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한 세기의 역사를 가진 <선봉> - <레닌기치> - <고려일보>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면 며칠이 필요할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주인노릇을 하던 원동에서 1923년에 창간된 첫 '선봉'신문은 마치 송곳방석에 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 편안할 때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던중 1937년에 일본간첩으로 의심을 받던 고려인들이 스탈린 강제이주 정책으로 하여 몽땅 화물차에 실려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의 기타 지역으로 오게 되었다. 이에 앞서 재능있는 기자들도 여러명이 체포되어 행방불명이 되었다. 농업부 부장 황동훈이 활자들을 궤짝에 넣어 숨겨서 크슬오르다까지 가져온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신문을 계속 발간하기 위해 많은 고려인 인테리들이 당기관을 드나들어 결국 1938년에 크슬오르다시에서 <레닌기치>로 개칭되어 발간되기 시작했다. 1978년에 신문사가 알마티로 이주하여 왔다. 나는 오늘 신문사에 취직하여 일하던 기간의 한 토막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한번은 우연히 알마티시내 야시장에서 리 꼰쓰딴찐 야꼬블레비츠 (리춘근 선생)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좀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신문사에서 기자로 근무하던 꼰쓰딴찐 야꼬블레비츠는 나와 잠간 담화하는 과정에 <크슬오르다에서 알마티로 신문사가 이주해 왔는데  신문사에 사원이 필요하니 일해 볼 생각이 없는가>고 묻는 것이었다. 제가 꿈에도 상상하지 않았던 제안이었다. 내가 그 때 다른 직장에서 일했으니 신문사에서 일하게 되는 것은 저의 일생을 완전히 바꿔 놓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문사가 시장에서 가까운 곳에 배치되었으나 한번 들어가 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나이 드신 분의 제의를 딱 잡아뗄 수가 없었다…    

나는 1978년에 <레닌기치>신문사에 취직했다. 그런데 신문사의 일이 그렇게 힘든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 때 젊은 나이에 무엇이든지 다 해 낼 수 있다고 확신한 모양이다. 초시기에 어려움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한글을 안다고 해서 누구나 다 신문사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선 기자직업의 비결을  파악해야 하였다. 다행하게도 이미 기자 경험을 쌓은 윤수찬, 리정희, 김 보리쓰, 남경자 동료들의 도움으로 차츰차츰 새 직업에 익숙하게 되었다. 몇 년후에 신문작판원 (편집 부국장)의 일을 맡았다. 두 사람이 오늘과 내일 신문을 작판하는데 다음 호 신문을 작판하는 날이면 작판원들은  24 시간 내지 26시간 일하는 때도 있었다. 특히 모스크바에서 당 대회가 있을 때면 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의 보고부터 시작하여 모든 문헌을 사원들이 번역해야 하였다. 그런 나날이면 번역문을 각각 집에 가져가서 밤늦게까지 번역을 하였다. 신문이 크기가 <쁘라우다>신문과 같았고 일주일에 다섯번 발간했으며 또 대회 기간에는 8면으로 나갔으니 그 어려움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신문사에 취직했을 무렵에는 활자식 채자였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하면서 그후 일제 사진식자기로 채자했고 지금은 컴퓨터로 치니 신문사의 일이 훨씬 쉽고 빠르게 된 것은 두말할 것 없다.

아무리 어려운 시기였지만 그 때가 지금도 참 그립다. 사원들이 너무 성실했으며 구소련시대의 좋은 교육을 받아서 사원들이 동정심이 많았고 서로를 양보하고 받들어주며 양해하는 품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신문사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초기에 그 어려움을 겪어낼 수 있었겠는가 의심이 된다. 솔직히 말해서 눈물이 날 정도로 힘들 때가 있었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다'란 말과 같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힘들었던 나날이 잊어지고 다시 말하건대 신문사에서 근무했던 시절이 그립다.  

