치 (Кан Виктор Владимирович)와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블라디미르 콘스탄티노비치는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태어나 강제이주로 북카자흐스탄으로 옮겨졌다.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16세에 불과했다. 그는 조국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코미 공화국의 벌목소에 자원하여 ‘노동군’ (Трудовая армия)에 합류했다. 아직 어린 소년이었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밤낮없이 일하는 것은 그 당시 누구에게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카자흐스탄으로 돌아와 시골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반려자인 리디야와 처음 만나게 된다.
1947년12월14일, 두 사람은 결혼했다. 당시 결혼식에 대해 리디야는 이렇게 회상했다. “전쟁 직후라 아무도 가진 것이 없었어요. 누군가는 밀가루를, 누군가는 우유를 가져왔죠. 저는 금속 빗과 손수건을 선물로 받았어요. 썰매를 타고 마을 전체를 돌아다녔죠. 그게 우리 결혼식이었어요!”
부부는 슬하에 네 자녀를 두었다. 이름은 류드밀라, 빅토르, 나제즈다 그리고 비탈리였다.
- 아버지는 보그다노프카 마을에서 교사로 근무하셨고, 나중에는 학교장으로 일하셨습니다. – 장남 강 빅토르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 몇 차례 자격 연수를 받은 후에는 악콜 시 당위위원회로 발령받아 지역 당위원회 지도강사로 일하셨고, 이후에는 ‘마킨스키’ 국영농장의 소장으로 임명되어 보즈네센카 마을로 옮기셨죠. 당시 이 마을은 지역 중심지였습니다.
보즈네센카는 다양한 민족이 어우러져 사는 큰 마을이었다.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독일인, 캅카스 지역 소수민족들이 함께 살아가며 서로 다른 생활방식과 전통, 관습이 공존했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과의 교류는 아이들에게 세상을 넓게 바라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늘 일에 매달려 있었다.
그의 지도 아래 마을에는 새로운 중학교와 병원이 세워졌고, 신축 목장과 벽돌 공장, 식용유 공장 등이 들어섰다. 국영농장 노동자들을 위한 주택도 지어졌고 마을 도로도 새롭게 정비되었다.
그 시절에는 대학생들도 농촌 마을 개선 사업에 적극 참여했다. 여름 방학 동안 자발적으로 참여한 학생들은 건설현장에 배치되었고, 숙소와 식사, 근로자 임금을 지원받으며 마을 발전에 힘을 보탰다. 그들은 단순히 일만 한 것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을 위한 문화행사도 주도했다. 콘서트를 열고 자신의 전공과 미래 직업에 대해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하며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국영농장 근로자의 아이들은 대도시로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견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은 모든 농장에서 이뤄지던 일은 아니었지만, ‘마킨스키’ 국영농장에서는 특별히 모스크바국립대학교 (MGU) 학생들로 구성된 우수한 건설 봉사단이 파견될 정도로 활발했다.
- 그때 학생들이 부모님을 모스크바로 초청해서 볼쇼이 극장 티켓까지 선물했어요. 그만큼 아버지를 존경했죠. – 장남 강 빅토르는 회상한다. – 우리 집에는 하나의 암묵적인 원칙이 있었습니다. 인생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것. 부모에게 의존하지 말고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네 자녀 모두 대학 입학을 스스로 준비해 합격했고, 어떤 ‘빽”이나 청탁도 없었다. 강 빅토르는 첼리노그라드 시에서 기술학교와 대학을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 후 자동차 정비공장 기술자로 일하다가 이후 물류 분야로 전임했다.
소련 시절, 당의 허가 없이는 어떤 무역 활동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건설 작업이 지연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 번은 건설에 시멘트가 절실히 필요했던 상황에서, 블라디미르 콘스탄티노비치는 다른 국영농장 대표와 협의해 곡물 한 차량 분량을 시멘트 한 차량 분량으로 교환하기로 했가.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단순한 물물교환에 불과했지만, 국영농장 내 당책임자가 ‘아첨하기 위해’ 이를 당에 고발하였다.
그 결과, 강 블라디미르는 당원 자격을 박탈당하고 해고됐다. 이에 그는 당시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였던 코나예프 딘무하메드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자신의 결정이 전략적으로 불가피했음을 설명했다. 결국 그는 복권되어 다른 국영농장의 관리 책임자로 재임명되었다.
그러나 지속적인 업무 과중과 극심한 스트레스는 그의 건강을 크게 해쳤고 1980년, 블라디미르 콘스탄티노비치는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 이제는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시고 나니, 두 분의 특별하고 헌신적인 삶에 대해 더 많이 묻지 못하고, 더 깊이 알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합니다. – 아들 빅토르 블라디미로비치는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힘의 원천은 결국 가정에서 물려받은 가치관이라는 것을요. 조국에 헌신하고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가족을 보살피는 마음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마킨스키’ 국영농장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흩어졌고 집들은 낡아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다만, 아이들과 손주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기억과 가족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훗날 그들에게 삶의 버팀목이 되어줄 테니까요…
참고:
강 블라디미르 콘스탄티노비치는 소련에서 레닌 훈장 다음으로 권위 있는 ‘10월 혁명 훈장’을 수훈했으며, 1967년에는 ‘노동적기 훈장’을 받았다. 또한 처녀지 개간 훈장, 레닌 탄생 100주년 기념 훈장 등 여러 개의 훈장을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이끌었던 ‘마킨스키’ 국영농장은 1970년대에 지역 내 우수한 농장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류드밀라 스트라콥스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