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말에 국립 공화국 아카데미 고려극장에서 카자흐스탄공화국 극작가, 공화국 국가상 계관인 둘라트 이싸베꼬브의 연극 <여배우> 초연이 있었다. 연극은 여배우의 수월치 않은 창작적 길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극장 지도부는 초연이 있을 때면 일생을 극장에 몸담은 극장의 배우-원로들을 잊지 않고 초대한다. 이번 초연에도 극장 원로들이 초대되었다. 그 중에는 관람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인기있는 공화국 공훈배우 박 마이야 상추노브나도 있었다. <여배우>연극을 보는 마이야 상추노브나에게는 배우로서 그가 걸어온 창작의 길이 새삼스럽게 떠 올랐다…

…마이야의 부모들도 원동에서 살았던 수많은 고려인들의 쓰라린 운명을 면치 못했다. 1937년도 늦가을에 그들도 짐차에 실려 낯설은 카자흐스탄에 오게 되었다. 그 때는 지명도 몰랐지만 우스토베가 강제이주된 불행한 고려인들의 첫 정착지였다는 것을 지금은 온 세상이 알고 있다. 강제이주 초기에 고려인들이 겪은 어려움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고려인들의 근면성과 완강성 그리고 지방주민들의 도움에 의해 생활이 차츰 자기의 궤도에 들어서기 시작했다.마이야의 아버지 박상춘은 원래 박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도스쩨니예> 꼴호스 (14호 거점)에서 한글을 가르쳐 주었으며 몇 년후에 한글반이 없어지자 경리강습을 끝내고 경리로 일했다. 박상춘의 정직성과 원칙성을 잘 알고 있는 꼴호스원들은 그를 당단체 비서로 선거했다. 그런데 불행이 뜻밖에 왔다. 갑자기 병석에 들어눕게 된 아버지가 46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신후에 가정의 모든 배려를 어머니가 지게 되었습니다 – 마이야 상추노브나가 이야기 한다 – 물론 우리들도 어머니를 힘이 자라는대로 도우려고 애썼습니다. 꼴호스 밭에 나가서 일하고 집에서는 방아도 찧고 여러가지 집안 일을 했지요. 꼴호스에서 일한 대신 우리에게 까를 내 주었는데 그것을 갖다주고 밀가루로 찐 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는 그 빵이 얼마나 맛이 있던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을이면 꼴호스가 현미를 몇 가마씩 내 주었는데 그것을 방아로 찧는데 온 식구가 동원되었습니다. 진짜 힘든 일이었습니다…꼴호스원들은 일만 꾸준히 한 것이아니라 한가한 시간을 문화적으로 보낼줄도 알았다. 저녁이면 꼴호스의 구락부에서 음악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마이야의 언니 쏘피야가 노래를 잘 불렀다. 무대우에서 언니가 노래를 부를 때면 어린 마이야는 관람석에 앉아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언니에 대한 긍지감을 느꼈다.마이야가 학교에서 공부할 때 모스크바재정대학을 필한 김 하덕 옐리쎄예위츠가 그 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여러가지 재능이 있는 그 교사는 우선 소인예술단을 조직하는데 신경을 많이 썼다. 그는 음악, 춤 그리고 모형체조 <아크로바찌까)도 가르쳤다. 얼마후에 예술단이 자라나서 그 단원이 거의 50명에 달했다. 합창단원만 해도 20명이 되었다. 이제는 마이야도 언니와 함께 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다. 뿐만 아니라 마이야는 우크라이나 춤 <불바>도 추고 모형체조 (아크로바찌까)에도 참가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마이야는 어릴적부터 무대를 알게 되었다…

-내가 처음에 손에 쥐게 된 악기는 삐오녜르의 바라반 (북)이었습니다. 삐오녜르들이 행진하면서 치던 그 리듬을 내가 아직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 마이야 상추노브나가 웃으면서 말한다.

1956년에 소피야 언니는 타스켄트 극장대학 조선과에 입학하였다. 마이야는 어머니를 두고 떠날수가 없어 향촌 꼴호스 유치원에서 일하면서 어머니를 돌보았다. 동시에 2학년반 학생들을 가르쳤고 때로는 하덕 옐리쎄예위츠가 무대에 올린 연극 장면에서 역을 놀기도 했다.

