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지 않은 과거에만 해도 우리를 하나의 이름으로 즉 ‘소련 고려인’이라고 했으며 록그룹 ‘나우틸루스 폼필리우스(Nautilus Pompilius)’의 전설적인 노래에 나와 있듯이 우리는 하나의 사슬로 매여 있었습니다. 이 노래는 고르바초프 페레스트로이카의 상징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노래는 모두의 마음에 들었지만 각자가 가사의 의미에 대해 깊이 파고들지 않고 제 나름대로 노래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가사를 유심히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음모의 흉책은 그을음처럼 묻어나,

누구의 손을 잡는데 왠 팔꿈치가 잡히지,

눈을 찾는데 왠 눈길이 느껴지네

      관리의 머리엔 엉뚱한 생각뿐

붉은 햇살 뒤엔 장미빛 석양

   하나로 얽매여, 하나의 사슬에 묶여,

   하나의 사슬에 얽매여, 하나로 묶여…

제 1절의 가사와 후렴이 바로 우리들 즉 소련 고려인에 대한 것 같습니다. 하나의 사슬에 얽매인 우리가 남이 보기에는 단결된 것처럼 같지만 실제로는 뿔뿔이 흩어져 있었으며 널리 분산되어 있었습니상하게도 강제이주는 고려인들을 ‘간첩과 반역자’라는 공동의 타이틀로 묶었고, <프라브다>지에 실린 기사는 모든 고려인들을 하나의 ‘그을음’으로 문질러 놓았습니다.우리 동포들이 인사를 하려고 손을 내밀면 손바닥을 잡은 것이 아니라 <팔꿈치’를 잡게 되고 이해의 눈 대신 ‘평가하는’ > 눈길을 보게 되는가 하는 생각이 청소년 시절에 자주 들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되었을 때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말하지도 말고 쓰지도 말라,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어. 그런데 지식이 아니라 경험이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게 하는 지금은 소련 고려인의 통합에 대한 주장이 얼마나 진실된 것인가 하는데 대해 말할 때가 왔습니다.

볼쉐비키들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들이여, 단결하라!> 라는  구호로 인종, 민족, 성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다 평등한 세계 공산주의를 설립하기 위해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먼저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승리해야 했습니다. 다음 모든 인민들이 소련을 본받아야 했으며 도시와 농촌간 차이를 없애고 여성들에게 평등권을 보장하고 교육을 시켜야 했습니다. 위대한 평등화는 ‘호모 소비에티쿠스(소련 인간) - Homo Sovieticus’ 를 양성하고 통일된 소련 인민을 형성해야 했습니다. 이와 같은 전망은 소련 인민의 일부분으로 되어야 할 사명을 지닌 소련 고려인들의 통합의 기본으로 되었습니다. 소련 고려인들의 역사는 국가 역사의 흐름에 합류되어 같이 흘렀으며, 고려인들은 그 과정에 그들간 차이를 잃으며 공동의 특징을 더욱 더 띠면서 소련 사회 발전의 모든 단계를 경과했습니다. 이 의미에서 볼 때 고려인들의 운명이 민족자치구조가 없는 소련의 모든 민족집단의 운명과 같았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모든 종족과 씨족을 하나의 인민으로 만들던 바로 소련 정권 시기에 카자흐 또는 타지크 민족이 형성되었다고 간주합니다. 이 일은 거의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시기에 성인들이 소지하고 다녔던, <낫과 망치>가 그려진 신분증에 ‘민족란’이라는 다섯 번째 장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카자흐인 혹은 우스베크인이라고 기록했지만 각자는 자기 씨족에 대한 소속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몇 년 전에 이스탐불에서 있었던 세계 투르크학 포럼에서 카자흐스탄 출신 학자들이 <Are you Kazakh?> 이라는 나의 질문에 <No, l’m Kypchak> 혹은 <No, l’m Argyn>, < l’m Dulat!> 이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물론 그 누구도 자기의 모국인 카자흐스탄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소련 고려인은 공통적으로 하나의 출신국가 Korea(코리아)를 가지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연해주로 이주한 다수 조선인 이주민들은 러시아와 국경을 가지고 있는 함경도 출신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들이 미국, 캐나다, 호주, 서유럽으로 이주한 한인들과 차이가 있습니다. 

1920-30년대에 소련 극동에서 거주하는 모든 고려인들이 전반적인 문맹퇴치 제도를 걸쳐 소비에트화 학교를 다녔습니다.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대폭적인 선전을 받았으며 러시아어를 강압적인 형태로 빠르게 배우게 했습니다. 한반도의 경제는 본래 농업에 기초를 두었습니다. 때문에 혁명전 연해주로 이주해 온 한인들도 이미 살아오던 생활양식에 따라 자작농으로 살았습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스탈린은 1929년을 <위대한 전환>의 해로 선포하고 농민들을 콤뮨과 아르텔에 끌어넣었습니다. <한인 포시에트 구역은 대대적인 집단화의 지역으로 선포되었습니다.  한인들에 대한 명령적이고 강압적인 집단화는 통합의 정신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인들의 단합은 강압적 조치에 대한 반응으로, 한인 콜호즈들의 토지에 대한 불공정한 이용에 대한 대답으로, 열강의 러시아 배척주의에 대한 수동적인 반향으로 되었습니다. 스탈린의 집단화는 소비에트화하는 한인들의 통합에서 큰 역할을 했습니다. >

