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존중인 직원들에게 대해서만 기사를 씁니까? – 신문사의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염 레오니드가 질문하는 것이었다 – 그렇다면 불공평한 일인데요. 신문사에서 헌신적으로 일한 사원들의 자식들이 살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런 원로기자들에 의해 신문이 오늘도 발간되며 금년에 95주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지요…그 기자세대의 자식들인 우리는 창작적 위훈의 어린 목격자들입니다. 부모들은 고려인들의 정신적 유산인 신문에 대한 애착심과 존경심을 자식들에게 배양했습니다. 우리는 해마다 신문을 신청하며 언젠가는 우리 부모들이 몸담았던 신문이 주마다 집에 오는 것을 반가워 합니다.

우리는 염 레오니드더러 쏘련시대에 <레닌기치> (그당시 신문을 이렇게 칭했다) 사에서 실력있는 기자로, 부주필로 근무한 그의 아버지인 염동욱 선생께 대해 이야기해 줄 것을 부탁했다. 우리 독자들 사이에도 염동욱 선생에게 대해 따사함을 품고 회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경력자체를 보고 그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운명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자기 민족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나머지는 상상력으로 보충할 수 있다. 레오니드 드미뜨리예위츠의 아버지의 경력이 바로 그렇다. 그의 부친은 생활의 길을 대담하게 걸어나갔으며 그 누구의 뒤에 숨지 않았다. 염동욱 선생이 생활을 옳게 살았다고 하면 틀에 박힌 말일 것이다. 그러니 공산당원답게 살았디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긴 현재 이 말이 낡은것같이 들리며 현시 젊은 세대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를 자기 조국의 애국자로 알고 있는 레오니드 드미뜨리예위츠네 가정에서는 이것을 잘 알고 있다. 염동욱은 그의 많은 동포들과 마찬가지로 연해주에서 1916년에 태여났다. 그 곳은 카자치야 빠지라는 흥미있는 명칭을 가진 촌이였다. 그의 생의 다부분이 카자흐스탄에서 흘러갔다 – 여기에서 가정을 이루고 자식들을 자래웠으며 마음에 드는 직업을 전공하였다. 

그러면 그가 살아온 길을 차례로 더듬어 보기로 하자. 1937년도에 장래 기자의 가정이 살던 정든 곳을 떠난후에 고정적으로 정착하는 것이 생활의 목적으로 되었다. 그런데 우스베키스탄이 무인도로 느껴지지 않았으며 강제이주가 생활자체를 지워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청춘의 열의가 적지 않은 역할을 놀았다. 그리고 가장이 두가지 언어 (러시아어와 조선어)를 훌륭히 소유한 유식한 전문가라는 것도 그럭저럭 살아나가는데 도움이 되었다. 염동욱의 자서전을 본다면 그는 수많은 고려인들이 겪었던 그런 무서운 비극은 겪지 않았다. 그러나 그 자신이 조국 (하긴 그 시기에는 <조국이 어딘가?하는 질문에 답을 주기가 어려웠다)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하려고 편안한 생활을 하지 않았다. 자서전이 이것을 확증하여 준다.

1945년 12월 15일에  선서를 하였다. 다음 염동욱은 북조선에 통역으로 파견되었다. 같은 해에 쏘련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50년도 조선전쟁은 많은 가정에 불행을 가져왔으며 세계의 여러 곳에서 사는 동포들에게 준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염동욱 역시 전쟁의 불행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전쟁이 시작된 초기에 안해와 자식들을 우스베키스탄으로 보냈다. 거기에서 그의 부모들이 살고 있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부상당한 그 역시 우스베키스탄으로 돌아왔다.

-내가 그 때 어렸었지만 불안스러운 나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 염 레오니드가 회상한다 – 우리가 폭격을 피하여 숨었던 일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아마도 그 때가 전쟁의 초기였던 모양입니다. 우리는 서둘러 평양을 떠나 어떤 농촌에 당도하였어요, 다음 기차를 타고 타스켄트까지 갔습니다. 곧 우리의 뒤를 이어 겨우 살아있는 아버지를 수레에 싣고 왔습니다. 그 때 우리가 <레닌쓰끼 뿌찌>꼴호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치료를 받았지만 다리는 계속 절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습니다. 아버지가 우리를 몹시 귀여워 했어요, 때문에 시간이 끝나면 집으로 빨리 오려고 했는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는가봐요 – 회의, 첨부시간, 각종 크루쇼크…답은 간단했어요  <당원은 자신에게도, 식구들에게도 소속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1961년에 아버지를 알마아타에 있는 고급 당학교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소속)에 파견했습니다. 당학교를 성과적으로 졸업한 아버지에게 신문사에서 일힐 것을 권했습니다. 그 때에 신문을 <레닌기치>라고 칭했지요. 아버지를 당부부장으로 받았습니다. 신문사에는 유식한 일군들이 극히 필요했지요 – 그 시기에는 대회, 각종 회의와 포럼이 자주 진행되었는데 그 자료들을 신문에 다 실어야 했습니다. 이 책임적인 사상사업이 생명의 가치를 아는 젊은 당원의 어깨에 놓여졌습니다. 아버지는 1981년까지 신문사에서 헌신적으로 일했습니다. 그 해에 수술과정에 돌아가셨습니다…

