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년 전, 굶주림과 절망에 시달리던 한인들이 한반도를 떠나 러시아 연해주 땅에 정착하였다. 19세기 말부터 원동 스꼬똡까 (Шкотовка) 구역에 터전을 잡은 저의 선조들은 농사를 지으며 자식들을 낳고 러시아어를 배웠다. 그들은 ‘뽀두스카’ (Подушка)라 불리는 한인 마을에 살았는데, 나는 어릴 때부터 이 지명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학교에서 보던 지도에는 이 지명을 찾을 수 없었다. 2019년에 전씨 가계도를 추적하던 중 블라디보스톡 주역 지도에서 드디어 이 귀중한 지명을 발견했다! 이후 1926년 극동 지역 인구 조사 자료에서 '뽀두스카 1'과 '뽀두스카 2'라는 두 한인 마을을 발견했는데, 각각 95가구와 45가구의 한인들이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이 마을들을 찾아볼 수 없고, 집들이 있던 자리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란 작은 언덕들만 남아 있다…
이와 같은 한인 촌 중 한 곳에서 1926년에 내 증조부 전지연 (Тен Чи Ен)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식들을 데리고 러시아 땅에 온 분이었다. 증조부의 사진은 아마도 아예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1933년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의 사진 한 장만이 남아 어머니는 ‘’이분이 너의 할아버지 전씨란다’’ 말하며 내게 주셨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국세 (Гук Се)였다. 그런데 그는 선조들이 살았던 '낙도리'라는 마을 이름을 따서 낙도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우리 아버지는 낙도라는 이름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2020년에 내가 할아버지의 이름이 원래 국세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알마티에 있는 할아버지의 큰형 가정에서 전씨네 족보가 보관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전 섭 (全 聶)
일족 창시자 전섭. 강원도 정선군 낙도리에서 일족을 창시함.
나는 조상들의 족보를 번역해 먼 선조들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원동 지역에서 살았던 나에게 가까운 조상들이 겪었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물론,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운명을 지니고 있으며, 그만큼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다. 그 중에는 흥미롭고 서글프며 기쁜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딸듸꾸르간에서 사는 아버지의 큰누님인 류바 고모에게서 들은 두 가지 사연을 전하려 한다. 우리 아버지가 왜 원동에서의 삶에 대해 우리에게 이야기하지 않으셨는지 짐작이 갔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너무 고통스러웠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당시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기억할 것이 별로 없을 수도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1937년에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었을 때, 당시 나이는 13세였다.
우리 할아버지 낙도 (국세)가 살던 뽀두스카 마을은 불안정한 곳이었다. 훈후즈 마적들이 마을에 계속 들이닥쳐 집집마다 아편을 찾기 위해 샅샅이 뒤졌다. 한인들은 주로 약으로 쓰기 위해 아편을 보관했다. 고모는 어린아이들을 등에 업고 숲속으로 도망치던 일들을 떠올렸다. 그때 아편은 아이들을 감싼 보자기 속에 감춰두었고, 1924년생인 우리 아버지도 고모들이 산속으로 피신할 때 '아편 보관자' 역할을 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체격이 단단하여 동네 사람들과 힘을 합쳐 형제들과 함께 여러 번 마적들을 물리쳤다. 하지만 어느 날 마적들에게 잡혀 구타당한 뒤 큰 나무에 알몸으로 묶였다. 30~40분이 지나면 모기 떼가 피를 빨아 사람이 죽는다고 한다. 다행히 마적들이 할아버지를 내버려 두고 떠난 후 친척들과 이웃들이 겨우 숨이 붙어 있는 할아버지를 집으로 업고왔다. 할아버지는 약초와 아편으로 이주일간 치료를 받으며 회복되었고, 동네 사람들과 힘을 합쳐 마적들을 하나씩 처단했다. 이러한 싸움과 부상은 할아버지의 짧은 수명의 원인이 되었던 듯하다.할아버지는 83세에 세상을 떠난 자신의 아버지보다 겨우 7년 더 살았을 뿐이다.
