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반도에서1950년 6월 25일에 발생한  남북간 동족상쟁에는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미국, 중국을  비롯한 많은 유럽나라들도   참전했다.  휴전협정을 맺은 1953년 7월27일까지 3년 동안에  남북조선의 전쟁으로 인한 희생자수는  천문학적 숫자에 이르렀고  남북을 합하여 모두 3백30만명으로  추정된다. 조선민족의 역사적흐름을  갑자기  거세찬 소용돌이로  전환시킨  6.25전쟁은 나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첬다.

나는  이 소용돌이에 휘말려서 빠저나올래야 빠저나올수 없었고 우선 부모님곁을  떠나면서도  이것이 영원한 이별의  마지막 순간이라는것을 몰랐다.   그후 나는  수말리 떨어진 먼  타향에 머물게 되었고  부모형제들을 그리며 조국을 그리며  일생동안을 외국에서 살게 된것이다. 6.25 전쟁이 시작된  그해에 나는  대학생복을 군복으로 갈아입고  인민군82미리 박격포 중대의 포병소대장으로서  3년동안을  동해안방어전선에서 전투의 나날을 보냈다.내가 전투에 참가한것은 함경도 성진이였고  미군을 비롯한 16개국으로 구성된 외래무장간섭자 -국제연합군이 서울을 탈환하고  38선을 넘어 계속 북진하고 있을 때였다. 여러번에 거치는 전투들에서 미군을 비롯한 외래무장간섭자-국제연합군의 강한 화력을 대담하게 대응하지 못한것은  우선우리를 공습하는 적전투기들을 사격해야하는 고사포가 한대도 없었다는것이며또 우리 박격포는 옛날에 일본군이 만주에 던지고간 구식 무기였고 묘준경도  거리측정기도 없었고 불발탄이 많았다. 

우리 동해안방어여단은 매번 크나큰 손실을 입었고 늘 패배를 당했다. 성진 일대에  여러 지역들에서  계속  패망을 당한 아군보병부대들은  무질서하게 후퇴하고 말았다.  여러번에 거치는 전투들에서 우리 박격포중대는 적기공습을 받고  전멸되기 직전까지 공격하는 적들을 향해 약3천발의 포탄을 발사했고  우리 소대는 이 전투들에서 포탄을 마지막 한발까지 전부 다 발사했다.  적기공습후 우리 박격포는 전부 파괴되었다. 그런데 후퇴명령없이 방어진지를 이탈하게 되면  지휘관은  군사재판에 회부되며 엄벌을 면치 못하게 되는것이다.  지금 후퇴명령이 없는 조건에서 우리는 자기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 고지를 절대로 이탈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두손을 들고 대원들과 함께 투항할수는  더욱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 리 소대가 후퇴하게 되면  소대장인 나는 군사재판을 받고 처벌되지만 그러나 대원들의 생명은 구원될수 있는것이다.    현상황은 추상적인 정렬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과 실천을 요구하고  있었다.  생존한 전우들의 운명은 어디까지나 소대장인 나의 의지와 선택에 의하여 좌우된다.  손자병법에도 있는것처럼  적아의 역량대비에서  공격하는 적의 역량이 10배를 초과할 때 전략적후퇴는 불가피한것이다.   

 이 때 나는 «모두 날 따라 앞으로 !»  하고 명령한후  살아남은  대원  몇명을 인솔하며 방어선을    이탈했다.  가파른 자그마한 산들을 오르고 내리며 여러 날을 북을 향하여 걷고 걷고 또 걸었다. 그런데 도중에서 자기 부대를 잃은 다른 부대의 보병들이 조금씩  보충되어 대원들의 수는  증가되었다.   우리는 계속  후퇴했다. 우리 동해안방어여단 위술경무부는 유일한 후퇴로를 차단하고 무질서하게 후퇴하는 장병들을 여기에 모두  집결시키고 있었다.  이윽고 우리가  “임시 집결소 ”비슷한 이곳에  이르렀을 때는 해질무럽이였다. 내가 보기에는 성진일대를  방어하든 보병들 수백명이 패전후  모두  여기에 집결한듯 했다. 무질서한  이 집결처에서 나는 자기부대를 찾으려 하지않았다. 우리가 식사를 하고있는데 여단 위술경무관소좌가 다발총을 멘 몇명의 대원들과 함께 우리앞에 문득 나타났다. 그런데 뜻밖에 그의 말씨는 아주 부드러웠다.우리를 바라보는 그의 안면에 나타난 그 어떤 따뜻한 동정심많은 얼굴표정은 나를 어느정도  안심시켰다. 그는 우리의 소속, 대원들의 수를 적은후 야간 과업을 제시했다. 우리가 야간군무를 끝냈을 때는   여명의 찬연한 빛이 진한 안개속에 깃을 펴고 찾아들었고 자주빛노을이 앞에낀 안개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후 전선생할의  3년이 지났고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을 때도  나는 계속 소용돌이에 휘말려 이번에는 군복을 벗고 강원도 고성을 떠나 평양, 신의주를 지나 중국국경을 넘었고                          

쏘련국경을 넘었다.  모쓰크와에서 유학을 끝낸후에 1년중 12개월이 겨울이고 나머지가 봄이며 6개월간이 낮이고 6개월간이 밤인  북극권의 도시 무르만쓰크에 도착했다.  다음은 월가강변,그 후에는 아주 추운  우랄,씨베리야 등으로 떠돌아다니며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여나 인간으로서의 청춘시절의 기쁨과 행복이라는것을 전혀 몰랐고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여러 해를 지냈다. 이윽고  27년이지나  소용돌이에서겨우  빠져나와 정착하게 된것은 카자흐쓰딴 알마따시였다. 푸른 하늘에 높이 뜬 흰구름을 따라 광활한 쏘련지역을 여기저기 다니다가  정신을 차리고 문뜩 서서 지나간 과거를 뒤돌아보니그간 내가 얻은것은 무엇이냐?  잃은것은  부모형제들이며 어린 시절에 같이 자란 친구들이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들을  보고싶고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싶었다. 춘하추동계절이 선명하게 변하여 어디를 가나 자연이 아름다우며 여러 민족들이 화합하여 화목하게 사는  카자흐쓰딴에 정착한 나는 여기서  생전 처음으로 자기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카자흐인선배들의 사심없는  많은 도움을 받았고 그들의 배려로 조금도 외로움이라는것을 느끼지 않았다. 자기 재능에 따라   아무런 구속도 없이 이 곳에서 자유롭게 일하며 살게 되었다. 여유시간이 있을 때면 동시대인들에게는 물론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생활의 진실과 전쟁의 비극을 이야기해 주기도 한다. 나는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동족상쟁의 비극이 그 어디에서도 다시는 절대 중복되지 않을 것을 부디 바라는 바이다.

                                                                                     

김종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