-레오니드 드미뜨리예위츠, 아버지가 신문사에서 일하던 시기에 무엇이 기억에 남았습니까? 

-당 대회가 진행되는 나날이면 아버지가 아침 일찍 출근해서 다음날 아침에 집으로 들어오시군 했습니다. 낮에 들어와서 점심을 빨리 잡수고는 곧 신문사로 나갔지요. 때로는 신문사 직원들의 자녀들도 신문사에 가서 빈 방에서 놀군 했습니다. 그럴때면 우리들을 모여놓고 점심을 먹이기도 했습니다. 최근에 <고려일보>를 보면 고려극장에 대한 기사들이 자주 실리는데 아버지가 신문사에서 일했을 때도 극장에 대한 기사들을 체계적으로 실었고 신문사 사원들과 극장 배우들이 친근했습니다. 더군다나 두 문화기관이 한 도시에 있었거던요. 때문에 나는 신문사 직원들은 물론 극장 배우들도 성인이 되면서 알고 지냈습니다. 예를 들어 정상진, 김세일 및 기타 선생들을 알고 있었지요. 그후에는 알마아타에 와서 양원식 선생을 알게 되었는데 모두가 말하기를 그는 기자의 소질을 타고 났다고 합니다. 성격도 부드럽고 이야기도 재미있게 하시는 분이였습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자녀들 교양했습니까? 엄격한 분이였습니까?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엄격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뒤통수도 치고요. 자식들이 다섯이였으니 수월하지 않았겠지요. 더군다나 모두 다 공부를 잘하도록 하려면 어머니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어머니가 그렇게 엄격히 통제하였기에 결국 우리들이 공부를 잘 했고 대학에 입학하여 고등지식을 소유했습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손을 댄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욕설을 할 줄도 몰랐어요 – 정직하지 못하다, 공정하지 않다 – 이것이 아버지의 부정적 평가였습니다. 내가 혹시 장난을 치다가 무슨 일을 저지르면 아버지는 우울한 표정으로 <정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이것이 가장 큰 벌이였습니다. 그럴때면 나는 큰 범죄를 저지를 느낌이였지요. 신문사 사원들은 아버지를 깊이 존경했습니다. 퇴근한 후에 사원들중 그 누가 우리 집에 들리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들은 저녁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그 어떤 기사에 대해 토론을 벌리기도 했습니다.

-자식들 중에서 아버지의 직업을 전공한 자가 있나요?

-아니예요, 우리는 다 기술분야를 전공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손군이 일곱인데 증손자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그 애들을 보고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얼머전에 우리의 선조들이 보통 사람이 아니였다는 것을 알게 되였거던요. 아버지가 생존하였을 때 그것을 알았더라면 수소문을 해 볼 수 있었겠는데…아버지는 원래 입이 무거운 분이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그의 표창을 자식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나는 어떤 기자들이 한 때 신문사에서 일했는가를 현재 근무하는 기자들이 알았으면 해서 아버지의 표창을 아래에 지적하는 바입니다.

<영예표식 훈장>, <일제에 대한 전승 메달>, <조선해방전 참가 메달>, <쏘련륙해군 30주년 메달>,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전승 20주년 메달>, <웨.이.레닌 탄생 100주년 메달>,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전승 30주년 메달>.

-아버지에게 꿈이 있었습니까?은퇴하게 되면 책을 쓰고 날마다 고기잡이를 다니겠다고 했습다. 아버지가 고기잡이를 무척 좋아하셨거던요. 그런데 그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우리들이 아버지가 일생을 두고 묵묵히 지켜오던 것을 하나하나 알아내려고 합니다. 지금은 묵과하던 것을 다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왔는데 유감스럽게도 아버지는 침묵을 지킨채 이 세상을 등졌습니다…                                                                                                                                                                                                                                                                                                                                                                                                                                                                                           

 진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