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호의 계속)

 

지지난주 필자는 중국의 우룸치에서 이닝을 거쳐 카자흐스탄으로 넘어오는 손님들을 마중하러 호르고스를 다녀왔다.  신실크로드 물류현황을 직접 둘러보기 위해 상하이에서부터 길을 나선 이들은 우룸치와 이닝을 지나 차를 타고 호르고스로 들어온 것이었다. 필자는 이들에게  카자흐스탄의  ‘누를르 졸(신 실크로드)’ 정책에 따라 건설되고 있는 도로와 철도 등 교통 인프라 공사 현장을 보여주면서 현장 책임자와 정책 입안자들을 두루 만나게 해주었다.  대신 그들로부터 최근 중국 대도시에 대해 재밌는 얘기들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알마티와 가까운 우룸치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는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필자가 관심을 갖고 있는 위구르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해들은 우룸치 소식은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CIS지역을 향한  물류 발진 기지 또는 이 지역을 상대로 하는 국제무역도시로서의 면모가 많이 위축되었다는 얘기들 뿐이었다. 카자흐스탄과 러시아 손님들로 넘쳐나던 우룸치의 국제시장은 상인들이 줄어들어 한산해졌고 문을 닫은 가게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는 말을 듣고 보니 오히려 이곳의 불경기가 어느 정도인지 피부에 와 닿았다.

한편, 우룸치 시내 거리에는 재작년 4월 30일 80여명의 사상자를 낸 우룸치 기차역 폭탄테러 등의 영향으로 인해 중국 군경의  경비가 삼엄하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북방 유목민이었던 위구르족이 선조들의 생활방식을 버리고 오아시스 농경민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었던 비옥한 투르판 분지를 포함하고 있는 곳이 졸지에 ‘중국의 화약고’로 불려지고 있는 것이었다.   이 땅이 왜 ‘중국의 화약고’로 불리우는지 찬찬히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톈산위구르 왕국의 탄생

‘위구르’족의 선조는 바로 유라시아 초원에서 유목을 하던 고차족이다.  이들은 바이칼 호 남쪽 협곡과 예니세이강 일대에 사는 알타이계 유목민족이었다. 이들은 약간의 농업과 예니세이강 유역의 풍부한 철광석을 바탕으로 금속문화를 발달시켰다. 이후 흉노에 복속되어 무기를 제공하였으며 돌궐의 지배하에 있던 위구르는 처음으로 중국의 사서에 바이칼 남쪽 지역의 1만여호의 작은 부족으로 기록된다.

위구르 왕국의 유래는 유목 세력의 오아시스 지배라는 과정을 밟지만 오사이스에 완전히 정착한 점은 이전의 유목민과 큰 차이가 있었다. 중앙아시아 동부의 투르크화는 이와 같이 유목민의 정주화를 의미했다. 그들은 다시는 고향인 초원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점차 유목적 성격을 잃고 정착 농경사회로 탈변한 위구르 제국은 결국 군사력이 약해져서840년 다른 터키계 민족인 키르기즈(Kyrgyz)에 의해 멸망한다. 위구르 제국이 멸망하자, 위구르의 유민들은 간쑤, 신장, 톈산 산맥 서쪽 추이 강 유역으로 이동해 정착하였다. 

톈산 위구르 왕국은 오아시스 도시와 농촌을 사회적 기반으로 하여 성립되었다.  위구르 왕족들은 베슈발리크 주변에서 말떼를 기르며 기마민족의 풍모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오아시스에 관개시설을 만들고 성내에 많은 누대를 설치하여 공예 장인을 고용하기도했다. 왕국의 중심지였던 투르판 분지에는 예로부터 풍요로운 오아시스로 유명하다. 곡물은 메밀을 제외하고 오곡이 두루 갖추어져 있었고 이모작도 가느했으며 포도를 비롯한 과일과 면화, 참깨가 풍부한 것도 현재와 다르지 않았다. 

징기스칸제국 형성에 공헌하다

위구르인들은 식자 능력 함양은 중앙아시아 복합 문화가 집대성되었음을 말해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위구르인들은 이전에 볼 수 없을 정도로 타림 분지 오아시스를 통합시켰다 . 그 결과 소그드인을 대신하여 위구르인이 스스로 동서교역의 당당자로 등장했다. 이 방면에서도 위구르인의 식자 능력은 큰 힘을 발휘했다. 텐산 위구르왕국은 10세기 후반부터 몽골 고원으로 진출한 거란과 그에 대항한 송나라의 동향을 살피면서 무역활동에 매진했다.

몽골고원에서 징기스칸이 흥기하자 위구르 왕 바르추크 알트 티긴은 스스로 몽골에 복속했다. 그는 1209년부터 1211년에 걸쳐 사절이 왕래하는 동안에 이르티쉬 강 방면에서 칭기스칸의 숙적 메르키트족의 잔당을 토벌했으며, 카라 키타이의 대관을 살해하고 칭기스칸에게 귀순하여 왕국의 운명을 보존하는데 성공했다. 바르추크는 칭기스칸의 딸 알알툰을 아내로 맞이하고 스스로 그의 다섯째 아들이 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몽골제국형성 초기에 위구르와 몽골 양쪽에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위구르 왕의 지위는 14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명목상 변함없이 보존되었다. 즉 몽골과 원나라 황제는 역대 위구르 왕에게 이디쿠트의 칭호, 고차왕의 명의, 금인 또는 그 일부를 수여했다. 또 바르추크 외에도 몽골 왕족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는 왕이 확인되는데, 위구르인들에게 신흥 몽골의 군사력은 강력한 배경이 되었다. 

 한편 위구르 문화는 초원의 투르크계 집단에도 전파되었다. 몽골 초원 서부에 자리잡고 있던 나이만족의 타얀 칸 휘하에서 고문으로 봉사하던 위구르인 타타통가는 타얀 칸을 타도한 징기스칸에게 포로로 붙잡혔을 때 자신이 소지하고 있던 인새를 몽골로 가져왔다. 또 그는 징기스칸의 명령으로 왕자들에게 위구르어를 가르쳤다.  그 당시 몽골 정권은 문자와 정주지 통치체제를 갖추고 있지 않았고 따라서 위구르 문화는 몽골인들이 그 후 정주 지역을 점령하고 통치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버팀목이 되었다. 그런데다가 글을 아는 많은 위구르인들이 연이어 몽골 정권에 의해 등용되었다. 여러가지 이유로 몽골과 위구르의 집단적인 공생관계는 급속하게 진행되었으며 또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상호부조가 이루어졌다. 

(계속)

김상욱(유라시아고려인연구소장, 한인일보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