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해체 이후 카자흐스탄에 정식으로 한국의 전통 무술인 태권도를 소개하고 비(非)한국인 공인 사범으로서 현지 태권도인들을 육성하며 카자흐스탄 내에서 본격적인 태권문화 대중화의 길을 개척한 사람은 누구일까? 카자흐스탄 최초의 태권도 학교와 카자흐스탄 태권도연맹을 설립하고 카자흐스탄의 세계태권도연맹(WT) 가입을 이끌어내었으며 카자흐스탄의 첫 국가대표 태권도 선수단을 키워낸 전설적인 인물, 태권도 7단에 빛나는 무스타파 오즈투르크(1954-1995)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흥미롭게도 무스타파는 ‘재외 카자흐인’ 출신이다. 스탈린 시기 정치탄압의 희생양이 된 고려사람들이 눈물을 머금고 한반도와 맞닿은 극동 땅을 뒤로 한 채 중앙아시아 한복판에서 삶의 터전을 새로이 일구기 시작하던 바로 그 무렵, 같은 상황적 배경과 핍박 속에서 조국인 카자흐스탄 땅을 떠나 무리별로 타지를 전전하며 저마다의 보금자리를 꾸려 나간 카자흐 민족의 재외동포들. 그 중에서도 오늘날 서로를 ‘형제국가’로 부를 정도로 한국과 끈끈한 우호관계를 맺고 있기도 한 나라, 튀르키예에 정착했던 카자흐 이주민들의 후손으로 태어나 한민족의 무술인 태권도에 남다른 두각을 나타내며 근대 카자흐스탄 격투 스포츠계의 발전사에 큰 족적을 남긴 무스타파 오즈투르크. 태권도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카자흐스탄 뿐만 아니라 터키와 독일 등지에까지 태권 학교를 세우며 지구촌 곳곳에 한민족의 전통 무술을 전파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인 만큼, 그의 존재는 우리에게 유달리 낯설면서도 친숙하게 느껴진다.
안타깝게도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그가 오늘날까지 살아 있었다면 바로 지난 주 토요일 칠순을 맞이하였을 터. 본업인 태권도 사범으로서 자국 스포츠의 발전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위인으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생전 카자흐인으로서 고국의 언어와 민족문화를 소중히 하며 독립 직후의 카자흐스탄 사회 내에 애국심과 민족적 자긍심 고취를 위해 다방면에서 솔선수범으로 국민들의 귀감이 되었던 무스타파 오즈투르크의 일생을 소개한다. 아래 글은 그의 탄생 70주년을 기념하는 취지로 Kazinform에서 게재한 내용을 발췌해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무스타파 카베눌릐 앱디라흐만 오즈투르크(Мұстафа Қабенұлы Әбдірахман Өзтүрік)는 1954년 11월 23일 튀르키예의 카이세리 시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모는 소비에트 정권의 정치탄압이 극에 달했던 1930년대에 고향 카자흐 땅을 떠나 중국의 알타이지구, 인도와 파키스탄 등지를 거쳐 튀르키예 땅에 정착한 이주민이다.
어린 시절 학업과 운동에 두루 재능을 보였던 무스타파는 특히 남다른 발육 덕에 일찍부터 각종 격투 스포츠에 큰 두각을 나타냈다. 16세가 되던 해, 그는 이스탄불 소재의 학교를 졸업하고 대만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1975년부터 1980년까지 타이베이 소재 대만국립정치대학교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한 그는 바로 이 시기 한국의 전통 무술인 태권도를 접하였으며, 유학을 마칠 때까지 7급(주황띠)까지 따게 된다.
대만 유학을 마치고 무스타파는 독일 뮌헨으로 건너가 현지 군인들과 경찰 인력을 상대로 동양무술을 가르치는 트레이너로서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어느정도 경력을 쌓은 후에는 독일의 쾰른과 뮌헨, 터키의 이스탄불에 태권도 학교를 설립했다. 태권도인 육성을 향한 무스타파의 노력과 열정은 1980년대 초반 무렵부터 서서히 결실을 맺기 시작해 어느덧 그의 제자들이 하나 둘 씩 각종 국제 대회들에서 입상하는 성과로 나타났다.
1990년 무스타파는 카자흐스탄 정부로부터 정식 초청을 받아 생애 처음으로 역사적 고국인 카자흐 땅을 밟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그는 카자흐스탄에 완전히 정착해 고국의 젊은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는 사범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1991년에는 카자흐스탄 태권도연맹(KTF)을 설립한다.
