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이라구요?> - 우리 독자들 (특히 신문을 상시적으로 구독하는 독자)은 상기 표제하에 <고려일보> 원로, 한글교사 겸 통역, <무지개>성악단 예술지도원 (아마 우리가 직책을 다 열거하지 않은 것 같다)김 스웨뜰라나 그리고리예브나의 이름을 읽고 미소를 지을 것이다. 실지에 있어 스웨뜰라나 그리고리예브나를 신문사의 손님이라고 할 수 있을까? 스웨뜰라나 그리고리예브나는 공화국 신문 <레닌기치> (그당시 신문을 이렇게 칭했다)에서 근무하였다. 그 시기에 신문이 주 다섯호가 발간되었고 크기는 현재 <카자흐스탄쓰까야 쁘라우다>, <레닌쓰까야 스메나>와 같은 주도적 신문과 같았다. 그런데 우리가 <신문사의 손님>이라는 표제하에 게재하는 자료에서 독자들은 주인공의 생활에 대해, 어떻게 그런 개성이 형성되었는가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고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바이다.

 

 

제자들의 소감

…교사님을 보면 자연이 그 어떤 현묘한 방법으로 여왕의 형상을 창조해낸것 같습니다. 하시는 사업에 대한 교사님의 애착심과 충직성은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교사님의 한글수업 마다가 표현력 있는 교재선택의 정확성, 자신의 방법논의 공정성에 대한 내면의 확신성으로 보아 순 다이아몬드와 같습니다.

교사님한테서 한글을 배우는 것이 행복입니다.

리 류보위 화가 

 

이런 경우에는 우리 기자들에게도 그런 <손님>과 마주앉아 차를 마시며 천천히 이야기 하기가 재미있다. 이 주인공의 생활은 사회앞에 손바닥 같이 빤히 보인다. 우리는 그를 본받을만 하며 그의 열의와 적극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스웨뜰라나 그리고리예브나가 찬사를 항상 반대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그런 사람들에 대해 <민족의 중심축, 민족의 자랑>이라고 한다. 그런 사람들은 사람들을 이끌어 나가는 소질을 타고 났다. 때문에 스웨뜰라나 그리고리예브나가 교사의 직업을 전공한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다.풍부한 자료를 취재할 수 있는 이런 주인공과 인터뷰를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때문에 우리의 담화를 세가지 방향으로 나누기로 하였다. 그런 방향들중 하나가 우리 신문<고려일보>라는 것이 기뻤다. 

끊을 수 없는 인연

스웨뜰라나 그리고리예브나는 13년을 신문사에서 근무했다. 은퇴한 후에도 신문을 계속 구독하면서 시간이 허락하면 때때로 독자들의 관심사로 되는 이러저러한 테마로 기사를 쓰기도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정든 민족신문과 인연을 끊지 않고 항상 받들어 주고 있다.

-스웨뜰라나 그리고리예브나, 기자생활에 대해 꿈을 꾼적이 있나요? 

-물론 없었지요. 니사미명칭 타스켄트국립사범대학 <러시아어와 문학, 한국어>과를 졸업하여 교사의 직업을 전공했습니다. 교사의 직업이 저의 사명이라고 대담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수업을 진행하면서 항상 큰 만족감을 느낍니다…대학을 졸업한후 처음에 우스베키스탄의 한 농촌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습니다. 다음 새파란 청춘인 저를 구역 교육부에 러시아어와 문학 방법논가로 초대를 받았지요. 봉급도 괜찮고 전문가로서 필요한 일을 했으니 그 이상 바랠 것이 있었겠습니까? 게다가 그 시기에는 국가기관에서 일하면서 실습을 할 수도 있었거던요, 일주일에 12시간을 교사로 일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불행이 아니였더라면 그렇게 계속 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1978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는 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았습니다. 집안의 모든 것이 다 어머니를 상기시키고요…이 때 오빠가 <조선신문사가 크슬오르다에서 알마아타로 이주하니 한글을 아는 전문가들이 필요하다더라, 알마아타로 가 볼 생각이 없냐? 환경도 좀 바꿔볼겸…> -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글을 아는 전문가들이 적었으니 기자들이 부족한 것은 당연한 일이였지요. 하긴 기자의 직업에 대한 호기심도 나더라구요. 그래서 만약의 경우에 구역교육부로 되돌아오기로 하고 떠났지요. 저의 친척들도 그런 의견이 였습니다. 그런데 신문사가 그 어느 정도 저의 운명을 확정한 것으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문사에서 근무하는 것은 한글과 직접 연관이 있었지요. 그러니 먼저 제가 한국어로 쓰는 것을 배우고 다음에 각이한 년령과 직업의 희망자들에게 한글을 배워주는 셈이지요…

