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문제가 세계적 이슈가 되었다. 4월과 5월에는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계획되어 있고, 이에 따른 남북한 및 주변국 정상들의 회동 또한 진행될 것이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난 2018년 한 해는 한반도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바쁜 한 해가 될 것이다. 이에 따라 남북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도 최고조에 이를 것이다. 이제 여기서 한번쯤 과거 남과 북이 기울였던 대화와 평화를 위한 노력이 어떠했는지 고찰하는 일이 필요하다.

1972년 당시 남한의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과의 대화와 평화적 통일을 조성하기 위하여 중앙정보부장을 평양에 비밀리에 파견하여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면담하게 하여 양 측의 의견이 반영된 성명서를 발표했다. 7월 4일에 발표되었다고 해서 이것이 바로 ‘7•4 남북공동성명’인데 그 핵심은 “남북의 평화적 통일, 자주적 통일, 하나의 민족으로서 대동단결” 등이었다. 1953년 남북의 휴전 이후 긴장만 흘렀던 양 측 사이에서 20년 만에 처음으로 화해와 평화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배경에는 1969년에 한국에서 ‘국토통일원(현재 통일부의 전신)’을 설치하여 통일문제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와 정책수립을 시작했고, 1970년 8월 15일에는 대통령의 ‘평화통일구상’이 발표되었으며, 1971년 8월에는 남북 이산가족 찾기운동에 대해 남북합의 결과의 연장선상에 있는 일련의 정책변화 등이 있었다. 외형적으로 볼 때 최소한 남북한의 경직된 분위기보다는 화해의 길로 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1972년 10월 유신헌법의 공표와 함께 출범한 새로운 정부에서도 1973년 6월에 발표된 ‘6•23 평화통일 외교정책’으로 북한에 대한 유화적인 제스처는 계속 이어졌다. 학창 시절에 이 내용들을 다 암기해야 시험을 잘 볼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의 한국 중년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6•23 선언은 “남북한 UN 동시가입, 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문호개방” 등이 그 핵심적 내용이다. 그 실현은 20년 정도 뒤쯤에 이루어졌지만 이미 그 단초는 오래 전에 계획되어 있었던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남북의 평화적인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유신 정부’라는 한국 정치체제의 변형으로 인하여 한국 내에서는 수많은 민주화 운동과 함께 친북한적 성향을 띠는 단체와 사상가들의 움직임이 불법적으로 탄압받게 됨으로써 북한에 대한 유화적인 분위기는 약화되어 나갔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1976년 8월에는 이른바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 있었는데 그 결과 남과 북의 전쟁 기운까지 감돌았다. 그런 식으로 70년대를 마감했고 80년대 초에 있었던 미국과 소련 간의 신냉전 기조까지 합하여 한반도에는 평화가 멀어져 보였다.

북한의 실상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소련 시기에 고려인들이 북한이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남한의 실상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한 것과도 비교될 것이다. 고려인들이 남한에 대해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은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으니 그 이전의 오해는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북한에 대한 평화 추구의 노력은 1980년대의 신정부에서 재차 시도되었다. 1982년 1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을 제시했고 이에 따라 통일헌법 마련을 위한 협회의가 구성되고 남북 고위급 회담에 대한 의지도 표명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성과는 나오지 못했고, 다음 대통령인 노태우 정부때 ‘7•7 특별선언’이 발표되면서 ‘한민족공동체 통일 방안’으로 완성되었다. 이 방안에 따르면 남북대화의 필요성이 강조되었고, 남북정상 회담의 필요성이 제시되었으며, 과도기적 정부인 남북연합정부 및 통일헌법에 입각한 남북 총선거 등이 제안되었다. 매우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노태우 정부 때 한국과 소련 간의 국교수립(1990년)이 체결되었고, 공산권 국가와 교류를 실천하는 북방정책이 수립되었다. 이에 따라 남북한 동시 UN 가입(1991년)이 이루어지고, 중국과도 외교관계가 수립(1992)되었다. 이 무렵 한국 대학 졸업생들이 이전에 금지되었던 모스크바 및 상트페테르부르그의 대학으로 유학가는 일이 가능하게 되어 소위 공산권 국가에서 공부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아마도 고려인의 존재를 그때 알게 된 한국 사람들도 있었을 것인데 이는 매우 빠른 편에 속한다. 김영삼 정부(1993.2-1998.2)는 북한과의 대화 의지를 더 높였다. ‘한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한 3단계 통일방안’이 제시되었던 것이다. ⓵민족공동체 헌장을 채택하고 ⓶남북연합 정부를 구성하며 ⓷통일헌법 제정으로 통일민주 공화국을 건설한다는 것이다.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될 뻔 했다.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간의 만남이 계획 중이던 1994년에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정상회담이 무산되었던 것이다. 

