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극창작센터 공간개방축제 ‘장면출고’에서 선보인 실험적 공연… 허지행 연출, 카자흐스탄 현지 조사와 고려인 여러 세대의 증언을 바탕으로 ‘미완의 도착’ 탐구
지난 10월 3일 서울연극창작센터에서 열린 공간개방축제 ‘장면출고’의 일환으로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역사와 현재를 다룬 연극 ‘반도착’이 선보였다. 허지행이 연출한 이번 작품은 카자흐스탄 출신 고려인 3세의 삶에서 출발해 이주와 정착, 정체성과 소속의 의미를 탐구하는 실험적 공연이다.서울연극창작센터 공간개방축제 ‘장면출고’는 기존 극장 공간의 경계를 넘어 다양한 장소를 무대로 활용하며 새로운 공연 형식을 실험하는 행사다. 이번 축제의 ‘오픈랩 씨어터’ 창작준비트랙 선정작인 ‘반도착’은 10월 3일 오후 1시와 3시 30분, 서울연극창작센터 3층 야외마당에서 관객들과 만났다.
‘반도착’은 “돌아왔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라는 문장에서 출발한다. 작품은 강제이주로 시작된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배경으로, 역사적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완전히 도착하지 못한 사람들의 경험을 다룬다.
작품의 핵심 질문은 “한 사람이 어떤 장소에 ‘도착했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언제일까?”이다. 언어와 제도, 일상의 여러 순간 속에서 이주민들이 다시 경계인이 되는 현실에 주목하며, 현재 한국에 체류 중인 고려인 3세의 삶과 증언을 바탕으로 ‘미완의 도착’이 지닌 시간과 감각을 탐색한다.
이번 작품의 중심에는 카자흐스탄 출신 고려인 3세 신나데즈다(Shin Nadezhda)의 삶과 경험이 있다. 허지행 연출은 신나데즈다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출발점으로 작품을 구상했으며, 창작 과정에서 그녀의 지인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에서는 신나데즈다와 처음 알게 된 계기, 그녀에 대한 기억과 인상 등을 묻고, 신나데즈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직접 녹음하거나 촬영하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 사람의 삶을 본인의 증언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기억과 관계 속에서 다각도로 살펴보고자 했다.
또한 허지행 연출은 작품 준비 과정에서 직접 카자흐스탄을 방문해 현지 고려인 공동체를 만났다. 고려인 2세부터 4세까지 서로 다른 세대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강제이주 이후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고려인들의 역사적 경험과 세대를 거쳐 이어지는 기억, 그리고 오늘날 후손들이 생각하는 고향과 정체성의 의미를 살펴봤다.
이러한 현지 조사와 인터뷰는 작품의 중요한 창작 기반이 됐다. 한 사람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주변 사람들의 기억과 카자흐스탄 고려인 공동체의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보다 넓은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로 확장된 것이다.
이번 작품은 ‘완성되지 않은 도착에 대한 연구’라는 주제 아래, 도착과 소속을 둘러싼 여러 질문을 제시한다. ‘닿을 것 같은 목적지 하나’, ‘현지인 반 컵과 이방인 반 컵’, ‘도착 99.99999…%’ 등의 표현은 물리적으로 어떤 장소에 도착하는 것과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작품은 ‘재외동포’, ‘외국국적동포’, ‘이주노동자’, ‘이주배경 청년’, ‘유학생’ 등 사람들을 구분하는 다양한 명칭에도 주목한다. 이러한 범주들이 개인의 복합적인 정체성과 삶의 경험을 얼마나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신나데즈다는 이번 공연에 직접 배우로도 참여했다. 자신의 삶이 작품의 출발점이 된 당사자가 무대 위에서 함께했다는 점은 이번 공연의 중요한 특징이다.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경험을 외부의 시선으로만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존재와 목소리를 공연 안에 담아냈기 때문이다.
고려인의 역사는 1937년 소련 정부에 의한 강제이주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해 온 과정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고려인 후손들에게 한국은 조상의 고향인 동시에 새로운 언어적·문화적 환경과 마주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한국으로 이주한 고려인 후손들은 혈통과 문화적 뿌리로는 한국과 연결되어 있지만, 실제 일상에서는 언어와 사회적 관습, 제도적 차이로 인해 새로운 경계를 경험하기도 한다. ‘반도착’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돌아온다’는 것과 ‘도착한다’는 것이 반드시 같은 의미는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허지행 연출은 우리 사회에서 쉽게 정의되거나 주목받지 못하는 경계의 사람들을 기록하는 작업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번 작품에서도 당사자의 증언과 기록을 바탕으로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감각을 무대 위에 담아냈다.
특히 ‘반도착’은 완성된 결론을 제시하는 일반적인 공연과 달리, 창작과 연구가 진행 중인 실험적 작업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관객의 시선과 반응 역시 작품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로 설정됐다. 공연은 약 30분간 진행됐으며, 관객들은 단순히 결과물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도착’과 소속의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는 과정에 참여했다.
이번 공연에는 허지행, 신나데즈다, 박은진, 서요한이 출연했다. 허지행이 구성과 연출을 맡았으며, 엄혜은(조연출), 이단비(드라마터그), 김다정(무대), 박지만(사운드), 김녹연(영상), 정채영(기획 자문)이 함께했다.
‘반도착’은 카자흐스탄 고려인 공동체의 다양한 세대가 전한 이야기와 한국의 현대 연극 창작이 만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고려인 3세의 개인적인 삶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주변 사람들의 기억과 현지 공동체의 목소리를 통해 확장되고, 다시 한국의 공연예술로 표현됐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번 작품은 고려인 디아스포라를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만 바라보는 데서 나아가, 오늘날에도 이동하고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소속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현재진행형 이야기로 조명한다. 동시에 관객들에게 한 사람이 어느 장소에 진정으로 도착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EFLA 언론홍보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