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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1917년) 혁명 전 연해주 한인들의 양잠업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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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1917년) 혁명 전 연해주 한인들의 양잠업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러시아, 1917년) 혁명 전 연해주 한인들의 양잠업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01.01.2026
      지난 호에 이어

      20세기 초 연해주에서 본격적인 양잠업이 시작된 것은 시녤니코보 마을 출신 안 이반 (안씨)의 이름과 깊이 연관돼 있다. 그는 야생으로 자라던 뽕나무 묘목을 자신의 토지로 옮겨 심은 데 이어, 한국에서 들여온 종자를 이용해 약 1데샤티나 (미터법 이전의 러시아에서 사용하던 지적 단위. 1데샤티나는 약 1.092헥타르에 해당함; 약 3025 평)에 이르는 최초의 뽕나무 재배지를 조성했다. 또한 조선에서 들여온 누에나비 알을 부화시키는 데 성공해, 이후 고치를 맺는 누에를 길러냈다.
      1908년 안이반은 연해주 지역에서 처음으로 약 30푼트(фунт, 약12kg)의 고치와 6푸드(пуд, 약 96kg)의 생사(生絲)를 생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로부터 7년 뒤에는 440 그루의 뽕나무를 갖춘 재배지를 조성했으며, 묘목 재배용 밭과 함께 양잠실, 고치 삶는 시설, 견사 방적실과 직기를 갖춘 방적∙직조 공간까지 마련해 양잠업의 기반을 체계적으로 마련했다.

      안 이반을 비롯한 시넬롭카 마을 주민들의 양잠업 운영 방식은 T.P.고르제예프(Т.П. Гордеев)의 평론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다. 고르제예프는 수년간 현지를 관찰하며 연해주 지역에서 양잠업에 보급에 적극적으로 기여한 인물이다.

      그에 따르면 안이반의 가정에서는 폭 33.5cm 또는 64cm의 직물을 생산했으며, 총 8가지 무늬를 구현할 수 있었다. 유색 실은 푸크신(fuchsine 또는 로자닐린 염산엽은 자홍색 염료임)과 소다(탄산 나트륨)를 사용해 염색했으며, 한 사람이 8~9 시간 작업하면 약 50~60 아르신(аршин: 역사적인 러시아의 길이 단위 중 하나로 사용되었으며, 1 아르신은 대략 0.7112 미터에 해당함)의 천을 생산할 수 있었다. 양잠 관련 작업에는 주로 노인과 어린이들이 참여했으며, 이들은 임금 대신 치마나 바지 등을 만들 수 있는 비단 천을 현물로 지급받았다. 이렇게 생산된 직물은 대부분 가정용으로 사용됐고, 시장에 판매되지는 않았다. 안 이반은 1915년 기준으로 자가 생산한 직물 1아르신의 가치를 약 20코페이카(러시아 동전, 루블의 1/100)로 평가했다.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고 남은 부산물은 비단 솜으로 활용됐으며, 소다와 함께 삶아 이불 등 일반 솜 대용으로 사용됐다.

      안이반과 거의 같은 시기에 시넬롭카 마을에서는 여러 고려인 가정이 양잠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의 이웃이었던 S.I. 최는 약 100 그루의 어린 뽕나무를 보유한 농가였으나 추가 토지를 확보하지 못해 재배 면적을 확대하지는 못했다. 그는 양잠을 시작한 지 5년 만에 약 300~350 아르신(200~250 미터) 분량의 직물 원단을 생산했으며, 1919년에는 약 100 아르신의 천을 마련했다. 또 다른 마을 주민 I.M.박은 양잠업에 종사한 지 4년 만에 오래된 뽕나무 50그루와 어린 나무 20그루로 구성된 농원을 운영했다. 그는 1917년에 100~150 아르신의 비단을 생산했으나, 1919년에는 생산량이 20아르신으로 크게 줄었다.

      주목할 점은 시녤니코보 마을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이 모두 러시아식 이름과 부칭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19세기 말~20 세기 초 연해주로 이주한 다수의 조선인 농민들과 비교할 때 이례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이름 사용의 변화는 시녤니코보 주민들이 러시아인들과 장기기간에 걸쳐 밀접하게 교류했음을 보여주며, 러시아어 구사 능력, 정교회 수용, 러시아 제국에 대한 충성 의식 등이 형성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연해주 지역에는 러시아와 고려인을 비롯한 다양한 집단이 상호 접촉하며 공존한 특수한 '접촉 지대(contact zone)'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접촉 지대'라는 개념은 언어학자 메리 루이스 프랫(Mary Louise Pratt)이 처음 제시한 것으로,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고 충돌하며 동시에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공간을 의미한다. 이후 이 개념은 보다 확장된 의미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러시아 및 소비에트 시기의 연해주, 특히 고려인 인구 비중이 높았던 포시에트 지역과 인근 일대는 이러한 '지역적 접촉 지대'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이 지역에서는 러시아인, 고려인, 중국인, 카자크인, 구교도(스타로베리, староверы) 등 다양한 민족과 사회 집단이 경제와 문화 전반에 걸쳐 긴밀히 교류했다. 이러한 상호 접촉과 소통은 노동 기술과 생업 경험의 교환을 촉진했으며, 신뢰 형성과 함께 상호 이익을 창출하는 기반으로 작용했다.

