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비해 최근 년간에 사람들의 관계가 냉정해 졌다고들 한다. 지어는 친구들, 이웃들과도 드물게 교제하며 온정이 식어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쁘게 돌아치는 우리의 일상생활 때문에 그럴까? 아니면 우리의 의식속에서 그 어떤 변동이 생긴 것인지? 그러나 그 어떤 생활환경속에서도 자기가 타고 난 품성에 변함없이 주위사람들과 정을 나누며 배려를 돌려주는 사람들이 있다.

…당나귀에 맨 달구지가 부연 먼지를 일으키며 농촌의 중앙 거리를 지나가자 이구석 저구석에서 놀던 카자흐 아이들이 한군데 모이기 시작했다. <얘들아, 꼬레예쯔가 시장에서 돌어왔어…>- 나이가 좀 이상인 한 아이가 말했다. 나머지 아이들은 꼬레예쯔가 누구이며 시장에서 돌아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미 알고 있었다.

꼬레예쯔란 로사의 아버지 김금철이고 그가 시장에서 돌아왔다는 것은 장을 보고 오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맛있는 것 즉 바란끼 (가락지 빵), 쁘랴니크 (당밀과자), 비스켓, 사탕을 사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당시에는 이것이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이어었다. 원동에서 강제이주된 다른 고려인들과 마찬가지로 로사의 아버지도 꼴호스에서 근무했다. 로동일을 계산하여 현물로 받으면 그것을 팔거나 식품과 바꾸기 위해 드문드문 시장을 다녀오군 했다. 그럴때면 물론 자식들을 먹이려고 위해 맛있는 것을 사오기도 했다. 

…카자흐 아이들은 이 날도 집모퉁이에 숨어 로사의 아버지가 어디로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로사의 아버지가 말이 적고 엄숙해 보여서 그 애들이 그를 무서워하였다. 그들은 꼬레예쯔가 당나귀를 몰고 떠나자마자 약속이나 한듯이 로사집앞에 모여들었다. 한 30분이 지나자 로사가 문밖에 나타났다. 여아이의 목에는 바란끼들이 걸려 있었고 손에는 봉지를 쥐고 있었다. 카자흐 아이들은 이미 익숙된 동작으로 로사앞에 줄을 지어 서서 로사가 목에 건 바란끼와 봉지에 든 쁘랴니크를 골고루 나누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로사의 아버지도 이것을 모르는 것이아니었다. 자식들이 그가 시장에서 사 온 것을 그렇게 빨리 먹어치울 수 없었다. 그러나 한번도 로사를 나무래지 않고 눈감아 주었다. 어떻게 보면 딸애의 너그러움에 기뻐했다고 말할수도 있다. <어려울 때 서로 나누어 먹기> - 이것이 얼마나 좋은 품성인가! 고려인들이 불행에 처했던 1937년도의 늦가을 카자흐인들도 동정심을 품고 고려인들을 도왔지 않았던가! 하여튼 로사 금체로브나는 어릴적부터 이런 성격이였다. 그뿐만 아니라 로사는 옥수수 줄기와 수염으로 인형을 만들어 자기 또래의 카자흐 여아들에게 나누어 주군 하였다…