-아마 신문사에서는 당신을 반겨 맞이하고 기자로 취직시켰겠지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당시 주필이였던 김광현 선생이 원고를 읽는 직원의 자리를 권할 수 있다고 하더라구요. 이전에 봉급을 얼마 받았는가고 묻기에 220루블리를 받았다고 했지요. 그러자 주필의 말이 <이런 말을 하기가 미안한데요 저는 85루블리이상 주지 못하겠는데요, 그런데 일년 기간에 아파트를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동의했지요. 그런데 한달이 지나 카자흐스탄공산당 중앙위원회 경리부부장 까이다로브가 초대하더라구요. 나는 그 분의 성과 나의 생활에서 행복한 그 날을 영원히 기억했습니다. 까이다로브부장은 손에 그 어떤 명령서를 쥐고 물어보는 것이지요:

-주택을 원합니까?

-농담인가요?-너무 뜻밖이여서 내가 이렇게 물었지요.

-저의 직책이 그런 농담을 할 자리인가요? - 그의 대답이였다.

이렇게 저는 기한전에 주택을 받았습니다. 그 때의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 시기에 알마아타에서 주택을 받는다는 것은 꿈이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요. 시민들이 몇십년씩 차례를 서서 기다렸으니까요. 물론 신문사의 이주와 관련하여 당 중앙위원회가 간부들에게 특혜를 제공한 것이지요. 그런데 다음날 출근하니 또 한가지 반가운 소식이 저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서한부 부장 리 블라지미르 뻬뜨로위츠가 저를 자기 방으로 불러 말하는 것입니다:

-이젠 원고를 그만 읽고 내 자리에 와서 일해요, 그런 지식을 가지고 원고를 읽다니…

이렇게 나는 뜻밖에 서한부 부장이 되였습니다.

-그 일을 시작하기가 힘들었던가요?

-물론 난생 처음 이런 일을 하게 되니 배울 것도 많았지요. 게다가 때로는 교정원, 편집국장의 일도 대신하게 되였습니다. 편집국장의 책임이 얼마나 큰가를 신문사의 일을 좀 아는 사람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문사에서 일하는 과정에 기억에 남은 일이 있다면?

-우선 신문사에 와서 재능있는 여러 기자들과 만나게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남경자 (류보위 알렉싼드로브나)기자를 만난 것이 저에게는 행운이라고 할 수 있지요. <곡식은 무거울수록 고개를 낮게 숙인다>는 격언이 있는데 이것이 남경자에 대한 말입니다. 항상 겸손하고 유식하다는 티를 절대 내지 않습니다. 후에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것을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바쁜 나날에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항상 마음속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문사에서 밤을 새워가며 신문을 발간하던 일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특히 당대회가 진행되는 나날에는 신문이 8면으로 발간되니 대회자료를 번역해서 작판을 하다보면 다음날 아침에 발간합니다. 힘들었지만 인쇄기름 냄새가 풍기는 새 호를 받아 쥐면 가슴이 벅찹니다. 또 기억에 남은 것은 독자모집 출장입니다. 저는 로스또브주를 맡았는데 그 곳에서 계절농사를 짓는 고려인 브리가다들이 집중되어 있었지요. 하루는 루크농사를 짓는 한 고려인이 다가와서 <나는 신문을 주문하지 않을테요, 한글도 모르고 러시아인이 다 되였으니까요…>라고 말하더라구요. <이봐요 젊은이, 오늘 저녁 집에 돌아가서 세수를 하고 거울앞에 서서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 보세요> - 이렇게 내가 말했어요. 그래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지 결국 신문을 신청했습니다. 모국어를 배우는 것은 언제나 늦지 않다고 봅니다. 내가 학생들에게도 항상 그 말을 합니다.