무신론은 소련 사람들에게 통합의 또 하나의 꺾쇠로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이 모든 종교를 대체해야 했습니다. 때문에 소련에서 교회가 국가로부터, 종교는 학교교육으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볼쉐비키 정권 초기에 이르러 극동에서 거주하는 한인들은 다신교로 특징되었습니다. 왜냐 하면 일부는 불교, 다른 일부는 무속신앙을  믿었고 심지어는 정교를 믿는 한인들도 나타났습니다. 서로 다른 신앙은 사람들을 나누어 놓았습니다. 때문에 1920-30년대에 ‘호전적인 무신론’이 한인들을 일치한 무신앙으로 균등화시켰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좋은 날이 올 때까지 <자기의 우상들을 묻어놓고> 남몰래 기도한 것은 물론입니다. 1937년도 인구조사 자료는 소련 사람들이 신앙심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스탈린으로 하여금 경각심을 높이게 했으며 따라서 무신론을 심기 위해 나사를 최대한 죄이게 했습니다. 1937년도 강제이주가 범죄적이고 불법적이고 비인도적인 성격을 띤 것은 물론입니다. 강제이주에 대해 이미 많이 쓰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한가지 부분을 빼놓았습니다. 즉 소련 고려인들의 통합공고화에 영향을 준 것입니다. 강제이주는 민족에 따라 실시된 것입니다. 사회적 출신, 신앙 또는 국적이 아니라 같은 혈족이 민족들의 강제이주의 기본 표준으로 되었습니다. 모든 고려인들에게 하나의 딱지를 붙였는데 바로 그것이 스탈린 체제 앞에서만이 아니라 강제이주된 자들 자체도 단합시켰습니다. 실로 불행과 비극에서 인민이 하나로 뭉치는 것입니다.

소련 당국이 유일한 <소련 인민>으로 얽어 맨 사슬속에서도 사회주의적 내용으로 보아 유일한 소비에트 문화가 중요한 고리를 이루었습니다. 그 문화는 민족적 형태를 띨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소비에트 문화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단일체로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모든 민족극장의 공연 종목에 러시아, 소비에트 및 외국 고전작가들의 작품이 들어가야 하며 소련의 현실을 정당하게 보여야 했고, <썩어가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사회주의 형제 국가들>의 성과를 찬양해야 했습니다. 이런 정책의 결과로 소련 고려인들은 세계문학과 예술을 널리 포괄한 보다 높은 문화수준으로 모든 외국 한인들과 차이를 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단합된 힘을 어려운 전쟁 시기의 증인들이 겪었지만 오늘도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하긴 고려인들을 전선으로 보내지 않았지만 그들은 공동의 적을 격멸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습니다. 고려인들을 전선으로 보내지 않고 소련군으로 징병하지 않은 것이 한편으로는 다른 민족들이 보기에 고려인들을 차이가 나도록 했지만 고려인들 사이에서는 스스로를 평등화하였습니다. 왜냐 하면 이 조치가 모든 고려인 남자들에게 관계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본질>의 단합적 역할을 상기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련 고려인들은 모두 이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으며 그들 중 다수가 한번이라도 친척들이나 가까운 사람들이 임대한 양파밭에서 일했습니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소련 고려인들의 기업인 이 현상을 다음과 같이 같이 쓸 수 있습니다. <고본질>은 바로 소련 고려인들에게만 특이한 불법적 야채재배업과 수박참외 재배업인데 리더-팀장의 지도하에 집단적으로 땅을 임차하여 계절에 따라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바로 고려인 고본질 팀들 사이에서 1960-80년대에는 생동적이고 상시적인 교류가 있었습니다. 고려인들은 콜호즈와 기타 직업을 버리게 된 후에 고본질을 하게 되었습니다. 들판의 계절 일군들 사이에서는 고려말이 울렸으며 전통적 음식을 만들었고 그들 사이에 민족의 특이한 관계가 보존되었습니다.

결론을 맺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지적해야 할 것입니다. 공동의 역사, <소련 인민>형성에 돌려진 공동의 국가정책, 공동의 러시아어 사용, 소련의 전 지역을 순회공연한, 민족을 대표하는 허브 고려극장, 공화국 신문 <레닌기치>가 소련 고려인들을 단합시켰습니다. 같은 국가명, 자체 명칭 – 고려사람, 우리의 짧은 성, 러시아어 사용, 모두에게 하나인 위대한 나라 –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이 우리를 단합하게 했습니다. 소련붕괴, 구소련 공화국들의 독자적인 발전의 길 선택이 정치, 경제, 사회-문화 및 언어 분야에서 차이를 크게 했습니다. 우리의 선조들과 우리의 부모들이 어려움속에서 얻은 통합이 우리의 면전에서 쉽게, 급격히 파산되기 시작했습니다. CIS 국가들의 고려인협회 우선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고려인협회들, 지성적인 엘리트들이 이따금 단결의 필요성을 말했지만 실제로는 백조, 새우, 꼬치고기에 대한 크릴로프의 우화를 상기시킬 뿐입니다.고려인협회 지도자들, 고려인 운동 지도자들, 학자들과 기자들이 자기의 미래를 보장하는 기본적인 전략에서 왜 합의를 달성하지 못하는가? 우리의 격리의 원인이 무엇인가? 우리가 단합할 필요가 있는가 아니면 각자 살아나갈 길을 제각기 찾아야 하는가? 상기 의문에 대한 답은 다음 호에서 다루겠습니다.       

        

김 게르만 – 역사학 박사,

건국대 (서울) 역사강좌 교수, 

 

알파라비 명칭 카자흐국립대 한국학 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