…부모들에게서 들은 말에 의하면 로사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뒤에 혼자서 자식들을 자래우던 할머니는 4명의 자식을 데리고 강제이주 열차에 올라타게 되었다. 강제이주를 당한 고려인들이 근 한달동안 화물열차를 타고 오는 도중에 고생을 한데 대해서는 모두가 아는 바이니 그것을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크슬오르다주 싀르-다리야구역 제9호 아울에 배치되었다. 그 시기는 아울이 명칭을 가지고 있은 것이 아니라 번호로 표시되었다. 그 해 겨울은 카자흐인 가정에서 그럭저럭  함께 지내고 이른봄부터 사만벽돌로 집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우리 아버지가 원래 부지런한 하니 오빠를 데리고 집을 만들어 가족을  그 곳으로 옮겼답니다 – 로사 금체로브나가 이야기한다 – 그리고 꼴호스에서 아버지가 맡은 지단에는 수확률이 특별히 높아 그곳에서 자래운 감자와 당근을 주농업전시회에도 보냈습니다. 그것은 까라가치 (느룹나무의 일종)가 자라던 땅에 심었기 때문입니다. 까라가치를 뽑아없애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이나 무서워하지 않는 아버지는 그것을 다 없애고 그렇게 좋은 감자를 길러냈답니다. 그리고 제 2차 세계대전말 즉 1944년에 노동전선에 동원되어 까라간다 탄광에서 어려운 조건에서 일하면서도 항상 좋은 실적을 보여 정부의 표창장도 받았습니다. 그 표창장이 아직도 보관되어 있습니다.

어릴적부터 재봉에 취미가 있는 김 로사는 이미 7학년 때부터 자신의 옷과 친척들의 옷을 기웠다. 그러니 의복모형공이 그의 꿈이였다. 그래서 레닌그라드경공업 대학 피혁 및 모피 학과에 서류를 접수시켰으나 입학점수가 부족하여 입학하지 못했다. 로사는 그후 크슬오르다 공업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한후 <소유스기쁘로리스>설계연구소 크슬오르다 지사에서 3년동안 설계사로 일했다. 가정을 이룬 다음에는 깝차가이로 이주하여 <깝차가이쨔즈스트로이>트레스트에서 기술안전담당 인지니어로 10년을 근무하였다. 로사 금체로브나는 그 어디에서 일하던지 사회사업에 적극 참가하였다. 그 시기에 그는 시 참전로병 및 원로협회 검열위원회 위원으로 사업하였다. 은퇴생활을 10년 앞두고 로사 금체로브나는 주민들의 사회보호 관리국 체계에서 근무하였는데 그의 너그러운 심정을 잘 알고 있는 지도부는 그에게 고독한 생활을 하는 노인들을 찾아가 사회적 도움을 주는 부서를 맡겼다. 로사부장은 부서의 직원들도 착한 쳐녀애들을 선택하였다. 고독한 노인들과 사업하려면 우선 마음이 온순하고 동정심이 있어야 하며 외로운 노인들에게 자신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처럼 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로사 금체로브나가 상기 부서 부장으로 일하는 동안에 노인들에게서 불만이나 신소를 들어본적이 한번도 없었다. 은퇴한 후에도 로사 할머니는 가만히 집에 앉아 있는 성격이 아니였다. 사회적 보호 체계에서 계속 일하면서 자신의 모범으로 젊은이들에게 인간성과 동정심을 교양하고 있다. 그들은 홀로 있는 노인들을 위해 가계, 약국을 다니며 집안 청소도 해 준다. 그리고 노인들을 모시고 병원도 다닌다. 로사 금체로브나는 또한 깝차가이고려인소수민족연합의 사업도 열심히 돕고 있다. 

-집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또 뭘 하겠습니까? 이렇게 젊은이들 사이에 있으면 마음도 더 젊어지는 것 같구요 재미있는 새 소식도 많이 알 수 있지요. 새 소식에 대한 말이 났으니 말인데 우리 부모들이 계속 <레닌기치>신문을 구독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조선학교 7년제를 필했으니 역시 신문을 읽었지요. 그런데 70년대에 어느 해인지 신문을 구독하지 못했는데 신문이 배달되더라구요…아버지가 알아보니 신문사에서 말하기를 열성독자에게 선물로 <레닌기치>를 일년치 신청해 주었답니다…- 로사 금체로브나가 부모들에 대한 긍지감을 품고 우리에게 이야기 하였다.자신보다 주위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앞세우는 김 로사 금체로브나의 온정과 원기가 항상 식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다.

남경자, 깝차가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