1960년에 극장대학을 필한 고려인 학생들이 고려극장으로 파견되었다. 그런데 한 학생이 가정사정으로 오지 못했다. 이 때 쏘피야가 극장장 조정구를 찾아가 동생 마이야의 이야기를 하였다. 마이야가 이렇게 25세에 극장에 취직하게 되었다.박 마이야 상추노브나는 자신을 행복한 사람으로 여긴다. 그것은 배우의 생활을 시작하는 햇내기 배우 마이야의 주위에 재능이 비상한 배우 일세가 있어 주어서 배우 연기의 기초를 젊은 배우에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무대의 여왕이라고 불리우는 카자흐공화국 인민배우 리함덕은 마이야의 후견을 맡아 연기와 무대언어를 배워주었다. 극장 예술협의회가 일년후에 마이야에게 춘향의 역을 맡긴데에는 리함덕 선배의 큰 공로가 있다. 마이야는 춘향의 역을 훌륭히 이행하여 선배와 예술협의회의 믿음에 보답하였다. 그리하여 박 마이야 상추노브나는 고려극장에서 2대 춘향으로 되었다. 그는 리함덕 외에 그를 항상 돌보아주고 배워 준 연성연,………정을 담아 이야기 한다.극장 지도부는 그 후부터 마이야에게 주로 주역을 맡겼다. 마이야 상추노브나는 <심청전>, 카자흐고전작품 <코싀-코르뻬스와 바얀 술루>, <견우와 직녀>, <산부처>, <애랑>, <양반전>, <애랑>, <강직한 여성>,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등 수다한 연극에서 주역을 놀아 관람자들의 절찬을 받았다. 마이야 상추노브나는 그 어떤 역을 놀던지 자신을 그 주인공의 립장에 세워 심혈을 다 쏟아넣는다. 그의 성공의 비결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1980년…고려극장은 <꼬블란다>와 <산 부처> 연극을 가지고 모스크바에서 있은 예술축제에 참가하였다. 바로 그 순회공연 과정에 마이야 상추노브나가 반가운 소식을 받았다 – 그에게 카자흐소베트사회주의공화국 공훈배우의 칭호가 수여된 것이다.

박 마이야 상추노브나는 역시 고려극장에서 배우로 근무하던 정 에두아르드와 결혼하여 아들과 딸을 낳아 자래웠다. 자식들이 부모의 직업을 계승하지 않았는가고 묻자 마이야 상추노브나는 웃으면서 이야기 한다:

-아들애 로지온이 네살이 되였을 때에 원동에서 혁명활동을 하다 총살당한 김-스딴께위츠 알렉싼드라에 대한 연극에서 아들의 역을 맡겼습니다. 거기에 감옥에 갇힌 어머니와 만나는 장면이 있는데 로지온이 살창을 막 흔들며 어머니를 빨리 보게 해 달라고 울던 일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우리는 로지온이 그 장면을 그렇게 그럴듯하게 놀것을 기대하지 않았거던요…

여러가지 사정으로 대학에서 학업을 끝내지 못한(오스트롭쓰끼 명칭 크슬오르다사범대학 통신과 3학년을 끝내고 중퇴하게 되었다) 마이야 상추노브나는 자식들이 고등지식을 소유도록 모든 조건을 다 지어주었다. 아들 로지온이 배우는 되지 않았지만 음악에 소질이 있어 먼저 쁘로꼬피예브 음악학교 (피아노과)에서 7년을 공부하고 다음은 차이꼽쓰끼명칭 음악전문학교에서 4년, 그 후에는 꾸르만가싀 음악대학 작곡가 학부를 필하였다. 그는 영화음악을 작곡하고 있는데 카자흐스탄작곡가동맹 맹원이다. 딸 리사도 쁘로꼬피예브 음악학교에서 7년동안 공부하였으나 음악을 전공하지 않고 고려극장에서 무용가로 일했다. 지금은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마이야 상추노브나, 젊은 배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지요?

-얼마전에 우리 극장이 아카데미야 칭호를 받은 소식을 듣고 저는 정말 기뻤고 긍지감을 느꼈습니다. 지금 극장에 젊은 배우들이 많은데 그 애들이 우리 극장 배우 1,2세대가 어려움속에 극장을 살려 나간 전통을 이어 나가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내가 한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배운다고 해서 다 배우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가 될 운명을 지니고 태여난 사람은 꼭 그런 소질이 있는 조금이라도 있는 법입니다. 그러니 카자흐스탄의 구석구석에서 그런 젊은이들을 찾아내어 재능있는 배우로 키워 극장의 역사를 더욱 빛내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우리 극장 85주년의 해에 극장에서 근무하는 모든 직원들에게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며 새로운 창작으로 관람자들을 기쁘게 하리라고 믿는 바입니다.  

 

                              남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