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 문화수집가로서의 조선시대 서양 외교관들)

조선 주재 외국인 관료 및 외교관의 ‘합법적’ 문화재 약탈

 

앞서 2편에서 프랑스 군대의 조선 문화재를 어떻게 전리품으로 수집해갔는지를 보았다. 그런데 서양인들은 무력적이고 강제적이 아닌 총을 들지 않고 점잖고 유화적인 방식으로 조선의 문화재를 대량 반출해갔다. 조선에 주재했던 조선 통상 무역관료 및 외교관은 지성을 겸비했고, 더구나 조선에서 신임과 명성을 등에 입고 조선사회로부터 전혀 의심받지 않고 그들의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었다. 

19세기 전후로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지배를 노골화하자, 서양 열강들 또한 청을 견제세력으로 이용하면서 경쟁적으로 한반도에 뛰어들었다. 조선에 무력행사를 불사하며 통상조약을 맺고 공사관을 설치하며 정치 외교적 형태로 치열하게 이루어졌다. 조선은 일본군과의1875년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개항을 하게 되었고, 물밀듯 들어온 조선주재 외국 통상기관 및 외교관리들은 공식적 정치적 임무 외에 가장 큰 관심거리는 한국에 대해 알고 문화유물을 탐색하는 일이었다.

 

 

조선관복을 입은 목인덕 (독일인 묄렌도르프)

 

그 대표적인 서양관료가 독일인 묄렌도르프(P. G. von Molendorff)였다. 1882년에 들어와 조선 최초의 외국인 고위관료이자 조선 고종의 외교고문이었던 그는,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그가 조선에서 큰 활약을 해줄 것을 기대하며 추천된 실력가였다. 그는 국제감각인 뛰어날 뿐아니라 언어학과 동양학을 전공하고 조선어와 중국어 언어에 능통하며 동양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다. 그는, 조선이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과 협상과 조약을 맺는데 조선의 입장을 대변하며 신뢰와 명성을 쌓았다.  그는  '목인덕'이란 조선이름으로 조선관복을 입고, 조선의 왕의 신임과 각종 특권을 부여받으며, 조선의 화폐주조기관의 장까지 맡으며 막강한 힘을 얻었다. 즉, 조선에서 외국과의 통상업무와 관련하여 좌지우지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그의 후원에 힘입어, 조선과 독일간 통상업무를 맡은 세창양행이라는 독일회사가 1884년에 개설되었다. 이 회사는, 독점적 지위를 누리며 조선에서의 정치적 입지를 굳혔으며, 독일 본국의 면세혜택까지 받았다. 1889년 함부르크의 산업박람회 그리고 1894년에 함부르크 미술공예박물관에 전시되었던 조선 골동품이 세창양행을 통해 독일로 건너간 것이었다. 그 증거는 1906년 5월 2일 독일의 박물관에서 조선 주재 독일 외교관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되었던 내용에서 볼 수 있다. 그 편지에는 어떠한 조선유물을 수집했으면 좋겠다는 수집 희망목록이 적혀있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 독일로의 수출품은 홍삼과 금, 토산품이 주를 이루었지만 이 품목들과 함께 조선 유물들이 함께 선적되어 독일로 빠져나갔던 것이었다. 조선통상관리의 일기를 통해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세창양행이 조선에 남아있던 130만매의 조선우표를 몽땅 매입한 적도 있었다. 

제물포(지금의 인천)개항과 동시에 세창양행 같은 한국이름을 가졌던 서양의 무역회사들이 있었는데 이 중 세창양행은, 가장 신뢰받았고 특히 조선여성들에게 질좋은 생활필수품으로 인기를 누렸다. 1886년 2월 22일자 한성주보에 한문으로 쓰여진 세창양행의 구입과 판매 광고내용을 보면 투명한 무역과 소매든 도매든 시세에 맞는 공정한 거래를 하고 있다고 선전하였다. 그러나 조선이 아직 눈을 뜨지 못했던 서양 자본주의의 기법으로, 조선의 어둡고 허술한 면을 이용했고, 합법도 아니지만 불법을 가늠하기 어려운 틈을 이용해서 그들의 목적을 달성했던 것이다.

