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와 <노인단>원로회 회원이며 30년간 지질학자의 년한을 가진 김 릴리야 기보예브나의 생활은 모험영화와 같다. 고령이지만 풍부한 유머, 낭만적인 성격, 근면성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의 존대와 지지는 릴리야 할머니로 하여금 항상 정력과 낙천적 기분을 보존하게 한다.  

순결한 원천으로부터

지난 해에 카자흐스탄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정주 80주년을 기념하였다. 김 릴리야 기보예브나는 강제이주의 무서운 비극에 대해 말만 들은 것이 아니라 두살이 된 릴리야가 부모와 함께 강제이주를 직접 겼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저는 1935년에 연해주의 포시예트구역에 있는 사루비노촌에서 태여났습니다. 이 농촌은 북조선의 국경으로부터 40키로메터 상거한 곳에 있었습니다 – 릴리야 기보예브나가 회상한다 – 부모들이 이야기한바에 의하면 내가 태여났을 때 한 노인이 들어와서 내가 오래 살지 못한다고 말하더랍니다. 그 노인의 불길한 예언에 앞서 미리 말하는바 내가 이미 90고개를 넘어섰거던요!

릴리야는 화목한 큰 가정에서 여섯번째 아이였다. 아버지 기보이는 그의 형들과 마찬가지로 세습목공이여서 조선소에서 일했다. 아버지는 한반도의 북부지방이 고향이었고 어머니는 남쪽 즉 부산 출신이었다. 외가는 릴리야의 어머니에게 조선 이름을 준 것이 아니라 안나라는 러시아 이름을 주었다. 그것은 외할아버지가 개신교 목사였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수년이 지난후에 알게 되었다. 이전에는 종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위험하게 여겼다. 모국어로 말하는 것도 역시 그랬었다. 때문에 릴리야 기보예브나가 모국어를 알기는 하지만 말은 잘 하지 못한다.

…기보이와 김 안나 부부가 탄 화물열차가 발하스 호수 연안의 부룰류-또베라는 작은 역에 멈췄다. 풀도, 나무도 볼 수 없었다. 계선장이 두개고 선박 세척뿐이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바다를 보자 이 곳에 남자고 말했습니다. 바다가 아버지에게 가깝기에 말입니다 – 릴리야 할머니가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 우리가 정착한 곳에 야채가 전혀 자라지 않았습니다. 야채, 감자, 과실을 남쪽에서 철도로 운반하여 화물선 (갑판이 없는)에 옮겨실으면 이상에 지적했던 선박 세척이 발하스까지 끌고 갔습니다. 선박은 <꼼무니스트>, <레닌>, <스탈린>이라는 이름을 달았습니다. 또 한가지 문제는 음료수가 없는 것이였지요. 탱크에 실어와서 배급표에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일인당 10릿터씩 말입니다. 릴리야 기보예브나는 학교를 다니던 그의 언니들이 뚜르크시브 철도건설에 참가하였으며그 후에는 어로꼴호스에서 일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어린 릴리야도 가만히 앉아있지 않았다. 어부들이 해안에 버린 작은 물고기들을 주어 어머니와 함께 손질하였다. 그것을 말리우거나 구워서 식구들이 먹었다.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김씨네 가정 (그 후에 또 두명의 딸을 낳았다) 은 굶지 않았다. 그것은 아버지가 아주 부지런하고 손재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릴리야의 아버지는 못하는 일이 없었다. 퇴근하고는 카자흐인들이 사는 집집에 다니면서 어린이를 재울 요람과 밥상, 다른 물건도 만들어 주었다. 대신 아버지는 밀, 꾸르트, 이림시크 기타 식품을 집에 가지고 왔다.

릴리야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전쟁시기에 사람들이 특히 어렵게 살았다. 사람들은 보잘보잘 것 없는 양의 흘레브와 설탕을 배급받기 위해 긴 차례를 섰다. 얼마 지나서 강제이주된 독일인, 체첸인 기타 민족들이 나타났다. 힘들었지만 모두가 화목하게 살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한해서 카자흐스탄이 두번째 조국으로 된 것이다.

사랑하는 직업

기보이네 가정이 발하스로 이주하자 릴리야가 그 곳에서 여성중학을 필한후 렙싀역에 있는 우신스끼명칭 학교에서 상급반을 졸업했다.

