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앞에는 황동훈 선생의 사진이 놓여 있다. 황동훈 선생과 그의 창작동료들이 연해주에서 <선봉>신문을 발간하기 시작했을 때는 내가 아직 세상에 태여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눈에 띠우지 않는 가느다란 실머리가 우리를 연결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상상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발간되던 신문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의 해인 1937년 가을에 페간된후 여러명의 재능있는 기자들이 체포되고 오직 농업부 부장 황동훈만이 탄압을 면하여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활자들을 크슬오르다까지 가져왔다는 사실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물론 그의 동시대인들의 입을 걸쳐 전달되었을 것이다. 바로 그 활자들이 신문사 재건의 기초로 되었다. 나는 39년후에 크슬오르다 <레닌기치>신문사에서 근무하면서 준엄한 1937년에 황동훈 선생이 목숨을 걸고 보존한 그 활자 또는 그것을 주조하여 만든 활자와 접촉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당시 신문사에서 근무하면서 인쇄소에서 일하는 채자직공들의 일을 도와 (채자직공이 부족한 까닭으로) 그 활자로 채자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공식문서나 신문기사 그 어디에서도 강제이주 전후의 신문사편집부 사업에 대한 기사를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일부 노인들의 기억과 증언에 따라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황동훈 선생의 자식들도 물론 어렸으니 별로 기억에 남은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봉> - <레닌기치> - <고려일보> 창간 95주년의 해에 황동훈 선생에 대해 회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막내 딸 황 예까쩨리나 다닐로브나를 찾아갔다. 예까쩨리나 다닐로브나는 주로 이모의 말을 듣고 아버지에 대해 얼마쯤 알고 있다.

-어릴적에 저를 메리라고 불렀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아버지가 독서에 그렇게 열중했답니다. 그래서 마음에 든 여주인공의 이름을 딸들에게 주었데요, 그래서 나는 메리가 되였지요. 그런데 학교에 입학할 무렵에 할머니집에서 살았는데 학교에 나를 데려가 제대로 등록시킬 어른들이 없었어요. 그 때 이웃에 사는 약빠른 남아이가 나를 등록시켜 주겠다고 데리고 가는 도중에 <야, 그런데 메리가 뭐야, 그 이름을 이젠 버리고 까쨔라고 하자> -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학교에 까쨔로 등록하고 그 때부터 까쨔가 되었습니다 – 예까쩨리나 다닐로브나는 먼 아동시절을 회상하면서 이야기 하였다.

강제이주의 사연을 세살짜리 어린애가 모르는 것은 물론이다. 철이 들어 이모의 이야기를 듣고 알게된 바에 의하면 친척들이 다 흩어져서 각각 다른 날에 차에 올랐다. 그래서 먼저 가는 사람들이 차가 정지하는 곳마다에 돌이나 어떤 건물이나 집의 벽에 <우리가 이 역을 지나갔다>고 쓰고 이름을 보탰다. 뒤에 오는 친척들이 앞에 간 친척들이 어느 역을 경유했는가를 알도록하기 위해서이다. 예까쩨리나가 들은 바에 의하면 아버지는 아주 책임감이 높은 사람이였다. 강제이주된후 몇 개월이 지나 친척들을 다 한곳에 모았다. 물론 자기 집에도 받아들였다.

그런데 불행이 뜻밖에 왔다. 1938년 6월 26일에 황동훈이 체포되었다. 아버지가 체포된후 몇 달이 지나 어머니가 돈벌이를 하러 우스베키스탄으로 간다고 하면서 까쨔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떠나 버렸다.

-원래 나는 어머니에게서 설음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모의 말에 의하면 왜서인지 나를 미워했데요, 키도 크고 잘못생겼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렸을 때 마치도 사람들에게서 감추듯이 커텐뒤에 눕혀놓았대요. 그러면 아버지가 퇴근하고 집에 들어와서 <우리 공주를 왜 이렇게 감춰둡니까?>고 웃으면서 나를 안아 주었답니다 – 예까쩨리나 다닐로브나가 말했다.