또 다른 유명한 문화수집가는 프랑스인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였다. 그는 서양인으로서 한국고서와 귀중품을 체계적으로 가장 많이 수집한 주조선 프랑스 대리공사였다. 플랑시는, 두번에 걸쳐 13년간이나 한국에 근무하였고 1887년 한불 조약 비준서 체결을 주도하였으며,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대한제국이 참여하도록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그는 조선 사회에 대한 애정과 이해가 깊었고, 한국 무희와의 사랑도 나누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플랑시가 수집한 조선의 고서는 3821점이었고, 그 중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 문화재)”을 비롯해 불경 “육조대사법보단경”, 법률집 ”경국대전”, 시조집 “가곡원류”, 고전소설류가 있었다. 이 외에도 골동 서화, 나침판, 도자기, 토기 등을 수집했는데, 현재 프랑스 파리 등지의 천문대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고서 수집 방법은, 직접 노점, 서점, 사찰을 직접 찾아다녔다. 그리고 소문을 내서 가져오는 사람들의 책을 구입했는데, 책을 팔기 위해 공사관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또한 외교관 직위를 활용해 고종황제나 대신들로부터 왕실 간행책도 입수했다.

플랑시 곁에는 조선고서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한 동양학자이자 조선 주재 프랑스 공사관 통역관겸 서기관으로 근무했던 모리스 쿠랑이 있었다. 플랑시는, 쿠랑으로 하여금 조선의 기원에서부터 간행된 모든 책의 목록을 만들도록 했다. 쿠랑은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에 실력이 뛰어났으며 수집한 책을 기반으로,  조선 서지학(Bibliographie Coreenne, 3권으로 구성, 1896)을 발간함으로써 그의 조선에 대한 연구가 완성되었다. 쿠랑의 이 책은, 조선의 종이와 인쇄술, 언어와 문자, 역사, 사상, 종교, 문학에 이르기 까지 방대한 영역을 다루었다. 그는, 조선에 대해 해박한 지식인이면서 전문적 수집가였다.

 

쿠랑이 한국을 누비고 다녔던 1890년대 조선은 이미 개항된지 10년을 넘겨 외국인들이 눈에 띄게 많았을 때였다. 그에 의하면,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 물건을 찾지만 그들의 식견으로는 좋은 조선책을 알아보기 힘들고 관심도 없었다. 이유는, 많은 조선책은 조선에서 만든 것이 아니고 중국의 것으로 보았고, 더군다나 책이 한자로 쓰여졌기 때문이었다. 즉, 저작술과 인쇄술이 중국에 뒤쳐져있어 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쿠랑과 플랑시의 손에는 이미 조선의 금속활자본이 있었고, 쿠랑이 가장 주목했던 조선 유물이 금속 인쇄술과 조선 문자(한글)였다. 쿠랑은 그의 책을 통해 조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한국 정신의 명석함은 아름다운 서적의 인쇄,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자음 모음 문자의 완성, 최초로 고안한 활자에 나타나 있다. <중략> 한국의 역할은 극동 문화에서 대단한 것이었으니, 만약에 조선의 사정이 유럽과 비슷했더라면, 한국의 사상과 발명은 주변 모든 나라들을 뒤흔들어 놓았을 것이다.”

쿠랑은, 조선의 문명에 놀라기도 하고 비판도 하였다. 그는 조선의 양반이나 관료들을 보며 “옛 관습에 엄격하게 메여있는 자기 사상의 노예”라고 표현하며, 조선관료들이 외교업무에 대한 대처에서 얼마나 융통성 없고 답답한지를 토로하였다. 조선의 국권이 침탈 당할 위기에서도 조선 선비들은 공자왈 맹자왈을 읊으면서 명분론을 내세우는 것에 대해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서양인의 눈에는 이해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조선의 관료에 대한 이미지는, 비현실적 사상에 젖어 현실을 보지 못하는 ‘계몽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서양지식인의 동양수집에서는, 서양식 지식으로 무장하고 현장조사를 마다하지 않는 발굴의 열정과 치밀한 전략으로 대단한 성과를 올렸다. 이들은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는 무역의 목록에 포함시켰으며 어떠한 거래에도 ‘공정하다’는 이미지를 부각하며 신뢰를 얻었다. 그리고 조선과 조선인과의 친화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이들의 문화재 수집활동은 제제를 받지 않는 개인의 취미활동 쯤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서양 지식인들은, 그들의 조선 문화재 수집을 위해 자본주의식 가치의 가늠에 어두운 조선인을 이용했고, 수집이 공적 제도적 영역 밖에서 이루어졌고, 불법이 아닌 ‘합법적’ 수집활동으로 조선사회에서 물의를 일으키지 않았다.

명순옥

문화인류학 박사

 

알파라비 카자흐 국립대학교 동방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