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병원은 김 나탈리야에게 두려움의 공간이 아니었다. 간염으로 자주 입원해야 했던 어린 시절, 그녀의 눈에 비친 의사는 ‘마술사’와도 같은 존재였다. 매일 아침 회진을 돌며 환자들을 따뜻하게 돌보던 의사들, 그리고 며칠 뒤 건강을 되찾고 웃으며 퇴원하던 아이들의 모습은 어린 소녀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때부터 그녀의 꿈은 분명해졌다. 장래 희망을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아버지는 딸이 변호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나탈리야는 자신의 선택을 바꾸지 않았다.
이미 학생 시절부터 그녀는 목표를 향해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다. 9학년 (한국의 중3) 때부터 방학이면 고모가 근무하던 알마티 시 중앙 수혈소에서 위생원으로 일하며 병원의 환경에 익숙해졌다. 자연스럽게 생물학과 화학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관련 과목 동아리 활동과 올림피아드에도 적극 참여해 여러 차례 수상하기도 했다.
1989년, 그녀는 아스펜디야로프 국립의과대학교에 입학했다. 처음에는 외과를 희망했지만 키가 작아 수술대 높이에 맞추기 어렵다는 이유로 진로를 바꾸게 됐다. 그러나 첫 실습에서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갓 태어난 아기의 첫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 이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이후 김 나탈리야 뱌체슬라보브나는(Ким Наталья Вячеславовна) 제5 산부인과 병원에서 의료 경력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나탈리야는 조산과 난산 등 다양한 상황을 겪으며 산모 곁을 지켰다. 밤을 새우며 긴장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날들이 많았고, 장시간 서서 일하는 환경은 몸에도 부담을 주었다. 결국 건강상의 이유로 그녀는 산부인과 상담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하지만 새로운 자리에서도 나탈리야의 사명감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나탈리야 의사는 산부인과 의사로서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를 ‘생명을 지키는 일’로 보고 있다. 특히 낙태를 고민하는 여성들을 설득하는 일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미 아이가 셋이라 부담이 된다거나 아들을 원했는데 딸일까 걱정된다는 이유, 또는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낙태를 고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어머니의 건강 문제나 불가피한 상황도 있습니다. 하지만 설득을 통해 아이를 낳기로 결정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나탈리야는 이렇게 태어난 아이들이 지금 알마티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직업에 대한 깊은 보람과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한편 나탈리야는 아들이 자신의 길을 따르길 바랐던 적도 있었다. 병원을 직접 보여주며 의사의 삶을 체험하게 했지만 아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현재 그는 건축 분야에서 기술 감독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김나탈리야 의사는 약 3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산부인과 상담원으로 근무하며 수많은 환자들과 함께했다. 이후 민간 의료기관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코나예프(옛 캅차가이 시)와 투르케스탄 지역에 새로운 산부인과 상담소를 개설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 초기 운영이 안정될 수 있도록 현장에서 직접 일하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는 여러 차례 근무지를 옮겼지만 선택한 직업에 대한 책임감과 헌신은 변함이 없었다.
2008년에는 알마티 투르크시브 구에서 ‘우수 산부인과 의사’로 선정됐으며, 시 보건국과 관련 기관으로부터 받은 표창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또한 제19 종합병원 산부인과 과장으로 약 5년간 근무하며 후배 의사 양성과 의료 서비스 향상에도 기여했다.
밝고 낙천적인 성격의 김 나탈리야 의사는 한때 아마추어 예술 활동에도 참여했다. 명절 공연에 자주 출연했으며, 풍자적인 시를 지어 주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기도 했다. 새해 잔치에는 ‘산타 할아버지’ 역할을 맡아 분위기를 이끌기도 했다.
현재 김 나탈리야는 ‘아르히메도스 메디쿠스’ 병원에서 산부인과 의사로 근무하며 여전히 환자들과 함께하고 있다.
어린 시절 병실에서 시작된 꿈은 수십 년의 시간 속에서 수많은 생명을 지켜온 현실이 됐다. 그리고 그 길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남경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