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생에서 누구보다도 가깝고 친형제처럼 지낸  친구인 양원식이와 처음 만나게 된것은 3년간 지속되었고 근 3백만명의 인명을 앗아간 그야말로 무자비한 동족상쟁인 6.25남북전쟁이  끝나고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가을이였다. 민족보위상 명령에 의하여 제대된  많은 젊은 군인들이 이제는  자기들이 다니던 학교를 찾아 떠나고 있을 때 나는 외국 유학을 추천받고 전선에서 바로  외국으로 떠나야 했다. 나는 고성에서 외국유학을 추천받은 젊은 군인 일행과 함께 평양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로 향했다. 제대수속을 끝낸후   기차를 타고 의주유학생 강습소로 떠났다. 나는 유학가는 젊은이 일행의 인솔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기차가 안주역으로  접근하고 있을 때  내가 인솔하는 젊은이들 중 하사관 한명이 내앞에 나타나 부동자세를 취하고 

 

- 인솔책임자군관동무 방문함을 허가하십니까 –라고 거수경례를 하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오 

-안주는 내고향인데 잠간동안 집에 들려 부모님을 만나고 올 생각입니다. 3년동안 보지못했습니다.

-갔다 오시우, 그런데 오래동안 있지 말고 빨리 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린 내일이라도 외국으로 떠날수 있습니다 – 라고 말하면서 이어서 나는 

-어느 전선에서 왔소 ?- 하고 물었을 때 그는 

- 낙동강에서 왔습니다 - 라고 대답했다. 

- 낙동강 ? 이름이 미시기우 ?

-  양원식입니다 – 라고 그는 부동자세를 취하고 활기있게 대답했다. 1950년에 6.25남북전쟁이시작되었을때 무전수였든 그는  평양에서부터 아쎄마무전기를 등에지고 자기 보병부대와 함께 낙동강까지 진격했지만 도하작전에서 전멸을 당했다. 그의 보병부대는 수천명의 시체를 낙동강변에 남기고  많은  장병들은 무기를 던지고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그러나 무전수였던 그는 끝까지 무전기를 버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질서하게 후퇴하면서도 린접부대들과의 무전연락을 성과적으로 보장함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조선로동당에 입당했고 정전과 함께 외국유학추천을 받게 된것이다. 이순간부터 그의생활의포물선과 나의 생활의 포물선이  교차되어 서로 합치되었고 단일포물선으로 변하고 말았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이 때부터  서로 헤여지지않았다.  쏘련의 전연맹국립영화대학 촬영과에서 공부를시작한 그때로부터  년금생활을 시작했을  때까지 어떤 때는 서로 기뻐하며 어떤 때는 서로 슬퍼하며 어떤 때는  서로 다투기도하면서도 서로 떨어지지 않고 같은 직장에서 같이 창작생활을하면서  젊은 시기를 보내게 된것이다. 처음에 우리가 카자흐스탄 알마아따에 정착하게 되었을 때 여기에는   우리뿐만아니라 모쓰크와에서 같이 공부한 유학생들이며 서로  잘 아는  동무들이 많았다. 즉 정추는 사범대학 음악교원, 맹동욱은 청소년극장 연출가, 최국인은 영화촬영소 카작필림 연출가, 한대용 (한진)은 조선극장 문예부장 으로 일하는 등 모두 예술분야 였기 때문에 창작생활에서 서로 통하는것이 많았다. 때문에  여기는  비록 조국과 멀리 떨아진 타향이였지만 동무들과 자주 만나며이국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생활과정에서  서로 돕고  서로 받들며 서로 이끄는데서  우정은  더 깊어졌고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별로 느끼지 않았다. 

 정추가 새로운 음악을 작곡했을 때, 맹동욱이 청소년극장에서 재미있는 연극을 무대에 올렸을 때 ,최국인이 새로운 영화작품을 만들고 국가상을 받았을 때 그리고 한대용이 새로운 희곡 산부처를 썼고 그 연극이  관중들의 호평을 받았을 때 또 양원식이 촬영한 영화작품이 국제축전에서 상을 받았을 때 그 때마다 우리는 모두 한자리에 모여서 샴페인을 나누며 서로 축하했고 누구나할것없이 창작생할에서 참다운 행복감을 느꼈다.  그와동시에 먼 조선에서 온 우리가 카자흐스탄에서 적은 힘이나마 다민족국가예술발전에 기여하게 된것을 최대의 영광으로 여겼다. 때문에 우리가 항상 창작열에 불타 열심히 일했으나 마음속한구석에는 양단된 조국에 대한 아픔이 항상 자리잡고 있었다. 

