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의 계속
상봉회에서는 러시아 극동 지역으로 한인들이 이주한 지 160주년을 기념하는 보고가 있었고, <MEDIA SARAM> 협동조합이 제작한 <고려일보> 10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영화 <운명을 바꾸는 연대기>를 감상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우리는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캄차카 한인 단체의 열성 회원인 백선자(본명: 류보비 안드레예브나)는 캄차카의 동해안에 있던, 이제는 사라진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고려인들이 캄차카 반도에 정착하게 된 역사와 당시 사건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캄차카로 온 고려인들은 러시아 내륙 지역에서만 온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 직접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10년 계약 노동을 위해 왔으나, 전쟁으로 계약이 파기되면서 1946년 서해안에만 약 10-12만 명의 고려인들이 도착했습니다. 동해안에는 1948~49년에 약 6,000명의 고려인들이 이주해 왔습니다. 서해안에는 약 5만 명의 고려인들이 살았고, 그들이 이곳 어업 산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북부 지역에서는 사슴을 기르고 농업도 발전시켰습니다. 이전에는 이곳 주민들이 모두 수입 식품이나 말린 농산물만 먹었는데, 고려인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캄차카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캄차카 한인 중에는 뛰어난 재단사, 치과 의사, 운동선수, 외과 의사들이 있어 우리의 자랑입니다."
캄차카의 고려인들은 매년 8월 15일 광복절을 기념하고, 아이의 돌잔치나 환갑과 같은 전통 의식을 거행하며, 민족 명절인 추석과 음력 설도 성대하게 맞이하고 있다. 비록 타민족과의 혼인이 늘어나고 있지만, 그들은 민족 전통을 보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류보비 안드레예브나는 부모님이 고려말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모국어를 거의 잊어버린 것에 대해 크게 아쉬워했다. 다만, 몇몇 단어들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고 한다. 그녀는 캄차카를 떠날 생각은 전혀 없다고 말하며, "캄차카의 자연, 물, 공기가 세상에서 가장 좋다"고 말했다.
김순자(본명: 올가 니콜라예브나)는 사할린에서 태어났으며, 1970년대부터 캄차카에서 살고 있다. 이곳에서 결혼하고 완전히 정착하게 되었다.
"캄차카의 자연은 매우 아름답고 사람들도 친절합니다. 사할린에서 8년제 조선학교에 다녔고, 1964년에 학교가 폐교되면서 러시아 학교로 전학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북조선에 있는 친척들을 평생 그리워하셨고, 남북 통일을 염원하며 사셨습니다. 저는 '부산항에 돌아와요'라는 노래가 아주 애틋합니다. 그것은 저 역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김순자는 1991년 마지막으로 사할린을 방문했고, 현재 그곳에 남아 있는 친척은 거의 없다. 대부분 한국이나 대륙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유세자(본명: 올가 안드레예브나)는 캄차카에서 다자녀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5명의 자녀와 함께 1947년 캄차카로 이주하였고, 이후 4명의 자녀가 더 태어났다. 맏오빠는 학교를 졸업하고 북한으로 돌아갔으며, 맏언니도 북한으로 귀환하여 이후 소식이 끊겼다.
"1963년 어머니가 북한에 방문하여 오빠와 언니를 만났지만, 그 후로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저는 캄차카에서 자라며 아마추어 예술 활동과 스포츠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곳 주민들과의 관계에서 불친절함을 느낀 적은 없습니다. 저희는 민족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한식 요리를 준비하고, 1955년까지는 한국어 교사들도 있었기에 부모님께서 집에서 고려말을 하셨습니다. 저에게 캄차카는 사랑하는 고향입니다.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모든 것이 이곳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갔을 때, 비행기에서 내려 선조의 땅을 밟는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몰려와 눈물을 흘렸습니다."
유청자 씨는 1936년생으로, 한국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에 태어났다. 그는 27년 동안 집단 농장에서 일하고 50세에 은퇴했다.
"저는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좋은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저는 러시아 학교에 다니지 않아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친구들이 없었고, 부모님 곁에서 지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어보다는 한국어로 말하는 것이 더 편합니다."
윤 유리 니콜라예비치 씨는 1944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1947년 부모와 함께 캄차카로 이주했다. 1953년에 가족이 귀국을 시도했지만, 전쟁으로 인해 계획이 무산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캄차카에 남게 되었다. 그는 물리-수학 교사로 일하면서 대학에서 한국어도 가르치고 있다.
"한국과 외교 관계가 수립된 후 모국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커졌습니다. 그래서 캄차카 대학에 동방언어 학부를 개설하고 한국어 학과도 포함시켰습니다. 고려인 청년들이 점차 한국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지만, 교사와 언어 실습이 부족하여 실질적으로 모국어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도 모국어를 배우려는 노력을 해야 하며, 모든 고려인의 고향이 한반도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손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씨는 캄차카에서 태어나 자랐다. 27년간 집단 농장에서 운전사로 근무했고, 집단 농장이 해체된 후 군부대에서 운전사로 일했다.
"민족 명절이 되면 고려인들이 모입니다. 비록 캄차카에서 태어났지만 조선학교에서 4년을 공부했기에 선조들의 조국이 저를 부르는 것을 느낍니다. 아버지는 남한에서 태어나 돈벌이를 위해 북한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명은 전쟁에 나가 3년째 행방불명 상태입니다. 고려인들이 자주 모여 서로를 격려하고, 젊은이들이 모국어와 민족 전통을 더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리 리자(본명: 리자 블라지미로브나) 씨는 5자녀 중 한 명으로, 캄차카에서 태어났다.
"민족 명절 때마다 부모님 댁에 모여 음식을 준비하고, 민족 전통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안타깝게도 젊은이들이 더 나은 삶을 찾아 캄차카를 떠나고 있습니다. 캄차카 고려인들은 서로 돕고 지지해 주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캄차카 고려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타민족과의 혼인이 늘어나면서 이제는 그저 '한국 성씨'만 남아 있을 뿐, 전통 문화와 언어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환경이 부족합니다. 결국 한국 성씨만 남아 있는 것이 현실지요».
리 리자 씨는 캄차카 고려인들이 한국으로 이주하는 경우도 드물다고 설명한다. 사할린 출신의 고려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 재정적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과 달리, 캄차카의 고려인들은 이러한 혜택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으로 이주할 이유도, 기회도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 리자 씨는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어느 나라에 살든 자신의 민족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인간다움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 한인들은 어디서나 서로를 존중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흘러 헤어질 때가 되었다. 우리는 친척처럼 서로 포옹하며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거리가 멀고, 행동과 말투에 차이가 있어도 우리 모두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한반도 선조들의 피가 흐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다!
<고려일보> 특파원 채예진, 캄차카에서의 특별 리포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