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박사, 교수, 카자흐스탄민족회의 위원, 카자흐스탄공화국 과학원 사회학 및 인문학 감정위원회 위원,  <카자흐스탄 역사>교과서,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역사>서적, 200여가지의 과학논문과 20개의 모노그래프 저자이고 이름있는 사회활동가인   강 게오르기 와씰리예위츠 학자의 이름은 구 쏘련 공화국들에서는 물론 외국에서도 널리 알려저 있다. 그의 과학논문과 서적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미국을 비롯하여 기타 나라들에서도 번역되었다.

강 게오르기 와씰리예위츠가 이런 탁월한 학자가 되기까지는 어려운 아동시절도 있었고 순탄치 않은 생활의 길도 걸어야 하였다. 강 박사는 그가 석학이 된 것은 그에게 대해 배려를 돌려준 부모의 공로도 적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강 게오르기 와씰리예위츠의 부모의 운명도 그 언젠가는 살길을 찾아 정든 고향을 등지고 러시아 원동에 자리잡은 많은 조선사람들의 운명과 별 차이가 없었다. 하바롭쓰크 변강의 유태인 자치구에 인이란 역이 있었는데 이 곳에 다수로 고려인들이 거주하였으니 인-꼬레이쓰끼라고도 불렀다. 그의 할아버지는 여름에는 농사를 짓고 겨울에는 사냥을 하여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 그런데 1937년도 가을은 고려인들의 평화로운 생활을 깨뜨렸다…

할아버지네 가족은 카자흐스탄의 미르소얀 (현재 타라스)시에 실려왔다. 이 때 게오르기 와씰리예위츠의 아버지의 나이가 13세였다.할아버지네 가정에는 자식이 10명이었다. 후에 강박사는 그당시 어려웠던 생활에 대해 아버지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자식이 열명이였으나 그 시기에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상상하겠지요…솜저고리 (푸파이까)나 갈로시가 모두에게 있은 것이 아니니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아이가 그걸 입고 학교로 가면 다른 아이는 입을 웃옷이 없어서 학교를 가지 못하군 했답니다. 기가 막힌 일이지요, 상상만 해도 가슴이 죄입니다. 게다가 제대로 먹기나 했겠습니까? 때문에 여러가지 원인으로 자식 네명을 잃었답니다.

이런 곤난한 생활에 대해 아버지의 사촌형이 학교에서 이야기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가 18세 되던 생일날에 <검은 까마귀> (내무인민위원부 승용차)가 와서 사촌형을 어디론가 실어갔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수색을 두려워 하여 집에 있던 드문 책들 (지금 그 책들이 아마 귀한 골동품으로 되였을 것이다)을 터밭에 내다 다 불에 태워버렸다. 그 책들은 주로 민간요법에 대한 것이었다.

<업친데 덮친다>는 격언이 있듯이 또 새로운 불행이 닥쳐왔다. 위대한 조국전쟁이 시작된 것이다…사생활의 모든 어려움은 뒤로 젖혀지고 승리를 앞당기기 위해 헌신적으로 일해야 하였다.

-저의 부모도 전쟁시기에 한몫 기여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1942년에 노동전선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려인들을 전선에 보내지 않았다)에 동원되어 뚤라부근의 쑈끼노 광산에서 독인군 포로들과 함께 일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바르나울 군수공장에서 포탄을 연마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난후에 어머니를 장려하여 알타이사범전문 학교로 파견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교원의 직업을 전공했습니다. 그후 어머니는 30년간 교편을 잡았습니다. 전쟁이 끝난후에도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계속 광산에서 일을 시킨 것이지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간염으로 앓아 사망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광산에서 도주하여 석탄이 실린 짐차에 숨어서 사람들의 눈을 피하면서 겨우 집에까지 당도했답니다 – 게오르기 와씰리예위츠가 이야기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노동전선에서 돌아온후 동카자흐스탄주 차야놉쓰끼구역 바이잔싸이 광산에서 굴진공으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바이잔싸이 부락에서 미래의 학자가 태여났다…

아버지는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중학을 졸업할 무렵에 아들로 하여금 의학, 생물학 서적들을 많이 읽게 하였다. 그러나 게오르기의 꿈은 역사였다. 그래서 하루는 부친과 솔직한 담화를 하기로 하였다.

