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부터 1949년까지 5년 동안에 한국 인구가 254만 명 증가했는데 그 중 180만 명은 다른 국가들에서 온 귀환자들이고, 74만 명은 한반도의 북부에서 온 이주민들입니다. 일본에서 온 귀환자들은 귀환자 총수의 3/4에 달하였습니다. 한반도가 해방된 후에 남북한의 국경이 비교적 명확해졌습니다. 소련과 미국 군사행정부가 사람들이 서로 이동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결국은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1945-1950년에 북한에서 실시된 변화 즉 토지개혁, 산업의 국유화, 비 공산당과 기독교 단체의 파괴는 많은 사람들의 불만을 불러일으켰으며 남한으로 이주를 초래하였고, 1950-1953년 한국전쟁 역시 대량 이주를 초래했습니다. 수십만 명의 한인들이 고향땅을 떠났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국가 기관들이 마비되었기에 북한지방을 떠난 피난민들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습니다. 1953년 이후에는 남북한간의 국경이 폐쇄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말에 일본에 약 200만 명의 한인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일본이 항복하고 한반도가 해방된 후에 한반도로 돌아온 귀환자들의 수를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남한 정부의 자료에 의하면 1949년 5월에 140여만 명이 귀환했으나, 일본에 아직도 약 65만 명이 남아 있었습니다.귀환 한인들의 첫 시기를 자연적인 대중적 귀환의 시기라고 칭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부터 1945년 11월 30일까지 즉 3개월 또는 3개월 반 동안에 약 80만 명의 한인들이 조국으로 귀환했는데 그중 52만 5천명은 통제받지 않았던 이주민들입니다.둘째 시기 즉 1945년 12월 1일부터 1946년 말까지 약 52만 5천명의 귀환자들이 한국으로 보내졌습니다. 귀환자들에 대한 엄격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약 5만 명의 한인들이 독자적으로 귀국했습니다.귀환의 셋째 시기는 1947년 1월 1일에 시작되어 1948년 늦여름에 끝났습니다. 미군정이 훈령을 채택했는데 그에 따르면 귀환이 세 부류의 한인들로 제한되었습니다. 첫째는 불법적으로 일본에 들어가 검거된 한인들입니다. 둘째는 국가로부터 강제 이주시키는 데 대한 연방 군사재판의 판결이 내린 한인들입니다. 셋째는 귀환 권리를 상실당하지 않았으며 귀국 신청서를 쓴 한인들입니다. 1947. 1. 1~10.30까지 7,551명이 한국으로 귀환하였고, 1947.11.1.~1948. 8.31까지 5,006명이 귀국했습니다. 네 번째, 즉 마지막 시기는 1948. 9.1~1949년도 말에 끝납니다. 이 기간에 그리 많지 않은 한인 즉 6,590명이 귀국했습니다.

1964년 당시 일본 통계자료에 의하면 일본에 있는 한인 총수 (578,572명)에서 97%가 남한 출신이고 오직 2%만이 북한 출신이었습니다(1%의 한인들에 대한 출신 지역에 대한 자료는 없습니다).한인들이 일본으로부터 북한으로도 귀환했는데 그 과정은 출생지가 아니라 정치적 요인이 결정적인 원인으로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는 북한과 <조총련>지도자들이 적극적으로 행동했습니다. 김일성은 1958년 9월에 북한이 재일동포들의 귀환을 환영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김일성은 1959년 1월에 상기 성명을 반복하면서 귀환은 <재일동포들의 신성한 권리이며 인도주의적 필요성>이라고 칭하면서 <가치있는 생활을 찾기 위해 조국의 품으로 되돌아오라>고 했습니다. 일본 수도 교외인 가와사키에서 살고 있는 재일동포 그룹이 1958년에 북한 귀환을 청원하는 서한을 북한 정부에 보냈습니다. 일본 공산당의 지원 하에 일본에서 북한으로 귀환하기 위한 로비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귀환자들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이 포함된, 일본정부에 보낸 북한의 제안에 응답하여 결국 일본 국회가 1959년에 <북한으로 귀국하려는 한인들을 귀환시키는 데에 대한 결정을 채택했습니다.국제적십자협회의 중재 하에 북한과 일본은 1959년 8월에 한인들을 일본으로부터 북한으로 자발적으로 귀환시키는데 합의를 보았습니다. 일본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과 한인들에 대한 일본의 차별대우가 북한으로 가려는 기본 원인이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북한으로 가는 재일동포들의 귀환에서 <북한의 끌어당기는> 자극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북한은 소련의 원조 하에 국가 경제가 회복되고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사회생활이 새롭게 건설되어 모든 생활 분야에서 변화되는 과정에 있었으며, 공업과 농업이 안정적으로 발전했습니다. 1957년에 북한 정부는 일본에 있는 조선 학교들을 지원하기 위해 자금을 지원하였습니다. 재일동포들은 이것을 북한의 경제력에 대한 증거로, 재일동포들에 대한 배려로 받아들였습니다.그런데 북한의 경제성장과 복리 향상이 북한으로 가는 귀환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습니다. 재일동포들의 높은 애국심이 그보다 못지않은 중요성을 띠었는데 그것은 식민지가 되기전의 민족주의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북한 내부에서는 이 시기에 국민들이 국가건설의 열의에 불탔고 밝은 미래를 믿었습니다. 일본에서 사는 많은 조선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말부터 1950년도까지 남쪽을 바라보기보다도 민족독립의 구현으로서의 북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일본 경찰의 자료에 의하면 1955년 초기에 재일동포들의 약 90%가 북한을 지지했습니다.