한편 무스타파 오즈투르크는 태권도 관련 활동 외에도 재외 동포로서 카자흐 민족의 정체성과 전통문화 보존에 남다른 관심을 가져왔는데, 당시 한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품고 있는 민족적 정체성과 철학, 전통, 종교 등의 가치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평생을 카자흐스탄에서 살아온 우리 국민 여러분과는 달리 나와 같이 해외에서 살아가는 카자흐 동포들은 고국 땅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나 크다. 이따금 이런 생각에 잠길 때도 있다. ‘이 세상 모두가 저마다의 땅과 터전을 소유하고 살아가고 있건만, 나에게 있어 모국, 고향땅은 대체 어느 곳이란 말인가?’ 하고 말이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아가는 우리 재외 카자흐 동포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때문에 쉬이 사라져버릴 수 있는 우리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악사칼(‘흰 수염’을 의미하며, 중앙아시아 튀르크계 민족들 사이에서 씨족의 원로 지위를 가진 어른을 일컬음)’ 어르신들께서는 언어, 전통, 종교 등 우리의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우리에게 카자흐어로 말하는 법을 가르치셨다.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 동포사회의 후대 양육 및 교육방식 전반에 크나큰 영향을 미칠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악사칼 어르신들은 위대한 역사를 지닌 카자흐 민족으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그 역사에 대한 기억을 잃지 않도록 늘 우리들의 기원에 대해, 우리 민족 속 각 씨족의 뿌리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모름지기 카자흐인이라면 누구나 7대(代)에 이르는 조상 어르신들의 존함을 외우고 있어야 한다. 예컨대 카자흐 민족을 구성하는 3대 주즈(부족) 중 ‘중(中)주즈’에는 ‘나이만’ 씨족이 있으며, 그 밑으로는 ‘바이지기트’ 집단이 있다. 그리고 이를 구성하는 여러 하위집단들 중에는 ‘맘베트’라 불리는 일족이 존재한다. 바로 이러한 것들에 대해 우리들은 선대로부터 가르침을 이어받아온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르침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코 서로 편을 갈라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씨족, 부족, 소속 등을 떠나 우리 모두는 결국 하나의 카자흐 민족이니까 말이다”.
그는 또한 당시 카자흐인들이 민족 정체성을 잃은 작태에 쓴 소리를 내며 민족의 앞날에 대한 걱정스러운 심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카자흐스탄에 정착한 이후 나는 여러 번에 걸쳐 국내 여행을 하며 각지의 여러 카자흐 형제자매들과 만남을 가졌는데, 그들 중 상당수가 카자흐어를 모르고 있었다. 카자흐스탄에 처음 오게 되었을 때만 해도 나는 이곳에서 카자흐어를 더 깊이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건만, 정작 고국에 와서 확인한 실상은 우리 카자흐 토박이들 스스로가 모국어를 잊은 지 이미 오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 재외 동포들은 대체 누구에게서 카자흐어를 배울 것인가? 언어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강력한 도구 아니던가. 언어의 상실은 곧 그 국가의 종말을 의미한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만일 우리가 종교를 잃어버리고 신을 망각한다면 -이슬람의 가르침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우리의 아버지들과 어머니들께 예우를 갖추는 법 또한 상실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전통을 잊어버린다면, 결국 그 전통을 우리에게 전하여 주신 우리 선대에 대한 기억도 잃게 될 것이고 말이다. 언어, 종교 그리고 전통은 하나여야만 한다. 우리의 뒤에는 이 모든 것을 이어받아 마땅한 무결·무고한 후대가 있지 않은가.”
1992년 카자흐스탄은 세계태권도연맹(WTF)의 가입국이 되었다. 같은 해 무스타파 오즈투르크는 카자흐스탄 국적을 획득했다. 그가 육성한 제자들은 1992년 터키에서 열린 국제대회에 처음으로 출전해 2개의 금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이루어 냈다. 당시 자신이 키워낸 첫 카자흐스탄 대표 선수단을 이끌고 출전한 국제대회에서 승리를 이룩해낸 그가 벅찬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기쁨에 찬 소감을 밝히는 모습이 TV방송을 통해 카자흐스탄 전역에 중계되며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노라면 남자도 이따금씩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 조국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쳤을 때, 혹은 가족 구성원과 사별했을 때가 그런 경우이다. 나는 이러한 눈물을 카자흐스탄 대표팀을 꾸려 처음으로 출전한 국제대회에서 우리의 하늘색 국기가 장내에 펄럭이는 것을 보았을 때 또 한번 흘렸다. 그토록 많은 대회 참가국들의 깃발들 사이에 있는 우리나라 국기를 보니 주체할 수 없는 흥분과 감동이 밀려와 나도 모르게 그만 울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처럼 내 조국의 국기가 당당히 펄럭이는 것을 두 눈으로 보는 날이 온 것은 전지전능한 신의 은총 덕이라는 생각을 하며 크나큰 감동을 느꼈다”.
