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카자흐 땅에서 그 뜻깊은 만남의 발기자가 누구였는가를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일행이 운전기사 두 명을 포함하여 모두 9명이였는데 날씨가 아주 따뜻하여 우리가 여름옷차림을 한 것이 기억에 남았다. 승용차 두 대에 실린 우리는 한시간 반 후에 카자흐스탄의 남부 도시 침켄트에 도착했다. 침켄트로 가는 도로가 전러 도로여서 세관검찰 초소도, 국경도 없었다.

이에 앞서 우리는 <레닌기치> 총주필 한 인노껜찌 빠블로위츠와 상봉의 상세한 부분과 조직 문제들을 토의하였다. 총주필은 상봉회의 기본 중요한 점을 말했다: 침켄트에서의 만남이 편집위원회가 주재기자들의 참가하에 매년 전통적으로 진행하는 회의로 된다는 것이었다. 보통 이 회의를 해마다 늦가을에 알마아타에서 진행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것이 이동회의로 되는데 우선 첫째로 주재기자들의 편리를 보아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고 인노껜찌 빠블로위츠가 강조하였다. 그것도 그럴것이 우스베키스탄에서 침켄트까지는 엎어지면 코가 닿을 곳이다! 둘째는 이것이 가을에 진행되는 독자모집을 앞두고 침켄트주 고려인 사회계 사이에서 선전사업을 할 훌륭한 가능성으로 된다. 천 왈렌찐 기자와 90년대초에 러시아어로 된 부록 <고려>편집인인 김 보리스가 총주필과 함께 침켄트로 가기로 계획되여 있었다. 그런데 주재기자단에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에서 온 예술명수들의 창작그루빠를 넣으려는 좋은 생각이 나의 머리속에 떠돌았다. 그들은 고려인 소인극장-스튜디오 <신생>의 새 컨서트프로그램 준비를 돕고 있었다. 하긴 그당시 타스켄트 기자주재소 소장으로 있던 나를 외국들이 다른 나라로 가려면 해당 국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고 경고했다. 우리는  혹시 문제가 생기면 책임지기로 하고 떠나기로 했다!결국 카자흐 이야기군들의 전설로 가득찼으며 옛날에 상선대의비단길 교차되었던 복을 주는 침켄트 땅에 도착했다. 가벼운 연기에 싸인 과수원과 터밭들, 다리가 불러지듯 자연의 선물이 쌓인 시장의 판매대들, 푸른 수림에 잠긴 도시 그리고 시민들의 상냥한 미소… 

침켄트시에 사는 고려인들이 쏘련시대에 적지 않은 부수의 <레닌기치>신문을 구독하였다. 그런데 시민들이 자청해서받아보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공화국 남부의 비옥한 땅에서 수많은 루크재배 브리가다들이 농사를 지었다. 러시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그리고 물론 우스베키스탄 (우스베키스탄은 카자흐스탄에 바싹 붙어있다)에서 <루크농사군-고본지들>이 계절작업을 하기 위해 이 곳에 왔다. 타스켄트 주재기자들도 신문구독 시기가 오면 부수를 늘이기 위해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전야를 헤매야 하였다.침켄트 문화센터 열성자들이 <레닌기치> 직원들과의 상봉회를 높은 수준에서 조직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모든 편의시설이 갖추어진 호텔, 독자회, 시내의 유적지 관광, 시외의 별장에서 휴식야회…야회에서 북조선에서 온 성악가들의 공연이 있었다. 이 상봉회는 실로 잊을 수 없는 것이였다. 우리는 또한 식물원에 가서 이국풍의 나무와 초목 (외국에서 실어들인)의 그늘밑에서 재미있는 하루를 보냈다.임의의 행사의 성과가 지도자에게 많이 달렸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바이다. 그당시에 신문사 직원이 근 60명에 달했다. 신문사 내부 직원들이 주필에게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주필을 알마아타 회의에서 일년에 한번 보는 우리 주재기자들에게는 인노껜찌 빠블로위츠가 아주 중요한 인간의 품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임의의 회의를 필요한 방향으로 끌고 나가며 웅변이 좋은 것으로 보아 그가 주필이 되기전에 큰 당 및사회정치 학교를 경과했다고 추측할 수 있었다. 주필은 언제나 침착했고 논쟁에서도 음성을 높이는 것을 보지 못했고 부하들과 대화를 절도있게 하였다.