      슬라뱐스크 산림관리소 소장 T.L.그라데츠키(Т.Л. Градецкий)의 보고서에는 이 밖에도 여러 고려인 양잠업 종사자들이 언급된다. 그중에는 양지허(양치헤) 마을의 농민 니콜라이 박이 포함돼 있다. 그는 노보키예프 농업협회로부터 유럽산 누에알을 지원받았다. 이 누에알은 슬라뱐카 우체∙전신국 직원 리야시와 니콜라이 박의 관리 아래 성공적으로 부화∙성장했는데, 이는 이들이 양잠에 대한 경험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마을 인근에 오래된 뽕나무 재배지가 남아 있어 사료 확보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유럽산 누에알을 활용한 고려인 마을의 양잠 성과는 비교적 높은 수준을 보였다. 예컨대 니콜라이 박의 농가에서는 누에고치 1kg당 1,140개의 고치를 수확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정상 범위로 여겨졌던 400~700개를 크게 웃도는 수치다.

      볼셰비키 정권 역시 양잠업을 중요한 산업으로 인식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1921년4월29일 채택된 ‘러시아소비에트연방 노동∙국방위원회’의 결의문 <러시아 소비에트연방에서의 양잠업 복구 및 발전에 관하여>다. 해당 결의는 뽕나무 재배 면적 보존과 확대, 과학 연구와 주민 대상 기술 교육을 위한 양잠 시험∙지도소 지점들 복원을 포함한 특별 생산 프로그램 수립의 필요성을 명시했다.

      이러한 정책적 흐름 속에서 시넬니코보 마을 고려인들의 양잠 성과는 연해주가 장차 비단 산업의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연해주의 자연∙기후 조건은 야생 및 재배 뽕나무 모두에 적합했으며, 기후가 이상적이지는 않았으나 누에 사육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신규 산업으로서 양잠업 발전에는 과학적 연구와 실험, 품종 개량, 그리고 고려인 양잠 경험을 확산하기 위한 지침서 제작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연구와 조사 활동은 1916년 설립된 러시아 지리학회 남(南)우수리 분회(ЮУО РГО)가 주도했다.

      1917년 남우수리 분회는 저명한 양잠가 안이반의 농가에 연구원 마리야 이바노바(М.Т. Иванова)를 파견해 한 철 동안 현장 관찰과 현장 일지를 작성하도록 했다. 이바노바의 기록을 토대로 양잠 실습을 위한 지침자료가 마련됐으며, 학교 교육용 시청각 교재 제작을 위한 견직물 표본도 수집됐다. 이후 분회는 이러한 교육용 표본 400 세트를 제작해, 뽕나무 재배가 예정된 학교들에 배포했다.

      양잠업 확대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해 남우수리 분회는 1918년 자체 뽕나무 재배지를 만들었으며, 이듬해에는 식물학자 예브게니야 클로부코마-알리소바(Евгения Н. Клобукова-Алисова)의 지도 아래 누에 사육과 고치 생산에 대한 실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안이반으로부터 확보한 뽕나무 종자가 시험 구획에 파종됐고, 발아한 묘목들은 흑한을 견딘 뒤 1921년 봄 양묘장으로 옮겨 심어졌다.

      1924년에는 현지 고려인들의 뽕나무 재배 경험을 연구한 결과 약 30만 개의 누에알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러한 축적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1928년 남우수리 분회 산하에 극동 지방 실험 양잠소가 설립됐다. 이 기관의 활동은 창립자 알렉산드르 페도로프(А.З. Фёдоров)의 보고서에 상세히 정리돼 있다. 페도로프는 앞서 고고학 발굴을 통해 7세기 연해주 지역 고대 주민들이 양잠업에 종사했음을 입증한 바 있다.

      1930년 실험 양잠소는 권역 단위 연구기관 지위를 부여받았으며, 당시 약 8년생 뽕나무 2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페도로프는 견사 생산 관리 체계를 연구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다게스탄, 아스트라한주를 방문했으며, 그 결과를 바탕으로 누에 사육을 위한 지침서를 집필했다. 그러나 남우수리 분회의 조직 개편 과정에서 양잠소는 활동을 중단했고, 페도로프는 하바롭스크 교도소에 수감됐다가 혐의 입증 부족으로 석방됐다.

      앞서 1929년 남우수리 분회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국영 무역청 수출입국과 연해주 농업∙신용 협동조합 연합과 함께 양잠업 공동 발전을 위한 협약 초안을 마련했으나, 해당 문서는 최종 체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같은 해 12개 집단농장에서 양잠 부서가 신설되고, 뽕나무 재배지와 누에 사육 시설이 조성되면서 연해주 양잠업은 체계적 기반을 갖추기 시작했다.

      김게르만/ 역사학 박사, 교수

      사진: 서헌강(국가유산전문 사진작가) | 국가유산진흥원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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