그렇게 할아버지 낙도의 아내였던 김순희 (Ким Сун Хи) 할머니는 일곱 자녀를 홀로 돌봐야 했다. 할머니 이야기도 매우 인상적이다. 나는 할머니가 65세가 되셨을 때부터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아버지 이름을 ‘몰로자’ (Молодя (Володя))라고 러시아식으로 부르신 것 외에는 러시아어를 전혀 모르셨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와 대화가 쉽지 않았다. 나는 태어나고 세 살까지 할머니 덕에 조선말만 썼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부모님이 고려인 이동 제한이 해제된 후 원동으로 돌아가셨을 때 나는 조선말을 자연스레 잊어버렸다. 어릴 적 기억 속에서 할머니는 다른 사람들과 뭔가 달랐다… 나이가 들고 나서야 '아, 할머니는 마치 칸 유르트에서 자란 것 같다'는 카자흐 속담으로 그 느낌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2003년 류바 고모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내 느낌을 더 확실하게 설명해주었다. 할머니의 아버지는 조선에서 부유한 직물 공장 소유자였지만, 가족과 함께 러시아로 이주해야 했다. 할아버지는 누에고치를 가져와 러시아에서도 직물 사업을 이어갔다. 그가 어디에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러시아에서 성공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집도 있었고, 배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순희에게는 프랑스인 가정교사까지 있었다(!). 어느 날 밤, 훈후즈 마적들이 할머니의 부모님을 살해하고 공장을 불태우며 배까지 파괴했다. 이웃들은 할머니를 숨겨 주었고, 당시 할머니의 나이는 9살이었다. 할머니가 13살이 되자 이웃들은 그를 낙도 할아버지와 결혼시켰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16살이었다.
강제 이주 당시 할아버지 가족에는 일곱 명의 자녀가 있었다. 고모의 말에 따르면 아이들은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땔감을 모으고 야생 파, 마늘, 나물을 채집하며 자랐다. 물론 할머니도 집안일을 하셨지만, 서투르셨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류바 고모가 8살이었을 때, 어머니의 낡은 옷가지 속에서 보따리를 발견했다. 보따리 안에는 흰 비단으로 수놓인 작은 주머니가 있었고, 그 안에는 레이스가 달린 하얀 비단 수건과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나중에 이 문양이 할머니 아버지 가문의 문장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문장 아래에 할머니의 이름도 새겨져 있었다. 류바 고모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름다운 물건을 손에 들고 그 은은한 향기에 젖어 있을 때 어머니가 들어오셔서 그것을 빼앗으며 ''다시는 손대지 마라''고 말씀하셨다. 몇 년 후 고모는 이것이 할머니가 부모님을 기억하기 위해 남겨둔 유일한 물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37년 할머니가 저녀들과 함께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었을 때, 큰딸 복남은 이미 가정을 이루고 있었고 가족과 함께 조선으로 갔다. 혹은 중국으로 갔을 수도 있다…
나에게 들려준 이 두 가지 이야기는 내가 조부모님을 더 잘 알아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우리 기성세대가 살아 있는 동안 물어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과거에 대해 더 많이 물어보고서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할머니는 1956년에 아들과 함께 원동으로 돌아가지 않고, 일생을 우슈토베에서 보내셨다. 그는 카자흐스탄과 러시아어를 배우지 않으신 채 1970년에 세상을 떠났다. 1961년에 스빠스크-달니 시에 있는 아들의 집을 찾아가셨지만, 다시 우슈토베로 돌아가고 싶어 하셨다. 할머니는 어려운 시기에 자신과 자녀들을 받아준 카자흐스탄에 항상 감사한 마음을 품고 계셨다. 이곳에서 손자와 증-증-증손자들이 행복하게 자라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나탈리야 아우자노바 (전씨),
아스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