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소련 연방의 고려인들을 규합할 것을 목적으로 했던 두 개의 사회단체 즉 BACK (바스크-전 소련연방고려인협회연합, 이하 BACK)와 ACOK (아소크-고국통일연합회, 이하 고통련)가 고려인 사회운동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 단체는 민족 규합에 대한 상징으로 고려인의 기억에 깊은 흔적을 남겼는데 소련고려인 역사학자들은 이 점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BACK와 고통련에 대한 학문적 자료들이 전혀 없다는 역설적인 현상을 발견하였습니다. 즉 카자흐스탄,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고려인들이 저술한  역사에 관한 저서나 단체의 단행본에는 상기 단체들에 대해 전혀 기술하지 않거나 빈약한 자료들 뿐이였습니다. 소련 고려인들에 대한 편람 및 선집에서도 두 단체에 대한 자료는 없었으며 발행된 사진 앨범들에서도 BACK와 고통련에 관한 사진들을 찾지 못했고 인터넷에서 찾아보려는 시도도 무용지물이었습니다. 단지 기자들이 쓴 몇 가지 기사를 볼 수 있었는데 그것도 상기 두 단체의 대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BACK와 고통련에 대한 <그림>이라도 찾아보려고 노력했으나 BACK 창립 대회의 사진 2장 뿐이고, 로고 및 단체의 용지나 직인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 원인을 밝힐 시간이 없으니 현재 있는 자료로 제한하여 정리하겠습니다. <고려일보>, CIS 고려인들의 정보 포털 <Arirang.ru> (신 드미트리, 모스크바), <러시아고려인 백과사전> (모스크바, 2003년) 자료들 그리고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 10주년> (알마티: 다익 프레스, 2000년) 서적이 본 기사 작성의 기본자료입니다.고국통일연합회(ACOK): 고통련 설립에 관한 창립 회의가 1989년 9월 17일에 타쉬켄트에서 개최되었습니다. 8개 공화국(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러시아, 우크라이나, 몰도바 등)에서 125명의 대표들이 창립 회의에 참가했으며 그들은 회의에서 고통련 강령과 정관을 채택했습니다. 이 회의에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협력>을 비롯하여 단체의 기본 목적과 과업이 확정되었습니다. 초기에 고통련은 북한의 지지를 받으면서 주도권을 쥐었습니다. 고통련은 모국어와 태권도 교육, 소규모 예술단을 조직했으며, 민속 공예품과 미술품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일은 모국과 연계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고통련을 거쳐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고려인 수천 명이 무료 혹은 특별한 조건으로 역사적인 조국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소련 고려인 다수가 고통련의 행사나 다양한 사업 형태에 연관되었으며, 이로 인해 고려인들이 북한에 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BACK가 설립되고 소련이 붕괴된 후 CIS 국가들 중에 한국과 국교를 수립하고, 독자적인 고려인협회들이 설립됨에 따라 고통련의 역할이 감소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90년대 언론계와 학계에서는 <1980-1990년대에 형성된 고려인단체 중에서 BACK의 역할이 중요했다> (니콜라이 부가이 박사)라고 평가했습니다.

고통련이 구소련의 전 지역에 분회, 하위 단체, 지부 등을 조직했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89년에 고국통일연합회 카자흐스탄 분회가 설립되었는데 널리 알려진 고려극장의 성악가 김 블라디미르가 회장으로 되었습니다. 이 단체를 거쳐 여러 해 동안 약 천 명의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이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1994년 9월에 고국통일연합회 명칭이 <통일>로 변경되었으며 카자흐스탄 분회도 명칭이 변경되면서 강 라트미르 막시모비치가 회장이 되었습니다.그는 고통련의 성장과 발전과정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했습니다. 공학박사 김 파벨 하리토노비치는 우즈베키스탄의 건설분야에서 지도자로 일했고, 우즈베키스탄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대의원으로 네 번이나 선출되었으며, 소련의 국가표창(1982년)을 받았으며 기타 많은 소련 훈장과 메달을 받은 바 있습니다. 

