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년처럼 금년에도 2017년을 보내고   새해 2018년을  맞이하면서  늘 소란한 공상에 잠겨 잠못이루며  지금까지 걸어온 과거를  회상하여 보았다.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이 세상에 태여나    부모님슬하에서 자란 고향마을, 대자연의 풍경  그리고 저녁마다 초가집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냄새 고약한 마당구석에서 공을 차며 어린 시절을 보내며 같이 자란 친구들,  나의 어린  가슴속에 참다운 애국주의 사상을 가슴깊이 심어주었고 나의 세계관 형성에 적지않은 영향을 준 훌륭한 고향선배들이 우선 눈앞에 떠올랐다... 

...조선반도에서 남북전쟁이 터지자 그때로부터 고향을  이별했고 나는 먼 타향인 카자흐스탄에 머물게되었는데  그 때로부터 벌써 70년이란 긴 세월이 지났다.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몹시 그립고  보고 싶다.

...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에는   신문, 라디오, 전화 ,전기, 우편국. 학교는  물론 병원도   그리고 아무런 공공시설도 없었다. 아직도 내기억에 남아있는것은     누가 앓게 되면 무당이 나타나 굿을 하며 무당은 환자에게 침을 놓고  꽹가리를 치며 환자의 주위를 세번 빙빙 돌면 서  '' 아왕 임금만수야'' 를 부르는것이 빈번한 현상이였다. 나는 어린 시절에  벙거지를  손등으로 밀어 올려 쓰고 바로 우리 농촌마을 뒤에 있는 뒷동산에 올라가 먼 예로부터 우리 삼천리벌을 꿰뚫고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따라  아득히 가느다롸하게 멀리 보이는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을 바라볼 때면 마치 우리 민족의 역사와 찬란한 문화의 흐름을 한눈에 담아보는듯 했고 어린 가슴은 지을수 없는 긍지와  희망찬 사명감으로 부풀어 오르군 했다. 우리의  이웃 마을에 있는   최촌  교회는   우리 농촌에 사는 농사꾼들이 서로 만나며 정보를 교환할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 일요일이면 주변 마을들인 무어촌 , 정촌, 벌농막 그리고 월장리 촌들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오기 때문에  아침부터 사람들이 많았다.  . 특히 젊은 처녀들은 논밭에서 해볕에 탄 검은 얼굴을 희게 화장을 하고  모두 깨끗한 흰색 한복 저고리에 긴 자지색 옷고름을 매고  새까만  치마를 입고 짚신대신에 고무신을 신는다. 모이기만 하면 서로 교제를 하지만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모여서 이야기했다. 힘겨운 농촌생활에서 육체적 노동으로 인한 괴로움을 잠간동안이나마  싹 잊어버리고 불안을 느끼지 않는 가벼운 마음으로 최촌  교회에 나와 최장노님의 설교를 들으며 금년에도 풍년이 오기를 하느님께 정성껏 기도하는  바로 이순간이  행복한 순간이였을것이다. 

그런데 아침 저녁 소를 몰고, 저넉 늦도록 논밭에서 일하며 소꼴을 베며 늘 힘겨운 일을 많이하는  농촌총각들도 자기네들끼리 모여 운동시합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여러 농촌들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운 처녀들의 환한 얼굴들을   이 교회에서 일요일에만  볼수 있다는것이다. 따라서 여기는  정보교환장소일뿐만 아니라  농촌 문화의 중심지라고도 말할 수 있었다.  여러 주변 마을들에서 살고 있는 처녀들은 여러 교인들앞에서  마치 자기 선을 뵈우려는듯  일요일이면  반드시 이 교회에 나타나는것이였다. 교회무대에서  촌색시들이 곱게 화장한 얼굴을 활짝 들고 찬송가 합창을 시작하게 된다.  관람석에 앉은 총각들은 자기 마음에 드는 처녀를 남몰래 선택하고는 혼자서  기뻐하며 어떤 총각은   혼자서 미친놈처럼 큰소리로 웃기도 한다. 촌 색시들의 얼굴에는  청춘의 가슴에 활짝 핀  꽃에 어떤 총각이  나비가 되어 자기에게로 날아올것인가를 안타깝게 기다리는듯 한 내부심정이 엿보인다. 처녀들이 높직한 교회

무대에서 한창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한처녀는 관람석에서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한 총각의 눈과 허공에서 마주첬다. 겁을 먹은 그녀는 시급히 그의 시선을 피하했다. “나도 소학교도 못다녔지만  저런 촌놈이 구혼하게 되면  그에게 시집을 가야하는가 ?“하고 겁을 먹은  그녀는  합창이 끝난후 최장노님을 찾아왔다. 