우리가 일년에 한번 주재기자 회의에 모이면 항상 동정이 깃든 말을 해 주었으며 그 어느 주재기자를 질책하더라도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우리는 주필의 이런 태도에 감사하였다. 그런데 주재기자 모두에게 관계되는 이야기는 모두가 참석한데서 말했다. 예를 들어 주재기자들이 응당히 받아야 할 출장비의 조항을 완전히 이용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주필이 그런 식으로 주재기자들의 많지 않은 물질적 면에 대해 배려한다는 것을 이해하였다. 그리고 매년 주재기자 회의가 끝나면 우리는 봉급과 기한전에 받은 출장비만이 아니라 상금도 톡톡이 받아 호주머니에 넣고 알마아타를 떠났다.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에서 온 배우들이 그 침켄트 출장을 더 의미 깊게 하였다. 그 시기에 쏘련에 사는 고려인들에게 있어서 코리아 (남이건 북이건 관계없이)가 육체적으로는  느끼지 못하나 가보고 싶은 멀고 먼 모국이였다. 그러니 혹시 150년전에 우리의 동족들을 빈민으로 만들었으며 그들로 하여금 부득이 고향을 등지게 한 그 사변이 없었더라면 오늘 우리가 조상의 땅에서 살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역사는 가정법을 허용치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가 먼 고향땅 그리고 그 곳에서 사는 사람들과 친족관계를 마음속에 본능적으로, 유전학적 수준에서 보존하면서 이미 150여년 동안 운명이 우리를 버린 곳에서 살고 있다. 때문에 극장-스투디오 <신생>지도자의 초청을 받아 쏘련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타스켄트에 온 평양 손님들이 우리에게는 친척과도 같았다

…1990년도의 따뜻한 가을…쏘련의 붕괴를 그 누구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고르바쵸브의 개편의 믿기 어려운 미풍이 여전히 우리를 스쳐가고 있었다…

그 후에, 큰 나라가 조각조각 붕괴된 후에 북한과 남한에서 손님들이 정기적으로 우리에게로 오가기 시작했다. 역사적 조국의 주목을 그리 받지 못했으며 모국과 그 어떤 뉴대로도 연결되지 않은 우리는 북한과 남한에 똑 같이 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남과 북을 갈라놓은 정치적 집게 발이 우리 디아스포라에도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스며들기 시작했다. 하긴 모국 멀리에서 태여난 우리에게 있어서 그 시기에 한반도의 남와 북부가 똑 같이 소중했다. 지난 세기 90년대에 구 쏘련공화국들에 각종 고려인 사회단체 (B CK,  COK, …………,<범민련> 및 기타)들이 나타남에 따라 고려인 디아스포라는 순식간에 대립하며 서로 경쟁하는 두 개의 진영으로 분리되었다. 우리가 하나의 혈족이라고 신성하게 믿었던 쏘련의 고려인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운명의 시킴에 따라 고향땅 멀리 와서 영원한 방랑자들이 도대체 나눌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실로 우리의 업적과 행동은 탐구하기가 어렵구나!

얼머전에 평창에서 끝난 올림픽에사 남북한 선수들이 처음으로 한반도가 분단된후 한 열에 서서 나갔는데 우리 역사적 조국의 통일에 대한 포고적인 조치가 아니라 현실적 조치를 볼 수 있는 날이 멀지 않다는 미약한 기대를 주었다.그러면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예술명수들에 대해 몇마디 쓰려고 한다. 모두 네 분이였는데 평양국립 가무단 독무가 리승화는 민족악기 가야금을 타는 재능을 <신생>남녀 아이들에게 가르쳤고 안무가 김운홍은 무용을 가르쳤다. 성악은 조선인민민주주의공호화국 공훈배우 박령숙이가 배워주었다. 이 창작그루빠를 작곡가 차학철이 지도했다. 그는 구비를 토대로 한 많은 노래를 작곡한 재능있는 음악가로 국내에 알려졌다. 그들은 2개월간 열심히 연습한 결과 7개의 대중적 무용과 3개의 독무를 배워주었다. 그저 가르쳐 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무용의 동작마다를 연마했다. 그리고 성악종목도 세가지를 준비했는데 성악은 춤과 달리 모국어를 소유해야 했기 때문에 우리 성악가들이 땀투성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였다. <신생>은 상기 프로그램을 가지고 1991년에 평양에서 진행된 민속예술축제에 참가하였다. <신생>단원들을 평양의 오랜 극장인 <모란봉>극장에 모인 시민들이 대 환영하였다. 그리고 여러 출판물에도 카자흐스탄 예술단원들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한마디로 말해서 이상에 지적한 침켄트 출장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겨놓았다. 북한의 창작일군들도 손님후대하는 카자흐스탄 땅에서 마음이 너그러운 동포들과의 따뜻한 만남을 오래오래 기억하리라고 생각한다.

 

본사기자      

 리 블라지미르, 

<고려일보> 전 따스껜트 

주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