1993년 9월 17일 모스크바에서 구 소련의 전    공화국에서 온 450명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   최된 고통련 제2차 대회에서 단체의 명칭을 국제고 려인협회 <통일>로 개칭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강 파벨 하리토노비치(강일)가 고통련과 국제고려인협회(MKA)의 회장으로 선출되어 생의 마지막 날까지 활동했습니다. 이 두 단체는 도쿄에 있는 <범민련>에 속하였는데 거기에는 친북한 단체 <조총련>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고국통일연합회, MKA <통일>, MCOOK <통일> 즉 국제고려인사회연합, 범민련으로 개칭되었으며 초대 회장에 석 안드레이 바실리예비치(1996-1999), 다음에는 리 겐나디 무니로위츠(리동철, 1999-2006), 현재는 김 펠릭스 페트로비치 등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련의 정관(1987.9.17)에는 목적과 과업이 변경되지 않고 이전대로 남았습니다. 현재 CIS의 6개 나라, 즉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타지키스탄, 우크라이나에 형식적으로나마 범민련의 대표부가 남았습니다. 전 소련연방고려인협회연합(BACK): 알 수 없는 원인에 따라 BACK 창설일에 대한 상이한 의견이 있다고 러시아의 저명한 학자 니콜라이 부가이 박사는 말했습니다. : 창설일에 대한 일부 의견은 1991년 10월 2일이고 다른 의견은 10월 6일입니다. 카자흐스탄공화국 고려문화중앙의 초대 회장 한 구리 보리소비치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1990년 3월 19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소련고려인 제1차 창립대회에서 BACK가 결성되었다>. 실제로 BACK는 1990년 5월 19일에 등록되었습니다. 때문에 BACK 창립 10주년에 즈음한 기자회견이 2000년 5월 19일에 실시한 것은 의도된 것입니다. 대회에서 BACK의 기본 문헌인 정관이 채택되었고 지도 위원들이 선출되었습니다. 즉 상무위원과 중앙위원들이 선출되었습니다. 역사학 박사 박 미하일 교수가 만장일치로 BACK 회장으로 선출되었는데 그는 준비 사업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대회에서는 또한 부회장들, 집행위원 및 감사가 선출되었습니다.

BACK의 정관에는 단체의 기본 목적이 명시되었습니다. 즉 1) 스탈린 탄압 정책 피해의 극복, 2) 소련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의 권리와 자유 실현 증진 3) 고려인들의 자주적 활동과 발전 그리고 사회정치 생활에 참여 4) 모국어와 민족문화의 부흥 5) 과학, 기술 및 문화 창작 발전 등. BACK의 박 미하일 회장은 “우리가 어떤 협회를   조직했는가, 그 협회가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추구할 사회정치 단체로 가겠는가, 아니면 문화 및   고려인들의 명예회복 다시 말해서 사회적 공정성   문제, 언어와 문화 부흥 등 기타 문제에 주목을   더 돌려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처음부터 생겼   습니다. 당시 토의 안건으로 되었던 한 가지 원   칙적 모멘트가 있었습니다. 일부 고려인들은 지역별 자치제를 조직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우리는 지역별 자치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채택 했습니다” 라고 회상을 했습니다.창립식에 구소련의 모든 가맹공화국 대표들이 참가했습니다. 한 구리 보리소비치의 말에 의하면 “창립된 단체의 명칭에 관해 열띤 토론이 있었는데, 왜냐하면 일부는 <전러협회 조선>, 다른 일부는 <전러협회 한국>이라고 칭할 것을 제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관을 준비한 위원회의 요구에 따라 북한과 남한에 대한 중립적 입장을 강조하기 위해 이에 맞는 명칭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BACK의 지원 하에 짧은 기간에 지방에서 큰 조직 사업이 진행되었고,  과업에 따라 수많은 행사들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BACK 지도부의 위원들 사이에 의견 충돌이 생겨 보다 높은 수준 즉 중앙위원회로 넘어갔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4차 BACK 비상회의가 긴급히 소집되었습니다. 소련의 모든 고려인들을 규합할 사명을 지닌 전국단체 지도부의 분열에 대해서는 보존되어 있는 2개의 문건에 나타나 있습니다. 첫 문건은 <이것이 단합에 지장을 준다>라는 박 미하일 회장의 서신(1991년 10월 7일)이고, 둘째 문건은 고통련과 국제조선친선협회에 보내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의 호소문입니다. BACK 회장의 서신에는 역사학 박사 신 알렉세이 세묘노비치와 그의 지지자들을 비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신 알렉세이의 지지자들로(주로 모스크바 거주자들) 이루어진 반대측은 투표권을 가진 대표들로서 그 수는 3분의 1에 달했습니다. 그들은 2001년 10월 5일부터 7일까지 모스크바 부근의 코나코보에서 진행된 창립대회에서 <러시아고려인협회>를 불법적인 단체로 선포했는데 그 이유는 러시아연방의 지역별 고려인 단체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로 인해 전 소련연방고려인협회연합(BACK)은 타격을 크게 받았습니다. 전국 수준의 두 고려인 단체에 보낸 BACK의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호소문에는 다음의 과업을 해결하기 위해 합동전원회의(혹은 상무위원회 합동회의)를 소집할 것을 고통련과 국제고려인협회에게 제의했습니다.   즉 1) 조정국 설립 2) 고려인 사회운동의 전략과 전술의 공동연구 3) 소련 고려인들의 이주와 연관된 과업 확정 4) 경제프로그램 실천, 은행의 설립 및 기타 등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양측에서 그 어떤 협력이나 조정을 위한 제의도 없었습니다. 얼마 후에 소련이 붕괴되면서 BACK의 활동은 중지했고 이에 앞서 제4차 비상총회에서 박 미하일과 그의 첫 대리 허진, 사무국장 황 유리 등이 사직서를 썼습니다. 

