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슬오르다에서 조선독립운동의 큰 거목인 홍범도 장군 탄생 150주년과 서거 75주년에 즈음한 기념행사가 있었다. 여천 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 회원 24명으로 이루어진 대표단이 한국에서 크슬오르다에 왔다.

 

대표단의 크슬오르다 방문은 홍범도 장군의 기념묘지에 화환을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단원들은 홍범도 명칭을 가지고 있는 거리도 돌아보았다.다음 전설적 영웅 홍범도 장군에 대한 과학-역사 컨퍼렌서가 있었다. 대표단 단장인 여천 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 홍성덕 부이사장은 150년전에 평양에서 태여났으며 75년전에 크슬오르다에서 생을 마감한 홍범도 장군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13년전 즉 2005 2 25일에 서울에서 홍범도 장군의 재단이 조성되었다. 이종찬이 재단장으로 선거된 후에 첫 홍범도 추모행사가 있었다.2005 7 6일 국가보훈처, 광복회, 재향군인회, 홍범 함대 팀의 지원하에 봉오동에서 홍범도 장군이 빛난 승리를 쟁취함과 관련된 전승기념행사가 진행되었다. 학자들의 참가하에 해마다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강연이 진행된다.

홍성덕 부이사장은 또한 홍범도의 생애, 조선독립운동에 한 그의 기여가 아직 완전히 해명되지 않았기에 이 면에서 사업이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홍범도기념사업회 황원섭 공동대표는 홍범도 장군을 조선독립을 위한 무장운동의 가장 우수한 지도자로 간주하고 있으며 홍범도는 <날으는 홍범도 장군>, <백두산 호랑이>로 알려져 있다고 지적했다.

홍범도 장군의 활동은 높은 역사적 평가를 받았다. 홍범도를 조선독립투쟁의 전설적 영웅으로 간주하는바 그에는 몇가지 원인이 있다. 장군은 3.1운동의 첫날부터 항일투쟁에 나섰다.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는 그를 이길 수 있는 적군의 전술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로, 홍범도는 평민 출신으로서 독립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지휘하의 동료들과 고낙을 나눔으로서 모든 사람들의 존경과 신임을 얻었다. 그는 인간성이 깊었고 영예를 찾지 않았다. 봉오동 전투를 앞두고 의병대가 최진동의 군대와 연합하였는데 그 때 홍범도는 최진동의 지휘하에 있었다.

셋째로 홍범도 장군은 참다운 애국자였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을 홍범도를 사회주의자로 만든 프로레타리 발전으로 해석하는데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체계적인 사회주의적 리론이나 사상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다. 홍범도 장군은 자기 조국의 애국자로서 민족반항 투쟁에서 앞서 나선 것이다.

넷째로 홍범도 장군은 빠르치산 전쟁 창시자이다. 하긴 이것이 전투작전의 전통적 학교로 되지 않았지만 그의 군대는 근위대원들과 사냥군들의 경험, 빠르치산전쟁의 지혜를 이용하면서 성과적으로 적군을 소탕하였다. 그의 부대는 특출한 지휘하에, 전술작전의 훌륭한 능력을 가지고 매번 승리를 땄다. 빠르치산 전술에 의해 적군의 가까이에 잠복하기 위한 유리한 가능성을 이용하여 뜻밖에 적군을 습격하였으며 지방주민들과 친근한 관계를 맺어 필요한 정보를 얻어냈다.

다섯째로 홍범도 장군은 부대로부터 독립군으로 넘어가는 전형적인 실례이다. 군인들을 교양하는 장군은 정의의 투쟁과 항일 정신을 군인들에게 심어주었고 전술작전의 실력과 사격술을 배워주었다. 이 모든 것에 대해 황원섭 공동대표가 컨퍼렌서에서 한 보고에서 지적하였다.

컨퍼렌서에서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 크슬오르다 주 고려인 사회연합 김 유리 회장, 크슬오르다 국립대 카자흐스탄민족의회 강좌장 아이트잔 오라스바꼬브가 역시 발언했다. 발언자들은 강제이주 시기에도 고려인들은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았으며 오늘 다민족 카자흐인민의 조화로운 일부분으로 되었다고 지적하였다.컨퍼렌서가 끝난후에 크슬오르다 고려인 소수민족 연합이 준비한 공연이 있었는데 그 과정에 홍범도 장군이 일제 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싸운 장면들을 모인 사람들에게 보였다.

박 제니스

 

       크슬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