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미하일의 장편 해바라기 꽃잎 바람에 날리다(이하 해바라기 꽃잎으로 약칭) 는 1860년대 초에 러시아 극동지역 연해주로 이주해간 ‘조선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모두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고려인의 이주역사를 재구해 보이 고, 2장부터 화가를 꿈꾸 354 94 그리고 그의 자녀들도 계속해서 머슴으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러시아는 “저 알 수 없는 곳”(207면)이고, 또한 경흥 관헌에서는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에 갔다 돌아온 사람들을 시범적으로 처형한 터라 다시는 돌아올 수도 없는 곳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러시아로 떠난다. 그만큼 경흥에서의 삶이 간고했던 것이다.

최일수는 러시아로 떠나면서 마당에 무성하게 자라있던 대나무 뿌리를 캐서 가져 간다. 그리고 그것을 러시아에 가서 집 앞에 심는다. 한마디로 굉장하군요. 대나무는 이제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들의 고향을 생각 나게 해줄 테지요. 조선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대나무가 울창하게 잘 자라 게 되는 거라구요! 얘들아 알겠니? 대나무를 소중히 가꿔야 한단다.12) 경흥에서 가져온 대나무는 러시아 연해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고향이고, 망향의 매개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연해주에서도 대나무가 울창하게 잘 자라기를 바라고, 자녀들 또한 이 대나무를 소중히 가꾸며 비록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고향이지만 언제 까지나 잊지 말 것을 교훈한다. 최일수 일행이 연해주에 도착하기 전 이미 그곳에는 조선인들이 많이 건너와 정착 하고 있었다. 티진해 75가구를 비롯하여 시지미, 양치해 등 세 곳에 약 200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경흥ㆍ원산ㆍ회령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한양(서울)과 제주도에서 온 사람들도 있다. 이주 조선인 방채도는 십 년째 연해주에서 살고 있는데, 그 또한 가난을 면하기 위해 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이곳으로 왔으며, 러시아인과 혼인하여 딸까지 둔 그는 중국 훈춘을 오가며 흑담비와 도자기 원료, 화약과 신발 등을 거래하며 살고 있다. 연해주에 이주한 최일수 일행은, 다른 이주 조선인들처럼, 떠나온 고향에서 겪었던 12) 박 미하일, 해바라기 꽃잎 바람에 날리다, 새터, 1995, 234면.

이하 작품 인용은 면수만 밝힘. 13) 1878년 남(南)우수리스크 지방 한카이(Hankay) 수이푼(Suyfun) 수찬(Suchan) 지역 인구조사 에 따르면, 연해주 20개 마을 6,142명, 아무르 주(州)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 624명 등 모두 6,766명의 조선인이 거주한 것으로 집계되어 있다.김 게르만, 나는 고려사람이다, 국학 자료원, 2013. 197면. 박 미하일 소설 연구 355 핍박과 굶주림에서 벗어난다. 러시아 당국은 연해주로 이주해온 이민족들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정착을 지원하고 보호해준 것이다. 당시 연해주 정부는 이주 조선인들 이 겨울을 날 수 있도록 먹을 양식과 종자, 말과 황소 등의 가축과 농업 용구 등 필요한 물품을 지원하고, 이주 조선인 각자에게 경작할 수 있는 만큼의 땅을 제공하여 농사짓 게 허용했다. 러시아 정부는 연해주의 황무지를 개척하고 사람이 살 수 있게 하기 위해 이주 조선인을 이용한 것이다. 러시아 관리들이 이주 조선인들이 무엇 때문에 고향을 떠나왔는지 묻지 않고,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1880년대와 1890년대에 이르러 이주 조선인은 ‘한¬러 협정’으로 러시아 제국의 시민으로 등록할 권리를 회득하는데, 이후 이주민들은 본인이 원할 경우 러시아 국적을 취득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러시아의 극동정책에 따라 이주 조선인 수가 급증하고, 1917년경에는 8만5천 명에 이른다. 이 시기 이주 조선인들은 그 직업도 다양하여. 농부ㆍ직공ㆍ석수 장이ㆍ선박 기술자ㆍ

교사, 그리고 학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의 일상과 사회관계, 민족 특유의 문화, 언어는 떠나온 고향에서와 거의 다르지 않았다.14) 이주 초기 연해주 지역 조선인의 처지는, 다음에 보이는 것처럼, 이 지역을 관리하는 러시아 병사가 최일수 일행에게 던진 말에서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신들이 무슨 이유로 조선을 떠났는지는 물어보지 않겠소. 물어보지 않아도 뻔한 사실이니까. 당신들이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을 거요. 우리 정부는 어쩔 수 없이 러시아 땅으로 이주해오는 다른 모든 이민족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보호를 해주고 있소. 당신들이 원할 경우, 얼마간의 시간이 경 과하면 당신들은 러시아 국적을 얻을 수도 있소. 하지만 당신들 국적 그대로 남아 도 상관없소. 강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15) 1910년대에 접어들어, 연해주 정부의 적극적인 이주 정책에 따라 러시아 중, 서부 지역의 러시아인들이 대거 연해주로 이주해온다. 당시 연해주 정부의 당면 과제는 식량의 자급자족 문제였다. 그동안 러시아 극동지역에 거주하는 주민과 병사들의 식 14) 이에 대해서는 김 게르만, 「고려사람: 러시아 제국, 소비에트 유니언, 포스트¬소비에트 공간의 한인들」, 나는 고려사람이다, 2013 참조. 15) 박 미하일, 해바라기 꽃잎 바람에 날리다, 237면. 356 韓國言語文學第94輯 량은 선박이나 육로 수송으로 조달하고 있었는데, 선박 수송은 너무 길고 계절적 제한 을 받는 북쪽 항로를 이용하기 때문에 제때 조달하기가 쉽지 않았고, 육로 또한 험로라 서 곡물 수송에 어려움을 겼고 있었다.

이에 따라 연해주 정부는 이 지역의 광활한 황무 지를 개간하여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방안의 하나로 러시아인의 극동지역 이 주를 정책적으로 펼친다. 연해주 지역을 관할하는 지휘관 레자노프의 말대로, 이주 러시아인들은 “이곳에 임시로 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정착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연해주 당국이나 관리들이 이주 조선인에 대해 우호적이고 각양의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연해주 정부는 이주 조선인들을 통해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업 생산량을 증대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최일수 일행이 연해주에 이주하여 농사를 지은 해에는 다행히 풍년이 들었다. 연해 주 지역에 주둔해 있는 병사들의 식량도 댈 수 있게 되었고, 또 계속해서 이주해오는 조선인들의 정착을 도와줄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최일수를 비롯한 이주 조선인들 은, 떠나온 고향에서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궁핍과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러시아 정부와 관리들이 아무리 친절을 베풀고 여러 가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하더라도, 당시 “러시아인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선량”했더라도 “타국은 타국일 뿐”이었던 것이 다.16) 더욱이 러시아인의 이주가 점증하면서, 일부 러시아 병사들은 국경을 넘어오는 조선인의 소를 빼앗거나 재물을 강탈하기도 하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그들 은 먼발치에서 이주 조선인이 눈에 띄기만 해도 놀려대거나 큰소리로 욕설을 퍼붓기 일쑤였고, 공공연하게 불만을 표시하는 일도 잦아졌다. 민족 차별 또한 곳곳에서 벌어 졌다. 우수리 근교의 철도 건설 공사장이나 광산에서는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러시아 인 노동자 임금의 절반밖에 주지 않았다.

정덕준, 김게르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