전후 시기에 일본에 남은 다수 한인들이 일본에서 영원히 살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한인들 특히 1세는 한반도가 속히 통일될 것이며 그러면 그들이 새롭게 독립된 한민족에 통합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젊은 세대들은 북한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왜냐 하면 한인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대우로 인해 일본 대학에서 공부를 하거나 일자리를 얻을 전망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1959년 12월에 귀환이 시작된 첫 달에 2,942명이 북한으로 이주했고, 뒤를 이어 1960년에 48,956명, 1961년에 22,201명이 이주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1967년도까지 북한으로 이주한 귀환자 수가 88,611명에 달했습니다. 북한으로의 귀환은 이승만 정부가 전복된 후인 1960-1961년에 최고조에 달았습니다. 재일동포들은 한국이 붕괴되고 통일이 곧 오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경제정책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4년간 중단되었던 귀화가 1971년에 다시 시작되었는데 그 범위가 크지  않았습니다. 1976년에 이르러 총 92,749명이 귀화했습니다. 북한으로 귀환한 한인들 중에 일본인이 6,600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주로 1960년 2월 26일자, (하)1975년 4월 19일자 귀국사업을 지지하는 내용의 '아사히 신문' 기사한인들과 결혼을 한 일본여자들이고 일본민족으로 기록한 아이들과 중국인이 7명이었습니다. 일본자료에 의하면 1984년까지 북한으로 귀환한 한인의 총수는 93,339명 이였습니다. 그러나 1976년 이후 1984년까지 12년 동안에는 약 600명만 북한으로 귀환했습니다. 형식적으로 귀환은 계속되고 있지만 북한에 가서 살고자 하는 자들이 실제로는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1950년대 말에 시작되었던 귀환이 1960년대에 가서 연간 1-2천명까지 줄어들고 1970년대에는 수백 명으로 그리고 80년대에는 수십 명으로 줄었습니다.일본으로 넘어간 한인들의 다수가 남쪽에서 갔기 때문에 남북이 분단되어 있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귀환과정이 하나의 민족과 하나의 국가에 관계되는 일이라고 볼 수 있지만, 북한으로 향한 재일동포들의 이주는 귀환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귀국> (조국으로 돌아온다)이란 용어와 이 용어의 이용이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일본적십자 협회가 다른 용어 즉 <히키야게> (hikiage)를 사용했는데 그것을 <귀환>으로도 번역할 수 있고, <철수> 또는 <추방>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조총련>의 반대세력과 재일본 대한민국민단은 북한으로의 귀환을 <북송> (북으로 보낸다)이라고 칭했습니다. <히키야게>가 이전의 거주지로의 사람들의 자발적인 이동을 의미하는 용어인 <귀환>과 강제적인 <추방>의 의미를 갖고 있는 반면, <북송>은 한인들의 의사에 거슬려 북한으로 보낸다는 즉 이를 테면 강제이주와 같은 일정한 정도의 강압의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 <조총련>은 (재일본 조선인 총련합회) <귀국>이란 용어를 사용했지만 태어난 곳이라고 볼 때 이것은 조국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조총련>이 북한을 모국이라고 부르는 것을 고려하여 한인들이 일본을 떠나는 것을 법적으로는 귀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의 창설대한민국 정부는 전후 20년간 일본에 사는 한인들에 관계되는 문제는 일본정부의 책임분야라고 간주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정부는 강제이주 되어야 할 한인들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했습니다. 그 결과 억류된 한인들이 오랜 기간 일본의 서남부에 있는 이민 수용소들에 있게 되었습니다. 국적에 대한 한국법과 일본법은 친척관계 원칙에 따라 어머니 쪽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쪽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입장에서 출발한다면 아버지측이 한국 태생이라면 그 한국인은 한국국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한국정부가 공식적 귀환과정에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은 한인들이 자신의 선택을 했다고 간주하고 일본에 남은 한인들에게 관심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북한 정부는 이와 반대로 일본에 있는 한인들이 자기 나라의 국민이라고 주장하면서 귀환을 장려했습니다.북한 정부는 일본에서 들어오는 한인들의 귀환을 남북한의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그리고 북한이 실시하는 정책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였으며, 특히 1999년 12월 평양과 동경에서 개최된 <사회주의로의 위대한 출발> 50주년을 기념하는 경축회의에서 일본 한인들의 북한귀화는 김일성이 제창한 <주체>사상의 승리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김 게르만 – 역사학 박사, 알파라비 국립대 한국학 센터 소장,

 건국대 (서울) 역사강좌 교수, 제17기 민주평통 중앙아시아 협의회 간사

 

감수   이재완

 번역   남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