-아버님, 내가 원하는 바는 의학이 아닙니다. 나는 역사를 좋아하니 역사학부에 입학할테요 – 이렇게 말하는 게오르기는 지금 아버지가 호통을 치리라고 생각했는데 기대하던 바와는 전혀 달랐다.

-그래, 내가 보건대 네가 삐로고브가 되기는 다 틀렸으니 알아서 하거라 – 아버지가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게오르기 와씰리예위츠는 이렇게 역사와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대학에서 최우등 성적으로 공부한 그는 3학년부터 레닌명칭 장학금을 받았다. 이것이 그 때 수준에서는 적은 돈이 아니었으니 가정에는 보탬이 되었다. 1978년에 아바이명칭 사범대학을 최우등 성적으로  필한 그를 대학 행정당국은 이 대학에서 교사로 일할 것을 제의했다. 젊은 전문가는 물론 이에 동의했다. 게오르기 와씰리예위츠는 이 대학에서 36년동안 교편을 잡았다. 그후 역사학부장, 강좌장으로 일하였다.  

강 게오르기 와씰리예위츠는 교사로 일하면서 과학연구 사업에 몰두하였다. 1996년에 그는 박사학위를 받았다. 청소한 카자흐스탄국가의 역사교과서가 없는 조건에서 강 박사가 50페이지로 된 참고서를 발행하였다. 공화국 교육성의 승인하에 그 참고서가 5판으로 10만 부수가 발행되어 교육기관들에서 이용하였다. 이룩한 것에 만심하지 않는 강 박사는 대학들에서 이용할 카자흐스탄 역사교과서를 발행하기 위해 여러 나라와 지방을 다니면서 자료를 수집하여 2009년에 대학을 위한 카자흐스탄 역사교과서를 발행하였다. 게오르기 와씰리예위츠는 과학연구 사업을 하는 동시에 젊은 학자 양성에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총 10명의 학사와 박사를 양성하는데 기여하였다. 

…2015년 10월에 따라스시에서 카자흐스탄 한국 550주년에 즈음한 대 명절행사가 진행되었다. 이 행사에 카자흐스탄 국가 수뇌자 엔.아.나사르바예브도 참가하였다. 바로 이 날 강 게오르기 박사가 쓴 책 <위대한 초원의 역사>가 소개되었다. 이 책을 쓰기 위해 강 박사는 알타이, 따르바가따이, 쎄미레치예, 남부 카자흐스탄 주, 몽골 기타 지역을 출장다녔다. 잠불에서 기념행사가 있은 후 2개월이 지나 그에게 <꾸르메트>훈장이 수여 되었다.

-게오르기 와씰리예위츠, 앞으로 실천할 계획에 대해 몇마디 말씀해 주십시오.

-중요한 프로젝트들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우선 쮸르크 시대, 노마드 시대와 연관된 카자흐스탄 역사, 민족간 관계의 다인종 카자흐스탄 모델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합니다.

강 게오르기 교수가 창작한 <카자흐스탄의 역사>책 결론에는 아래의 글이 있다:

<역사는 이미 실현된 사실이나 사건이다. 거기에는 가정법이 없다. 역사는 여러가지 페이지를 담고 있다 – 거기에는 비참한 페이지도 있고 밝은 페이지도 있으며 쓰라린 페이지도 있고 기쁜 페이지도 있다. 그러나 이 페이지들의 글줄마다가 카자흐스탄 인민의 귀중한 재산으로 돤다…>

강 게오르기 와씰리예위츠 박사는 바로 이 재산을 하나하나 모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무더위와 추위를 무릅쓰고 이미 수년째 구쏘련과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 몽고와 기타 나라들의 고대 카자흐인들의 흔적이 있는 곳곳마다를 찾아 다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