- 우리 촌색시들은 반드시 이 교회에 모이는 학교문턱을  한번도 넘어보지 못한 촌총각들에게 모두 시집을  가야 하는지요 ? 그리고 일생동안을 호미자루를 내저으며  이 촌구석에서만  살아야 합니까 ?– 하고 질문했다.

-학교가 있어야 다니지  , 학교가 없는걸 어떻게 다니나 ? 삼천리, 월장리, 송죽지,오응리.천사리,도섭리에도 없지 , 하긴 바로 얼마전에 일본사람들이 많이 사는 우리 낙도면 지경리에  유일한 4년제 일본소학교가 하나 생겼다. 

- 그 먼 곳으로 어떻게 통학해요 ?우리 조상들은 지금까지 학교도 없이 살았는가요?  왜 우리 농촌에는 학교가 없어요 ?

- 학교문제는 우리 교회에서 결정하는것이 아니오. 우리 교회는 다른 사명을 띠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우리가 죽은 후에 천당에 가기 위해 예수를 믿으면서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는곳입니다.

- 그건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학교도 중요해요 . 

-학교가 있어야지.  

- 아니 그래두 말해봐요,  우리 정촌사람들은  모두가 일은 잘하지만  거의 다 문맹자요 ? 낫놓고 기역자도 몰라요.  교회에서는 우리 말도 가르처야 합니다. – 라고 크게 말했지만 아무런 결론에도 이르지 못했다. 사실 가르칠 사람도 없거니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가르칠 장소도 없었다.

  이 때 그 촌색시는 

- 나는 무식한 저 총각에게 시집 안갈테야 ! – 하고 갑자기 소리치며 크게 엉엉 울기 시작했다 이 때 곁에 있던 한 처녀도 

- 나도 그렇다. 나는 학교에 다니고 싶다. – 하고 소리치며 둘이는 손을 잡고 크게 울기시작했을 때 더 많은 처녀들이 모여 서로 서로 손을 잡고 모두  엉엉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든것이다.그날  교회는 처녀들의 울음소리로 끝났다.

평양에서 신학교를 졸업한 최장노님은   문맹퇴치사업을 우선적으로 실시해야 할것이 아닌가. 최장노님은   문맹을 퇴치하며  우리 말을  가르쳐야 한다는것은 자기가 무엇보다도 먼저  실시해야 할  중요한 과업이라는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대책을 취하지 않았다. 일본식민지통차하에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고향사람들은 교육기관도 없이 그저 지금처럼  해마다  풍년인    농촌에서   ’’아왕앙금 만수야’’  만  부르면서 살면 세상만사가 다 해결된것으로 여겼는가 ?

우리 고향은    외부세계와 완전히 분리고립되어  외따로 떨어저 있는것은 물론 아니며 유기적으로 연결되었었다.  최근에 이르러 우리 고향의 적지 않은 젊은이들은 자기 농촌을 떠나 평양으로 서울로 혹은 일본으로 공부를 하려 떠났고  많은 젊은이들이 귀향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우선 전기시설을 차츰 가설하는 등 기타  농촌을 번영발전시키는 일에 착수 하고있었다 지경촌에 4년제 소학교가 생긴것은    대동아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며  이윽고 고향마을아동들이 모두가 다 학교에 다닐수 있게 된것은  큰 사건이였다. 평양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귀향한 젊은 이 항선은  이 학교의 교원이였고 우리들의 담임선생이 였다.  그는  선량하고, 친절하고 정직하고 인정있고 동점심있는 인간이 되라고 어린 우리들을 교육교양했다. 그리고  자기 부모형제를  사랑하며 자기 마을 ,나아가서는 자기 민족을  사랑 하며 보위해야 한다는 애국주의 사상으로  어린 세데들을 교육교양했다. 자기 민족의 번영발전을 위해 기여하며 헌신하는것은 애국자의 길이며 최대의 영괄의 길이라고 늘 강조했다.그는  내 가슴 속 깊이  애국주의 사상을 심어주었고 바로 이것은  나의 세계관 현성의 기초로 되었다