 1992년 2월 29일에 알마아타에서 개최된 BACK 제2차 대회에서 단체 명칭을 국제고려인연합회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법인으로서의 BACK는 공식적으로 2006년 3월 3일에 청산되었습니다. 기타 CIS의 고려인 단체: 좀 늦게 즉 1992년 7월 16일에 전 소련최고회의 대의원이였던 김영웅에 의해 국제고려인협회연합회 (MKKA)가 공식적으로 창립되어 등록되었습니다. CIS 고려인들의 민족문화연합과 연관된 문제 조정이 이 단체의 권한이 되었고, 김영웅이 상기 단체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법인 활동을 중지함에 따라 2008년 3월 28일에 공식적으로 청산되었습니다.  같은 해 즉 1992년에 러시아연방 법무부에 러시아고려인협회 (AKP)가 등록을 했습니다. 1993년 7월에 러시아고려인협회 연합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단체의 새 지도자들이 선출되었습니다. 단체는 통일문제에 관해서는 중립적 입장을 취려고 시도하는 한편 친남한 태도를 보이는 BACK를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포시에트 구역에 고려인 디아스포라 민족문화자치제를 제공하는 문제에 들어가서는 BACK와 비슷한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습니다. 러시아고려인협회는 러시아 내부에서만 활동하는 단체로 되었습니다. BACK는 고통련과는 달리 활동을 계속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김영웅의 국제고려인협회연합회와 CIS 및 발트해 연안 국가들의 국제고려인협회연합회(MCKA, 2001년 2월 창립)가 구소련의 정치 및 사회경제적 현실에 적응되었기 때문입니다. 상기 두 단체 중 그 어느 단체도 CIS에서 고려인 사회운동의 공동 이념을 준비하지 못했으며 활동의 기본방향에서 의견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였고 지도자들간의 자존심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고려인 사회단체들이 실시하는 사업의 범위, 형태, 내용에서 현저한 수준 차이가 발생했습니다. 소련 해체 후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단체가 당면한 문제는 우선 자신들이 속한 국가의 내부에서 단합하는 것이며, 하나의 공화국 단체로 통합하여 독립적이고 경제적인 토대를 만드는 것 이였고, 국가정책의 지향 방향에 따라 국제적 연계를 새롭게 발전시킬 과업이 대두되었습니다.1990년대 중반에 CIS 국가들의 정치 및 사회경제적 발전의 전략적 방향에서 본질적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거주국가의 정책에 따라 형식적이나마 과거에 한 때 일치하였던 고려인 사회운동에서 이견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내부와 외부 요인으로 인해 발생한 차이가 실제로 CIS 나라들 우선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단체 활동의 많은 면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발전 단계, 지식인부터 시작하여 기업가에 이르기까지 리더들의 계승, 공동의 기본 목적과 과업면에서 다양성이 발생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공통의 길에서 벗어나 상이한 길을 선택한 고려인 운동의 차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사에서 다루겠습니다.

 

김 게르만 – 역사학 박사, 건국대학교(서울) 교수, 

                  알-파라비 카자흐국립대 한국학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