날이 가고 해가 가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몇번 면회를 가기도 했다. 그럴때면 황동훈은 <걱정마오, 나는 당 앞에서 잘못한 것이 아무 것도 없소, 곧 풀려나갈 것이요…> - 이렇게 안해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남편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까쨔는 아버지의 운명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까쨔가 알마아타 <뻬르워마이쓰까야>피복공장에서 일할 때였다. 공장 당단체는 모범일군인 그를 당입후보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행방불명이 된 것이 문제였다. 당비서는 속히 수소문을 해 보라고 했다. 활동력이 있는 이모가 수소문을 시작했는데 몇 개월이 지나 알마아타시 국가안전위원회로 초대하는 것이였다. 당번 안전원이 고문서에 보관되었던 서류철에서 서류 한 장을 깨내여 보였는데 거기에는 황동훈이 1938년 6월 26일에 총살되었다고 적혀있었다. 이모의 말에 의하면 그 명단에 고려인 여러 명의 성명이 적혀있었다고 하였다. 

예까쩨리나 다닐로브나는 아버지가 아무 죄없이 그렇데 억울하게 총살당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모스크바로 편지를 써서 수소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온 답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즉 감금되여 있던 황동훈을 우흐따 노동전선에 보냈는데 거기에서 힘겨운 노동을 하다가 1943년 11월 17일에 결핵병에 걸려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이 두가지 답중 어느 것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인테리인 아버지가 거의 굶으면서 중노동을 하게 되니 이겨내지 못하고 사망했다는 말도 옳을 수 있는 것 같구요 또 다른 편으로는 정권이 똑똑한 고려인 인테리들을 체포하여 일제의 <간첩>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 식은죽 먹기였다고 하니 총살당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두가지 서류에 날자까지 적혀 있고요, 하여튼 나는 아직까지도 확실한 입장을 잡지 못하겠습니다 – 예까쩨리나 다닐로브나가 유감을 품고 말한다.

예까쩨리나의 아버지와 같은 비극적 운명을 지녔던 사람들이 모두 후에 명예가 회복되었으니 결국 예까쩨리나는 입당했다. <뻬르워마이쓰까야> 피복공장에서 근무하는 과정에 그는 사회사업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고 선진재봉사로 손꼽히였다. 

상기 피복공장에서 9년을 일한 예까쩨리나는 부득이 직장을 바꾸게 되었다. 그것은 아들이 학교만 다니는 것이 아니라 무용스투디오도 다니고 음악도 배우니 세 교대로 작업하는 피복공장에서 계속 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까쩨리나는 그 시기에 이르러 신설된 의상 모델 회관에 취직했다. 6년동안 실험직장에서 재봉사로 일했는데 여기에서는 주로 개인 주문을 받았다. 예까쩨리나의 재봉실력을 잘 아는 지도부는 그에게 모형 설계 및 제작 직장을 맡겼다.

-아들애는 어떻게 되여 무용과 음악에 소질이 있었거던요. 그래서 알마아타 깔리닌쓰끼 구역 삐오녜르 회관 크루쇼크에 다녔습니다. 마침 회관의 재봉사가 퇴직하여서 나는 오래 생각지 않고 즉시 그 곳으로 전임했습니다. 그러니 아들애를 내가 데리고 다닐 수 있게 되였지요. 나는 재봉을 좋아했기에 아동회관에서 재봉사로 일하기가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아이들의 각종 행사에 필요한 의상을 깁는 것은 창작적 태도를 요구합니다 – 예까쩨리나 다닐로브나가 이야기 한다. 

바로 이 창작의 활동무대가 예까쩨리나의 마음에 들었다. 상기 삐오녜르 회관의 예술단원들은 공화국에서 명성을 떨쳤다. 그들은 여러 콩쿨에 참가하여 항상 수상자로 나섰다. 예까쩨리나의 아들 월로자가 중학을 졸업할 때까지 이 예술단에 소속되여 있었다.

…우리는 취재과정에 책상위에 있는 작은 드레스 두 벌을 보았다. 우리가 할 질문을 눈치챈 예까쩨리나 다닐로브나는 손녀들에게 주려고 기웠다고 하였다. 할머니의 애정이 담긴 고운 옷들이였다.

-예까쩨리나 다닐로브나, 당신네 가정은 비극적인 생의 길을 걸어왔는데 자신이 몇 명의 손군을 둔 오늘에 와서 무엇을 원하시는지요?

-우선 우리 아버지를 비롯하여 고려인들이 겪은 무서운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말고요, 가까운 사람들이나 친척들이 헤여지지 말며 자라나는 세대가 항상 맑은 하늘 아래에서 살것을 바랍니다.

남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