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 신문사에 오신 손님은 자연 및 사회학 국제과학원  모스크바지사 정회원, 철학박사, 교수, 카자흐공화국 공훈일군, 카자흐스탄공화국 인민교육 특수자 한 구리 보리쏘위츠이다. 그에게는 15개의 국가표창이 있고 네명의 딸의 아버지이고 아홉명의 손자의 할아버지이며 증손이 네 명이 된다.

그가 졸업시킨 제자들이 나라의 가장 우수한 전문가들이라고 할 때는 바로 구리 보리쏘위츠를 념두에 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청강생들이 그의 생동력있고 내용깊은 강의를 들었는가 지금 그 누구도 정확히 말하지 못할 것이다. 한 때 구리 보리쏘위츠는 카자흐스탄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주도적 강사였다. 나라는 그에게 알제리, 이집트, 일본, 헝거리, 독일민주주의공화국, 독일연방공화국, 미국, 한국에서 과학강의를 할 업무를 맡겼다. 그것도 쏘련시대에(!).

-구리 보리쏘위츠, 달력에 감사의 날을 정할데 대한 대통령의 정령이 박사님께 있어서는 어떤 의의가 있고 적절한가하는 질문이 적합하지 않을 테지요? 박사님은 이런 날이 3월 1일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꼭 온다는 것을 확신하였지요?

-물론이지요, 우리 모두가 즉 고려인들, 독일인들과 체첸인들, 둔간인들 기타 소수민족들이 운명에 맡겨저 각이한 시기에 카자흐스탄에 오게 되어 우리가 살아남은데 대해 카자흐인민에게 항상 감사합니다. 우스토베와 우랄쓰크에 카자흐인민에 감사를 표하는 기념비를 건립한 것이 이것을 확증하여 줍니다. 또한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 남부카자흐스탄 분회의 발기에 의해 이런 감사의 기념비를 심껜트에도 건립할 계획입니다. 내년에 우리는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거주 8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강제이주민들을 태운 첫 열차가 원동에서 카자흐스탄으로 온지 거의 80년이 되었습니다. 카자흐스탄은 고려인들에게 있어 고향땅으로 되었습니다. 우리 부모들과 우리들 그리고 우리의 자식들과 손자들, 증손자들이 다 카자흐인들에게 감사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때문에 카자흐스탄에서 감사절이 제정된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역사에는 농사를 짓고 자기 가족들의 생활에 대해 배려하는 보통 사람들의 비극과 그들에 대한 불공평성의 페이지가 많습니다. 스탈린과 몰로또브가 서명한 1937년도 결정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정권에 대한 울분도 있을테지요?

-결정에는 연해주의 11개의 지역에서만 2만명의 고려인들을 강제이주시킬데 대한 말이 있었는데 지방 정권이 지나치게 노력한것입니다. 결과 연해주에서 9만 8천명의 고려인들이 강제이주되었습니다. 물론 카자흐스탄이 이주민들을 받을 준비를 했지만 그렇게 많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새 고장에서 이주민들의 문제는 계절이 늦가을이였고 또 이주민들이 빈손으로 떠난것으로 더욱 심각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모든 것을 다 받을 것이라고 고려인들을 설득시켰습니다. 고려인들은 자래운 농산물도 다 버리고 차에 올랐습니다…

나는 더욱 더 먼 역사로 되는 30년대를 자주 회상합니다. 30년대에 카자흐인들 자신이 심한 기아를 겪었습니다. 결과 몇백만명의 카자흐인들이 굶어죽었습니다. 그들이 이 불행을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고려인들과 마지막 빵조각을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불가사의한 초원의 엄혹한 조건에서 지내게 되었지만 대신 너그러운 심정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세기를 내려오면서 카흐인들의 전통으로 된 손님후대에 의해 고려인들이 살아남았습니다.