이러한 인터뷰들은 생전 그가 가졌던 카자흐스탄에 대한 애국심과 카자흐인으로서의 자긍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1995년 무스타파가 육성한 카자흐스탄 대표 선수단은 세계 군인 태권도 선수권 대회에서 태권도의 종주국인 대한민국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국가들을 격파해 당당히 단체전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이처럼 뛰어난 체육인이자 조국 카자흐스탄을 뜨겁게 사랑했던 무스타파 오즈투르크는 1995년 3월 15일 알마티에서 원인불명의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다. 무스타파의 누이인 페루한을 비롯한 일가친척의 뜻에 따라 그의 시신은 튀르키예 내 카자흐스탄 동포들의 밀집구역인 이스탄불 시의 규네쉴리 지역에 위치한 부친의 묘 옆에 묻혔다.
그의 아버지 압드라흐만 톨레바이울릐는 생전 튀르키예에서 살아가는 카자흐인들의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했던 인물로 알려졌다. 그와 그의 가족이 튀르키예로 이주해 온 이후, 그는 강인한 체력과 뛰어난 운동 실력으로 현지인들 사이에서 ‘튀르크 전사’라는 의미를 내포한 튀르키예 성 ‘오즈투르크’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무스타파의 외조부 카이르스바이 이술릐 또한 생전 뛰어난 격투가로서 중국 신장의 알타이지구 일대에서 그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현재 독일 쾰른에 거주하고 있는 무스타파의 죽마고우 가니 마킨 씨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친구에 대한 소중한 추억을 회상한다.
“무스타파는 재외 카자흐인들 사이에서 빛나는 별과도 같은 존재였지요. 저는 무스타파와 어린 시절부터 가까운 친구지간으로 함께 자랐습니다. 그는 태권도를, 저는 가라테를 배웠죠. 무스타파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당시 멀리 떨어져 있던 그는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부친상 이후 어느 날 저녁 우리 둘이 나누었던 대화가 아직까지도 생각납니다. 무스타파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자신이 직접 지은 시를 제게 들려주었습니다. 저는 그 가슴이 미어지는 내용의 시에 맞추어 돔브라로 연주할만한 멜로디를 작곡해 냈지요. 이후 이 노래는 카자흐인들 사이에서 <줄드스다르듸 틀례이싕베 (Жұлдыздарды тілейсің бе? - 별들에 소원을 빌고 있나요?)>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무스타파가 카자흐스탄에서 태권도 학교를 설립했을 무렵, 한 번은 그가 저에게 전화해 나도 카자흐스탄으로 와서 가라테 학교를 세울 것을 제안했습니다. 저는 당시 가정과 관련된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그럴 수 없다고 말했고, 무스타파는 그런 저에게 몹시 실망하고 골이 난 눈치였어요. 그 뒤로 반년 동안이나 저와 말을 섞지 않았을 정도로 말입니다. 이후 이슬람 명절 쿠르반 아이트(이드 알피트르)를 지내기 위해 우리 둘 모두 같은 시기에 터키를 방문하게 되었고, 그 때 함께 식사를 하며 비로소 오랜만에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죠. 결국 그 자리에서 저도 그의 뒤를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가서 가라테 학교를 열겠노라고 약속했고요. 그러고 나서 무스타파는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갔고, 저도 곧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해 카자흐스탄에 들어갈 작정이었지요. 그런데 불과 일주일 후, 알마티에서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가 날아온 겁니다. 그때의 심정은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지고 피를 토하는 듯한 비통함 그 자체였습니다. 저의 카자흐스탄행에 대한 계획도 그날로 산산조각 나버렸죠”.
짧지만 유달리 반짝이고 강렬했던, 흡사 별똥별과도 같았던 무스타파 오즈투르크의 일생은 자신의 민족, 그리고 국가에 대한 사랑과 섬김에 대한 훌륭한 귀감이 되었다. 카자흐 민족은 자신이 낳은 그 위대한 아들의 업적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그에 대한 카자흐스탄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입증하듯 지난 2000년 알마티 시에는 무스타파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겨났으며 2004년에는 그의 탄생 50주년을 맞아 알마티 주 탈가르 지역 소재 베사가쉬 촌에 기념 동상이 건립되었다. 2014년에는 아스타나와 알마티에서 카자흐스탄과 터키 소재 태권도 학교의 설립자인 그를 기리고 그의 탄생 6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거행되기도 했다. 이 밖에도 현재까지 무스타파의 일생과 업적을 다룬 다수의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제작되기도 하는 등 카자흐스탄 대중의 기억 속에서 그는 아직까지도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비록 일생은 짧았지만 그동안 조국 카자흐스탄 스포츠계의 발전에 기여한 것에 그치지 않고 터키, 독일 등지에서도 후배 양성에 힘썼으며 한국의 태권도가 중앙아시아에 널리 보급되는 데 큰 역할을 하며 카자흐스탄과 한국 간 스포츠문화 교류에 물꼬가 트이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무스타파 오즈투르크에 대한 기억은 카자흐스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지구촌 곳곳에서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기억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원글: 아이굴 에세날리예바 / Kazinfor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