김대중 정부(1998.2-2003.2)는 대북한 정책의 목표를 ‘평화, 화해, 협력’에 두고 3대 원칙과 6개의 추진 기조 및 1개의 추진 방향을 설정했다. 3대 원칙에는 “북의 무력도발을 허용하지 않으며, 흡수통일을 배제하고, 화해와 협력의 노력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햇볕 정책’으로 유명한 정책이 이 시기에 펼쳐졌다. 1998년 6월에 한국의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소 500마리를 트럭에 싣고 북쪽으로 가던 광경은 결코 잊혀 질 수 없는 일이었다. 역대 정부에는 없었던 남북이산가족의 상봉도 여섯 차례나 이루어졌다. 김대중-김정일 정상회담(2000.6.13.-15)도 평양에서 결국 성사되었고 ‘6•15 선언’이 발표되었다. 이를 통해 남북한의 평화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르게 되었다. 1998년에 이미 금강산 관광사업이 진행되었고 2000년 하반기에는 개성에 산업공단을 조성하기 위한 사업이 준비되었다.

노무현 정부(2003.2-2008.2)는 햇볕 정책의 기조를 계승해 나갔다. 2005년에 개성공단의 운영이 시작되고 남북의 협력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역시 평양에서 두 정상간의 회담(2007.10.2.-4)이 성사되었다. 남북한의 신뢰회복 지속과 한반도 평화 유지를 위한 양 측의 노력이 명시되었다. 또한 정전협정의 폐기와 평화협정 마련에 대한 의지도 적극 표명되었다. 이와 함께 남북이산가족의 상봉도 10회나 이루어졌다. 전반적으로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남북 대화와 화해, 평화 분위기는 확고하게 진행되어 나갔다.그러나 이러한 남북 화해 및 평화 분위기는 이명박 정부(2008.2-2013.2) 및 박근혜 정부(2013.2-2017.3) 시기에 완전히 위축되고 말았다. ‘상생과 공영’의 원칙을 내세웠던 이명박 정부는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계승하고 북한의 비핵화문제를 언급하면서 도저히 수용 불가능한 대안이 제시되었다. 2008년 7월에 금강산을 관광하던 한국인 여행객 1명이 피살된 여파로 금강산 관광사업이 전면 중단되었다. 이는 남북관계에 차가운 물을 뿌린 격이 되었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통한 남북관계의 정상화’를 표방했던 박근혜 정부도 처음에는 남북간 문화적 협력 증진과 경제협력을 모색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천 전략은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2016년 2월에 개성공단 운영의 전면적 중단결정이 내려짐으로써 개성에서 활동하던 한국의 기업인에게 경제적인 타격을 주었다. 나아가 이는 남북대화 및 남북협력의 단절이라는 상징성을 띠게 되었다. 한 마디로 지난 9년 동안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태로 치닫게 되었던 것이다.

지난 5월에 국민의 선택을 받은 문재인 대통령은 ‘베를린 선언’에서도 밝혔듯이 남북관계의 개선과 대화 및 교류증진에 큰 의지를 밝히고 있고, 지난 평창 올림픽때 보여주었던 남북 고위급 회의 및 남북정상회의 추진에 대한 결연한 행동을 과감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결말은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일단 ‘햇볕 정책’의 기조가 재차 되살아나는 쪽으로 갈 것이 예상된다. 무엇보다도 문재인 대통령 자신이 노무현 정부 당시 고위급 책임자(대통령 비서실장)였기 때문이다. 남북협력 무드는 한반도 주변 정세의 변화와 함께 복합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현재로서는 매우 밝은 전망이 예상되고 있다.

황 영 삼

* 주요 경력/학력 

-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 통일문화연구원 연구실장

- 알파라비 카자흐국립대학교 한국학과 파견교수 (2005-6)

 

-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국제관계학과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