나는 또 1997년을 자주 회상합니다. 그 때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 회원 근 4천명이 모인 공화국 궁전에서 누르쑬딴 아비세위츠 나사르바예브 대통령이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 정주 60주년과 관련하여 모인 사람들을 환영하였습니다. 대통령은 그 시기를 옳게 평가하면서 고려인들이 역사의 먼지가 되지 않고 카자흐스탄의 정치, 경제 및 문화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고려인들이 일하지 않는 분야가 없습니다.

실지에 있어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 인민경제의 모든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저명한 학자들, 변호사들, 경제사들이 있습니다. 고려인들은 극장의 무대와 올림픽 경기에서 카자흐스탄을 찬양하며 세계의 다른 나라들에서 카자흐스탄을 대표하면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성실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울분이 없는 또 하나의 원인은 우리가 카자흐스탄에서 조국을 얻음으로하여 우리 자신이 큰 발전의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근면한 고려인들은 많은 것을 배웠으며 많은 성과를 달성했습니다. 그당시 까라딸 구역에 고려인 경리 20개가 있었습니다. 아시다 싶이 고려인에게 땅과 물만 주면 수확을 길러내거던요. 바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기전에 상기 경리들이 알곡, 벼, 사탕무우의 기록적 수확을 자래워 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친절한 접대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고려인들은 놀라운 결과를 달성했습니다. 까라딸구역에만 해도 사회주의노력영웅이 26명이였는데 그중에서 고려인들이 23명이었습니다.

카자흐스탄으로 오기전에 고려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습니까? 벼와 야채를 자래우고 물고기를 잡았지요…그런데 지금은? 그러니 고생끝에 행복을 얻은 셈입니다. 현재 우리에게는 국립고려극장이 있고 공화국에서만이 아니라 구쏘련에서 가장 오랜 신문이 있습니다. 공화국 국회에도 고려인들이 있습니다. 보시다싶이 우리에게는 카자흐스탄에 감사의 말을 할 동기가 있으니 <감사절>에 꼭 그 말을 할것입니다.

-구리 보리쏘위츠, 박사님은 항상 시대의 맥박을 짚고 있었지요. 나라의 주도적 대학 교사들이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들의 정주역사와 연관된 책들을 발행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역사학자, 철학가, 정치학자로서 고려인 소수민족의 발전에 지워버릴 수 없는 자취를 남겨놓은 사건을 짚어주었으면 합니다.

-그런 사건이 적지 않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 고려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누구인가?> - 이런 질문을 자주 하게 됩니다. 임의의 소수민족 대표와 마찬가지로 고려인들도 모국어, 문화, 전통에 대한 지식으로 특징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1990년 3월 17일에 있은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의 첫 대회가 기억에 또떠 오릅니다. 이런 대회가 10-15년전에 불능했습니다. 나를 민족주의자로 몰았을 것입니다! 민족별로 대회를 누구도 소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회가 있은후에 이런 포룸을 모든 민족센터들이 소집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각자가 개별적 소수민족 대표로 자신을 내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 민족이 살고 있는 우리의 다민족 나라에 한해서는 이것이 발전과 번영에 협조합니다.

-3월 1일을 어떻게 맞이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면에서 우리에게 좋은 실례가 있습니다. 제가 고려문화센터 위원장으로 있던 1993년에 우스토베에서 우리의 첫 열차를 받아들인 카자흐인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명절을 조직하기로 했습니다. 이 행사에 꼼꼼히 준비했지요. 그 때 지방 정권기관만 아니라 주카자흐스탄 한국대사도 우리를 지지하였습니다. 대사는 우스토베시 중앙거리들, 경기장 수리에 금액을 지불하였고 가장 우수한 공연참가자들에게 좋은 상금도 주었습니다.

먼 1937년도 가을과 같이 기관차의 고동소리가 행사시작을 알리었습니다. 나사르바예브 대통령의 축사 (녹음)가 먼저 울렸습니다. 다음은 한국 …………축사가 있었습니다. 온 주민들이 다 행사에 참가하여 지난 어려운 시기를 회상했습니다. 고려극장 배우들의 훌륭한 공연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행사는 카자흐스탄 땅에 사는 모든 소수민족 대표들의 친선의 명절로 되었습니다.