물론 기자로서 출장도 다녔다. 까라간다로 출장를 갔던 일이 기억에 생생하다. 그 당시 까라간다에는 24개의 큰 탄광이 있는데 나는 그 중에서 가장 명성을 떨치는 '마이꾸둑스까야' 탄광으로 출장을 갔다. 탄광의 규칙에 따르면 탄광 본부에서 허락이 있어야 지하막장에 내려갈 수가 있었다. 탄광 지도자는 젊은 여기자를 400 미터 깊이의 탄광 막장(갱도)에 내려보내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 때 나는 '마이꾸둑스까야' 탄광 강 니키포르 직구장을 취재하기 위해 일부러 알마티에서 왔으니 좀 협조해 달라고 빌었다. 갱도에  내려가 본적이 없어 처음에는 아무런 두려움을 몰랐다. 막장에  내려갈 준비를 하면서 해당한 여러 가지 장치 즉 작으마한 전등이 달린 철

모도 쓰고 전등을 켜게하는 축전지도 허리에 띠고 커다란 고무장화도 신고 두터운 옷도리를 입고 나서 직구장과 광산  마스쩨르 유리  이렇게 셋이 광부들과 같이 400 미터 막장으로 내려갔다. 그 안에 처음에는 한 1미터 반쯤이되는 공간이 있었는데 탄부들이 직접석탄을 캐는 곳을 찾아가려면 서지 못했으므로 한 사람씩 겨우 기어서 들어가야 하였다. 그럴 때면 직구장이 앞에서 기어가고 저는가운데서 그리고 광산 마스쩨르는 제 뒤에서 따라 기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 보니 습관이 안 되어서 인지 숨이 막힐 정도였고 석탄 먼지가 꽉  찼으며 가는 곳마다에서 석탄덩어리들이 뚝뚝 떨어지는 광경을 그냥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마치 탄광이 방금 무너질 것만 같은 감이  들면서  매우 두려웠으나 용감성을 내여 광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탄광  위로 올라와 보니 석탄먼지를 둘러 쓴 흑인 같은 까만 얼굴에 눈만 깜빡이었다. 진짜 우수운 모습이였다…또 하나의 추억을 남긴 것은 신문사 사원일동이 알마티에서 멀지 않게 위치한 '미추린' 쏩호즈에 가서 도마도 추수를 돕던 일이다. 

청명한 날씨에 도마도를 따노라고 여념이 없는데 쏩호스 분조장은 점심식사를 할 때 먹으라고 하면서 새벽에 짠 우유와 흘레브를 운반용 우유 용기에 싣고 왔다. 우유와 흘레브 맛이 꿀맛 같았다. 육체적 노동도 원인이겠지만 어째서인지 부락이나 농촌에서 구운 흘레브는 도시에서 구운것보다 맛이 훨씬 더 있었다. 가스나 전기가 아니고 석탄이나 나무를 때여 구워서 그런것일까? 이렇게 조금씩 생각나는 짧은 장면들이 저에게 한해서는 지난 날의 그리운 회상의 보물과도 같았다. 이따금 동료들이 까라간다 탄광에 대해 묻는다면 탄광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동료들중에는 지하막장(갱도)에 내려가본 자가 아무도 없을 걸'하면서 자신도 몰래 긍지감을 느끼게 된다. 이에 첨부하고저 하는 것은 구소련 시대에 까라간다 '마이꾸둑스까야' 탄부들의 노동 조건이나 월급도 나

쁘지 않았다고 본다. 지금 눈앞에 그려보면 광부들의 식당도 좋은 레스토랑이나 다름이 없었다. 내부나 외부를 잘 꾸며 놓았으며 그야말로 음식맛은 특급 호텔 요리사들의 솜씨였다. 필자는 교사직업이 일생임을 인식하고 다시금 그리웠던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만발하는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사람은 한 인생에 남겨두고 잊지 못할 사연이 있으면 그것이 오래 간직해 둘 수있는 옛말로 되여 버린다. 마지막으로 <고려 일보>창간 95주년인 올해 신문사 사원들에게 만수무강과 하시는 사업에서 커다란 성과와 발전을 기원하는 바이다.

최미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