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문과 알마티 시내 카페에서의 인터뷰를 마치고, 차로 30여분 거리에 있는 스베타 최의 아틀리에로 향하였다. 알마티 지리를 몰라 늘 택시를 타고 이동하여 불편하였는데, 감사하게도 빅토르 문이 직접 운전으로 약속장소까지 데려다주었다. 지벡 졸리 거리에 위치한 스베타의 화실은 여러 화가들이 공용으로 임대하여 사용하는 2층식 빌라였다. 말 그대로 ‘화가들의 집’이었다. 

도착하였을 때는 6시가 다 되어 어두워지고 있었는데, 전체가 하얗게 페인트칠되어 진 건물이 홀로 석양에 빛나고 있었다. 친구와 공유하고 있다는 5평 정도의 화실에는 아기자기하게 서너 점의 작품이 놓여 있었다. 알마티는 실내의 어디를 가든 라디에이터가 잘 구비되어 있어 반팔을 입고 있어도 될 정도로 훈훈한 편이다. 그녀의 화방 역시 따뜻하였다. 손을 잠시 녹인 후, 의자에 마주 앉아 바로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옅은 갈색으로 물들인 머리를 하고 있었다. 느릿하고 차분하게, 자신이 고려인 5세로 알마티에서 1975년에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서두로 자신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오기 전까지 자신의 조상인 할아버지는 원동에서 선적과 물류사업으로 자산을 꽤 쌓으셨고, 매우 풍족한 삶을 누렸다고 한다. 스탈린 체제이후 개인 자산에 대한 관리를 나라에서 맡게 되어 재산이 몰수되었고, 강제이주를 하게 되었다. 카자흐스탄에서 스탈린 체제의 붕괴(1953)를 맞았고, 거기서 그녀의 부모 세대를 낳았다. 어려운 시기에 살아 교육 받지 못한 부모들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그녀와 여동생에게는 아낌없이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스베타는 카작 국립 예술 아카데미에서 으뜸가는 선생 아래서 미술을 전공하였고, 그녀의 동생은 산부인과 의사가 되었다. 고려인들이 자식들의 교육을 위하여 삶의 터전이었던 농경지를 버리고 도시로 이주를 하였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스베타의 이야기를 들으며, 오늘날 고려인들이 카자흐스탄 내에 잘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부모세대의 노고 덕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베타의 부모 역시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 알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선교 목적으로 알마티를 방문한 한국인 목사 내외를 통하여 처음 모국에 대해 접할 수 있었고, 이후 두 번의 한국 여행을 다녀왔는데 집과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스베타의 경우와 같이 모국과의 접촉과 교류가 어려운 것이 오늘날 고려인 사회의 현실이다. 카자흐스탄에서 만난 고려인 여성 화가는 옐레나와 스베타 둘 뿐이다. 옐레나는 분위기와 주제를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반면 스베타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여성의 인물화를 연작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그녀는 특정하게 무엇을 주제화하기 보다는 ‘자유’를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놓여진 두 그림 중 하나에 등장하는 여성은 무표정으로 장미꽃 속에 눈을 편안히 감고 있는데 구부러진 긴 머리카락의 모습이었고, 다른 그림의 여자는 모란꽃 무늬의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고 옆으로 편안히 잠자고 있다. 장미에 파묻혀 눈 감고 있는 소녀는 자신의 딸을 그려 낸 것이라는데, 하얀 피부에 통통한 얼굴 그리고 화려한 장미꽃들이 딸의 삶을 축복하고 있는 느낌이다. 모란꽃무늬의 이불 속에 손바닥을 괴고 눈 감고 있는 여인은 잠과 쉼의 편안한 자유를 느끼게 한다. 재학 당시 스승으로부터 자신만의 길을 구축하는 법을 배웠지만,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고백한다. 화가라는 직업만으로는 생계가 어려워 책의 일러스트레이션이나 가구에 디자인하는 일을 부업으로 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시인하고 있듯이, 아직은 작업이 초기 상태라 자신만의 표현을 모색 중인 단계이지만, 다음번 만날 때는 그녀 스스로를 만족시킬 수 있는 ‘자유로움’이 한껏 더 발산되어 있는 다양한 작품들을 접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전선하 홍익대 미술학과

예술학 전공 박사과정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