세월은 흘렀다.  그 어느 날이였다. 악쮸빈쓰크에 사는  김윤종이가 알마아따를 걸쳐 따스켄트로  떠나가면서 나에게 

- 5월달은 양원식의 생일인데 그를  축하하며 이 카메라를 선물로 전해주게 –라는 부탁을 했다. 그래서 나는 다음 날 양원식을 찾아갔다 

- 생일을 축하하오, 이건 선물이오- 라고 말하면서 카메라를 주었다. 그런데 이것이 김윤종이가 보낸 선물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카메라를 받은 양원식은 눈을 둥그레졌다.

-   야, 이 값비싼 카메라를 받으면 난 뭣으로 보답해야 하는가 ? –라고  말했을때 나는 농담으로  

- 복잡하게생각할 필요 없이 나를에게 매일 점심을 먹여주면 되는거야...- 라고 말했다. < 레닌기치>신문사에서 같이 일하는 우리는 그날부터 점심시간이 되기만 하면 나는 양원식의 뒤를 따라 아랫층에 있는 식당으로 갔고 그때마다 양원식이 사주는 점심을 시치미를 뚝 따고 계속 공짜로 매일 먹어주었다. 어느듯 한주일이 빨리 지나갔다. 그날도  식당에서 양원식이 사주는 점심을 먹으면서  카메라값을 다 받아내려면 적어도 1년동안을 원식이가 사주는 점심을 계속 먹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뜻밖에 

-야, 오늘은 마지막 날이다. 내일부터는  점심을 더 사지 않는다 – 라고 말했다. 이말을 들은 나는 할수 없이

- 나도 할말이 있다. 이것은 내 선물이 아니라  윤종이 선물이다 –라고 일년후에 카메라값을  점심으로 몽땅 다 받아먹어준후에 해야 할 말을 지금 미리 말하고 말았다. 이 때 양원식은 천천히 차를 끝까지 마시고는 갑자기 제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내멱을 틀어쥐고 식당밖으로 나를 강제로  끌고 나왔다. 

- 야 이녀석아, 지금까지 먹은 점심값을 몽땅 다 물어내라 !-하고 엄하게  소리첬다.

-인신공격은 불법행위다. 인신은 불가침이라는걸  모르는가? 모든 문제는 법기관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 -하고 소리쳤다.그렇지만  나는 할수 없이 동의하면서 그 값을 단번에 다 무는것이 아니라 매일 3루불리

씩 모두 5일간분 15루불리를 물어주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 신문사에 출근 했을 때 먼곳에서 나를 먼저 본 양원식은 이전처럼 아침 인사를 할 대신에 

- 김, 3루불리 다와이! – 러시아랄로 이렇게 크게 소리치면서 나에게로   접근했다. 

이렇게 나는 매일 아침  양원식이가 < -김,  3루불리 다와이!> –하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준비했든 돈을 제때에  물어주군  했다. 마지막 날이왔다. 나는 3루불리대신에 이번에는 술한병을 지참했다. 그날도 아침에 나를 먼저 발견한 양원식은  – 김3루불리 다와이- 라고 말할  대신에 이번에는 웃으면서 술병을 나에게 보인것이다. 처음에 나는 멍청하여 아무런 말도 못했지만 이윽고 퇴근후 조선극장 문예부장 한대용의 집에 모이기로 결정했다.퇴근후 한대용집에서 술상에 마주앉고 서로 바라보는것이  몹시 기뻤다. 우리들이만나서 서로 얼굴을 바라볼 때면 만사가  잊어졌고 마음속에는 기쁨이 용솟는것이었다.

사람에게는 운명이라고 하는것이 있는데 이것은 본인의 의지와 소원과는 전혀  무관계한듯 생각된다. 최근 10년간에 유감스럽게도 남북통일이되는것을 보지못하고 그 친구들이 한명한명 모두 이 세상을 떠났다. 양단된 남북의  통일이 그들이 원하는 소원이였다. 만일 남북통일의 날이  오면 나는 제일 먼저  일생동안을 친형제로 지낸 그들의 무덤을 찾아가리라. 5월 19일은  양원식의 생일이니 나는  그의 무덤을 꼭 찾아갈것이다. 나는 항상 너를 사랑했고 지금도 네게 대한 추억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거게서  네무덤을 돌아보면서 거룩하다고 불러주리라. 그러면  네묻친 무덤 더 따뜻해 지리라...  

                                                           김종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