-무엇이 추억에 남았습니까?

-우리 가족이 운이 좋았습니다. 이주민들의 첫 열차가 왔을 때는 시월이였습니다. 내 나이가 일곱살이였는데 차를 타고 거의 한달동안 온 후에 카자흐인들이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카자흐인들의 민족의복, 시장에 쌓인 참외, 햇빛이 쪼이는 날이 나의 기억에 남았습니다. 몸이 쇠약해진 사람들과 노인들, 어린이들은 마차에 태우고 나머지 고려인들은 걸었습니다. 초원에 군데군데 말뚝을 박았는데 말뚝을 박은 곳 마다에 몇 가정씩 남았습니다. 말뚝이 수십키로미터로 늘어섰습니다. 임시 숙소를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땅굴에서 살던 일도 나의 기억에 남았습니다. 학교를 다음해 학년도에 건설하여 우리가 1938년도 가을에 학업을 시작했습니다. 우리 꼴호스는 부유하였으며 가장 높은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고려인 사회주의노력영웅이 9명이었습니다.

-구리 보리쏘위츠, 당신이 유능한 강사, 선전원, 선동원, 교육가로 되었는데 그 어떤 제한을 느끼지 않았는지요? 이를테면 박사님의 세대가 다른 나라들에 사는 동포들을 적게 보게 된 것이 직업에 영향을 주지 않았는가 하는 말입니다.

-나는 카자흐스탄을 대표하여 아프리카, 일본에 갔었고요 한국을 열세번이나 다녀왔습니다. 알제리도 갔댔습니다. 물론 우리는 항상 불편한 질문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왜냐 하면 그 전날에 반쏘행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불친절하고 때로는 노골적인 적의를 모두가 다 이겨낼 수 있은 것이 아닙니다.

알제리에 갔던 일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먼저 우스베키스탄에서 온 대표가 발언하고 고개를 숙인채 연단에서 내려섰습니다. 다음 나에게 언권을 주었습니다. 나는 항상 임의의 강당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사실들을 이야기 하였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방법을 이용했는데 역시 한가지였습니다. 그러자 나는 <카자흐스탄 영토가 프랑스의 여덟배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강당이 활기를 띠었습니다. 다음은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던지 감탄하면서 받아들였습니다. 왜냐 하면 그 곳 청강생들은 모든 것을 프랑스의 척도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보다 여섯배가 더 큰 나라가 있다니!

-다른 나라에서는 기억이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일본에서 <카부끼>극장에 감탄했습니다. 그 극장에서는 여자의 역을 비롯하여 모든 역을 남자들이 이행합니다. 독특한 배우일단이지요. 일본에서는 이전에 여배우들을 무대에 올려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놀랄 일이 아니고 남자배우일단과 같은 여배우일단을 조직한 것입니다. 여배우들은 남자의 역을 줄것을 단호히 요구했습니다. 아마 평등권을 증명하기 위해 그랬던 것 같습니다.여성들은 그들의 권리가 이미 오래전부터 제한되였으며 그들의 기예를 이용하지 않는다고 간주하는 모양입니다.

-아마 박사님을 민족성에 주목을 돌리지 않는 분으로 간주하겠지요? 왜냐 하면 박사님께는 민족주의, 가정주의, 동향인 모임과 같은 견해가 없기에 말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간주합니다. 더군다나 우리가정은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화목한 가정입니다: 저의 사위들 중에는 카자흐인,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 그리고 물론 고려인이 있습니다. 민족소속이나 물질적 수준을 보고서가 아니라 인간의 품성을 보고 사람에 대해 판단해야 한다고 간주합니다. 직업에 대해 말한다면 그 사람의 실무능력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한 답을 듣고 싶은데요, 박사님은 고려인인데 자신을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으로 느끼십니까?

-그런 질문에 저의 답이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저에게는 고려인의 심장이 고동치고 쏘베트 사람의 마음이며 사고방식을 보아서는 국제주의자입니다.

 

                    진 따마라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