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침략을 받기 전 중앙유라시아에는 다양한 종교가 존재했다. 메르브를 중심으로 하는 호라산에서는 조로아스터교가 가장 유력했지만,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와 야곱파 기독교, 그리고 소수이기는 하지만 유대교도가 존재했음이 확인된다. 과거 박트리아 영역에서는 에프탈과 사산조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불교사원이 존속했고 마니교와 기독교 신도들도 활동하고 있었다. 한편, 마 와라 알 나흐르(‘아무다리아강’과 ‘시르다리아강’사이의 오아시스 지역) 주민들은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했는데, 이 지역 조로아스터교는 사산조와 달리 토착적인 요소를 많이 담고 있었다. 

아랍 정복자들은 우리가 흔히 아는 것처럼 피정복민을 개종시키는 일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전개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앙유라시아의 농촌 지역은 정복 후 몇세기가 지난 뒤에야 주민들이 이슬람을 수용했다. 그러나 오아시스 도시 지역의 개종은 강제적으로 매우 신속하게 진행된 흔적이 확인된다. 

서돌궐이 멸망한 후 북방 초원 지대에서는 투르크계 유목 집단들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그들은 이슬람세계의 노예 공급원이었다. 이와 함께 오아시스와 초원 접경지대에서는 도시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이슬람을 수용하는 집단도 출현했다. 이들 무슬림 투르크인들은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편에 서서 이교도인 동족과 전쟁을 하고 노예를 약탈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한다. 한편 무슬림 상인과 수피(이슬람 신비주의자)들은 초원 깊숙이 들어가 활동했는데 유목민은 정주 문명의 상품과 새로운 종교의 매력에 이끌려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추세는 신속하게 변방으로 확대되었다. 볼가 강과 카마 강의 합류지 북쪽에 거주하던 불가르에 대한 정보는 10세기 초 처음으로 이슬람 사료에 나타나는데 이때 그들은 이미 이슬람을 수용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들에게 새로운 종교를 전해준 사람은 호라즘 출신의 무슬림 상인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투르크족의 이슬람화 현상은 중앙유라시아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카라한조였다. ‘카라한조’라는  명칭은 근대학자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이슬람 사료는 이 왕조를 아프라시압조 라고 부르고 있다.  이 왕가의 기원이 어떤 유목집단인지에 대해서는 이론이 분분할 뿐 아직까지 정설이 없다. 840년에 몽골고원에서 위구르 지배가 붕괴된 후 돌궐지배 씨족인 아사나씨 계보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 카간을 칭하고 탈라스에서부터 일리 강계곡과 카슈가르에 이르는 지역에 새로운 부족 연합체를 형성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견해이다. 

오아시스 정주 지대의 투르크화

중앙유라시아 오아시스 정주 지대 가운데에서 동투르키스탄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훨씬 신속하고 철정하게 투르크화가 이루어졌다. 동투르키스탄 동부 지역의 투르크화는 840년 몽골고원의 위구르 제국 해체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서부 지역의 카라한조는 9세기 말 캬슈가르를 점령하고 이슬람을 수용한 후 11세기 초기에는 호탄, 그리고 중기에는 쿠차까지 지배영역을 넓혔다. 카라한조 영역 거주민들의 투르크화는 매우 급속하게 진행되었고 그 결과 11세기 후반에는 주민들이 투르크어로 대화할 정도였다고 한다. 

동투르키스탄의 오아시스는 비교적 규모가 작고 원주민 인구도 오아시스규모에 비례하여 그다지 많지 않았다. 또 이 지역에는 톈산의 율두스 계곡을 제외하면 규모가 큰 목초지가 거의 없다. 따라서 이곳으로 이주한 유목 투르크족은 일찍부터 오아시스 또는 그 주변에 정주하고 원주민과 융합되었다고 할 수있다. 

오아시스 원주민들은 새로운 지배자의 언어와 종교를 동시에 수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동투르키스탄의 이슬람화 과정은 오히려 완만하게 진행되었다. 여러 종교에 대해 동등한 입장을 견지한 몽골 제국 지배 시기에 특히 동투르키스탄 동부 지역에서 이슬람교는 오랫동안 불교와 공존했다. 

1420년에 티무르조의 샤 루흐가 명나라의 영락제에게 보낸 사절단은 투르판 주민 대다수가 불교도이고 그곳에 훌륭한 사원이 존재하며 모스크와 불교 사원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동투르키스탄에 비하면 서투르키스탄, 즉 지금의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의 투르크화 과정은 좀 더 복잡하다. 이 지역은 오아시스 규모도 크고 따라서 주민 수도 많고 오아시스 사이에 유목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서투르키스탄으로 유입된 투르크계 유목민이 유목생활을 하면서 오아시스 사이의 초원에 머물러 있는 한 원주민과의 접촉 정도는 상대적으로 드물었을 것이고 따라서 원주민의 언어적 투르크화 과정도 완만하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어 몽골 정복과 함께 새로운 유목 집단(대다수는 투르크게이고 몽골인은 오히려 소수이다)이 서투르키스탄으로 유입되었다. 그들은 몽골제국시대부터 티무르 제국시대에 걸쳐 한편으로는 부족 조직에 소속된 전사 계층의 성격을 유지하면서 정주화의 길을 걸었다. 이와 함께 그들은 더욱 더 페르시아적 이슬람 문화에 동화되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투르크어를 문화언어로 다듬어 중앙유라시아 투르크족이 공유하는 공통문어(차가타이어)를 발전시켰다. 

정주화한 투르크계 유목민과 원주민의 융합이 본격화되고 동시에 원주민 사이에서도 투르크어 사용이 확대되는데 특히 도시에선 두언어를 함께 사용한 사례가 점점 일반화되어갔다. 

이렇게 하여 서투르키스탄의 정주민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가에 관계없이 대체로 똑 같은 형질적 특징과 문화를 공유하게 되었다. 호라즘, 페르가나, 타슈켄트 주민은 ‘사르트’라 일컬어지고 대체로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두 언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마 와라 알 나흐르 의 주민은 ‘타지크’ 또는 ‘차가타이’라 칭해지고 대부분 페르시아어를 사용했지만 두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나 투르크어를 모국어로 쓴 사람도 있었다. 1924년 소비에트 정권에 의해 실시된 이른바 ‘민족의 경계 획정’은 1민족 1언어 원칙에 입각하여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힘으로 부정한 사건이다. 지금의 중앙유라시아 투르크계 국가들의  언어적 투르크화 과정은 바로 이때 최종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김상욱(유라시아고려인연구소장, 한인일보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