언어는 나의 벗

오늘 카자흐스탄 특히 알마티에서 한글에 대한 관심이 크다. 그런데 흥미있는 것은 고려인들만이 아니라 타민족 젊은이들도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알려고 하는 것이다. 알마티 고려민족센터가 조직하는 많은 강습, 한국 기업들이 제정하는 장학금 수여식이 이것을 말해 준다. 여러 년령의 사람들이 스웨뜰라나 그리고리예브나에게 한글을 배우러 오는데 특히 젊은이들이 한글에 관심이 많은 것이 반가운 일이다. 오늘 그에게서 한글을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통역을 부탁하는 기업가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스웨뜰라나는 모든 것을 다 거절하고 자기가 맡은 그루빠를 이끌고 나가며 노인대학에서 통역을 담당하고 있다. 그가 수업을 하는 교실에 들어서면 교실안의 모든 것 – 지어는 벽까지도 교사의 의지, 그의 목소리에 사로잡히는듯 하다.

-수업을 하다 보면 만사가 다 잊어지고 시간이 가는 줄도 모릅니다 – 김선생이 이야기 한다.

김 스웨뜰라나 그리고리예브나의 반에는 나이가 어린 학생도 있고 머리에 서릿발이 내린 사람들도 있다. 나이가 든 사람들이 제때에 한글을 배우지 못한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런 시대에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우지 못한 것을 벌충하려고 지금 열심히 배우고 있다.

-스웨뜰라나 그리고리예브나, 어떻게 모국어를 그렇게 잘 소유하고 계십니까? 대학에서 좋은 모국어 교육을 받았는가요?

-한글은 저의 모국어입니다. 기자의 생각을 이해하겠는데 많은 저의 동갑들이나 기타 고려인들이 알고 있는 사정으로 하여 한국말을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러시아어가 모국어로 되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엄격한 규칙을 세워 놓은 가정에서 태여나 행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학교나 거리에 나가서는 어떤 언어로 말하던지 집에서는 꼭 모국어로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주 유식한 분이였어요, 그러니 우리가 발음을 제대로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학교에서도 한글을 가르쳤어요, 그러니 대학에 입학하였을 때 저에게는 좋은 토대가 이미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을라니까 기업활동도 한적이 있다던데요?

-예,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한국기업가가 물건을 많이 실어들였어요. 처음에 통역으로 그 일을 돕다가 회사의 알마아타대표자로 일을 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거절했어요. 물질적 책임을 지기를 두려워 했다고 할 수도 있지요…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이것이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으니까요. 교사의 직업이 항상 그리웠습니다.

-아버지의 영향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요, 가정에서 가장주의가 지배했나요?

-아버지의 말을 준수하는 것이 우리집에서 철칙으로 되여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지시에 무조건 복종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진실한 공산당원이였지요. 꼴호스 회장으로 일했을 때 하루는 집에 와서 말하더라구요 - <잠은 마루바닥에서도 잘 수 있어…소파가 사무실에 필요해, 사람들이 앉을 곳이 없단말이야> - 이렇게 우리는 집에 있던 오직 하나의 가구와 헤여지게 되었습니다.