-우리에게 <이동 금지>라는 딱찌가 찍힌 것을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노보시비르쓰크로 가려고 했을 때야 알게 되었습니다 – 릴리야 기보예브나가 회상한다 – 러시아로 내 보내지 않았기에 나는 끼로브명칭 알마아타국립대학을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지질학자로 30여년을 일하는 과정에 많은 표창과 감사장을 받았습니다.항상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대담한 우리의 주인공은 1953년에 이상에 지적한 대학의 지질-지리학부를 필하여 지질학자의 직업을 전공했다. 그 당시에 이 직업이 아주 인기가 있었다.

-대학졸업후 동카자흐스탄으로 파견되어 주 지질학 관리국에서 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급지질학자로 일한 나는 쁘레드고르노예 지질탐사대에 소속되었는데 일하기가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지형촬영팀이 나타나자 일하기가 더 재미있었습니다. 우리는 지질탐사 지도도 작성하고 유용광물도 찾았으며 여러가지 탐구사업도 했습니다. 지질학은 과학과 생산 사이에 있는 흥미있는 분야입니다. 국가수뇌자 누르쑬딴 나사르바예브가 <제 4차 혁명의 조건에서 발전의 새로운 가능성>이란 교서에 우리 나라의 미래에 이 분야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나는 카자흐스탄이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30개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 릴리야 기보예브나가 확신있게 말하였다.

그 시기에 카자흐스탄의 동부에서 수십명의 학자들이 일했는데 그중에는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온 학자들도 있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바이다. 그들은 논문을 성과적으로 통과시키고 카자흐스탄의 동료들을 돕기 위해 이곳이 왔다. 학자들중 한 젊은이가 생글생글 웃는 낙천적 성격을 가진 고려인 아가씨에게 주목을 돌렸다. 총각은 오래 생각지 않고 릴리야에게 청혼을 하였다...젊은 가정에 세 쌍둥이가 태여났다. 그 여아이들에게 갈리나, 라리사, 나탈리야 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들은 모두 좋은 교육을 받고 손자 둘과 손녀 하나를 낳아 부모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그런데 릴리야의 첫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모스크바출신인 남편은 그곳으로 되돌아갔다…

낙심할줄을 모르는 릴리야는 시간이 흐른뒤에 지질탐사대 상급지질학자 나움 스뚜쳅쓰기와 재혼하였다.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말이 났으니 말인데 그는 널리 알려진 이르띄스산지 개척자이다. 저명한 학자인 그는 많은 정부표창을 받았다.

-금년에 나움이 우리 곁을 떠난지 10년이 됩니다 – 릴리야 기보예브나가 슬픔이 섞인 어조로 말한다 – 그러나 나는 걸어온 생에 대해 조금도 유감을 품지 않습니다. 후회감이나 슬품에 잠기기에는 생이 너무나 짧습니다. 이것을 확증하기 위해 한가지 사건을 이야기 하겠습니다. 친기스에서 있은 나의 마지막 탐사는 세미빨라찐스크 핵시험장에서 새 시험과 때를 같이 했습니다. 우리는 방사성 광물이 표시된 곳에서 지도를 작성하였습니다. 시험을 할 때 그 곳에 있는 것이 생활에 위험하다고 누구도 우리를 경고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방사성을 받았으나 살아남았습니다! 세 쌍둥이가 방사성의 <선물>이라고 봅니다. 저의 일가나 남편의 일가에 세 쌍둥이를 낳은 일이 없거던요, 이를테면 부드러운 역변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핵무기를 거절하고 핵시험장을 닫은데 대해 온 세계가 카자흐스탄과 우리 대통령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사회사업에 참가

동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는 사회에서 안정성을 공고화하며 친선과 세대의 후계성을 확대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김 릴리야 기보예브나가 이 소수민족문화연합의 시초를 닦아놓았으며 카자흐스탄민족회의 위원, 카자흐스탄-한국 <광선> 콜레지 전 교장 강 니꼴라이 쎄르게예위츠가 연합을 설립하였다.

-고려인문화중앙의 첫 위원이였던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 릴리야 기보예브나가 말한다 – 우리는 민족 전통과 언어를 되살리며 청년들을 카자흐스탄의 애국주의의 정신으로 교양하며 그들과 교제합니다. 저는 현재 <노인단>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힘이 가능한대로 사회사업을 돕고 있습니다. 릴리야 기보예브나는 독서를 즐기며 정치방송을 보며 민족요리를 장만하기를 좋아합니다. <즐겁게 생을 살자!> - 바로 이것이 그의 구호입니다.

김 예와,

 우스찌-까메노고르쓰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