스웨뜰라나 그리고리예브나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의 성격이 엄격했지만 인간성과 동정심은 끝이 없었다고 한다. 한번은 아버지가 운하건설장에서 일하면서 거의 쓸어질듯한 유태인 청년을 집에 데리고 와서 <건강을 회복하도록 도와주라>고 했다. 온 가족이 쇠약해진 청년을 받들었다. 청년은 한집 식구가 되었다. 완쾌된후 그는 부락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면서 소인예술단도 조직하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는 음악가이고 교향악단 지휘자였다. 후에 고향땅 벨로루시야고 돌아간후 음악가는 생명의 은인인 스웨뜰라나의 가정에 소포도 여러 번 보내왔다. 연출가 송 라브렌찌가 이에 대한 기록영화를 제작하였다고 스웨뜰라나가 이야기 하였다.

칠색 <무지개>

아마도 단어마다에 자기의 멜로디가 있는 것 같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수업을 하기도 수월하기 때문이다. 스웨뜰라나 그리고리예브나에게는 노래와 마찬가지로 음악과 단어가 하나로 어울린다. 그는 이 과정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이끌어 들인다. 스웨뜰라는 오랜 기간 <비단길>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인연을 맺었던 소인연예단과 인연을 영 끊을 수 없었다.

-음악교육을 받은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이상에 말했던 유태인 청년이 아버지더러 <딸애에게 피아노를 사 주세요, 청각이 아주 좋아요…>라고 말하자 아버지가 하는 말이 <우리 가정이 그걸 살 형편이 못돼, 다른집 아이들도 피아노 없이 살지 않아, 스웨따도 그럴 수 있어…> 이렇게 저의 음악세계는 소인예술단으로 제한되었습니다. 그러나 중학교에서나, 대학에서나 내가 공부하는 곳 마다에서 노래를 불렀지요, 합창단이나 성악단에서 불렀습니다.

<비단길>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마음의 휴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나 한편으로는 무대는 젊은이들이 올라 설 곳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비단길>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한마디러 <은퇴>하겠다고 했지요. 단원들이 말리는 말도 듣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친구들이 <무대에 나서지 말고 우리끼리, 자신의 기분도 돋굴 겸 노래를 부르자>고 제의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합창단 음악지도원인 박상원선생이 스웨뜰라나와 우리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계속 노래를 부르시지요>라고 고무감을 심어 주었다. 

연습의 나날이 흘렀다.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성악단에 어떤 이름을 줄까?, 의상은 어떤 것으로 할까? >-이런저런 생각에 골머리가 아팠다. 그런데 문득 좋은 생각이 왔다 – 가지각색 옷을 입고 손에 역시 같은 색의 우산이나 수건을 쥐면 어떨까? 마침 단원들도 일곱명이니 <무지개>?

-그런데 <비단길>합창단원들이 섭섭해 하지 않던가요?

-물론 섭섭해 한 사람들이 있지요, 이미 2년이 지났는데 섭섭함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는가봐요. 그런데 <무지개>가 짧은 기간에 인기를 얻게 되었거던요, 이미 두번 한국에서 공연을 했습니다. 게다가 두번째 방문은 다 초청하는 측이 부담했어요. 

-<은퇴>기한은 연기하지 않았습니까?

-공연을 할 때마다 이번만 하고 그만둔다고 생각하는데 공연뒤에는 또 다른 전망이 생기거던요…아직은 제가 그 전망을 가까이 할 수 있으니 또 주저앉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무지개>를 떠난다해도 계속 도와줄 것입니다.

-어떻게 젊은 나이도 아닌데 그렇게 여러 면으로 활동하는지요? 혹시 계획에 따라 움직이지 않아요? 

-계획대로 되지 않습니다. 친구들, 동창생들이 많으면 계획을 잡아도 소용이 없더라구요 – 환갑잔치, 생일, 결혼식…

우리는 김 스웨뜰라나 그리고리예브나와 인터뷰를 끝내면서 한글교육과 예술창작에서 큰 성과를 기원하였다. 

진 따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