그는 자라나는 후대들을 교육교양하는 교원이라는  자기 직업에 대한  큰 만족감을 느꼈고 우리들앞에서 늘 뽐을 내며 크게 웃었고 가슴을 펴고  활기차게 걷군 했다. 그는 우리 어린 세대들의 모범이였고 사랑이였고  이상이며   희망이였다. 많은  어린이들은 그를 본받아 자기도 커서  앞으로 평양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는  교원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세월은 흘렀다. 국내외정세는 그야말로 급변하고있었다. 위대한 붉은 군대는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고  영웅적 투쟁을 전개한 결과 백만대군인 일본관동군은 무조건 항복을 했고 조선은 일본식민지통치에서 해방되었다 

38선이북에는 공산정권, 이남에는 자본주의체제가 수립되었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은 정권수립첫시기부터백성들을 우리 편과 적대편으로 갈라놓고 적대편을 심하게 차별했다 예로 ,지주들은 토지를 몰수당했고 알몸으로 집에서 내쫓았다. 그리고 얼마안되어  조선에서는   남북전쟁이 터덨다 .우리 농촌은 불타없어젔고 부모님도 세상을 떠났고 내고향은 생지옥으로 변했다.남북조선에서는 모두 수백만명의 인명이 희생되었다.

가열한 전쟁의 포화속에서 거세찬 소용돌이에 휘말려 나는 그곳에서 빠저나오지를 못했고  수년이 지난후에 이윽고 내가 처음으로 정착했고 어느 정도 자유를 느낀것은  일년중 12달이 겨울이며 나므지가 봄이며 6개월간이 밤이고6개월간이 낮이라고 말할수 있는 지도에도 없는  쏘련의 북극지방이였다. 나는 여기서 어떤 때는 언 사슴고기를 칼로 깎아먹기도하면서 2년동안을 살았고 나종에는 추운 우랄,시베리야지방을 거처 10년만에 내고향처럼 춘하추동의 계절이 선명한  카자흐쓰딴 알마따에 도착하게 되었다.  때는 봄이였다. 푸른 하늘에 높이 솟은 천산의 산기슭에는 백화가 만발했고 수10억만개의 꽃송이들에서 내뿜는  그윽한  꽃향기에 취한 나는  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선량하고,친절하며 고상한 품격을 소유하고 있으리라는데 대하여 조금도 의심하자 않았다.. 얼마후에 나는 여기에 정착하게 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 뒷동산에 올라가 

많은 공상을 하였지만 그러나 내가 앞으로  먼 타향인 카자흐쓰딴에서 살게 되리라는데 대해서는 꿈에서도 생각한 일리 없었다.

운명이라는게 도대체 무엇인가 ? 카자흐쓰딴에는 카자흐인 , 로씨야인들을 비롯한 약 100여민족이  한데 모여 아무런 민족차별이 없이 아주 화목하게살고있는것이 나의 마음에 들었다. 나는  처음으로 여러 민족들과 접촉하면서 느낀것은 그들은 모두다  인간관계에서  친절하고 인정많은 정직한 사람들이였다는것이다.  나는  100여민족이 아무런 민족적 차별이 없이 서로 도우며 화목하게 사는 아주 고상한 품성은 무엇보다도 나자르바예브대통령의 경험많은 다민족국가정책의 결과라고 여겼다.이윽고  나는 카자흐쓰딴 공민이 되었고 국가에서 주는 2칸짜리 문화주택을 무료로받았다.  나는 처음에 핵물리학연구소에서 일어를 로어로 번역하는 통역원으로 일을 시작하였다.그후 종합대학 ,기자대학, 사범대학 등에서 젊은이들에게 일어와 한국어를 가르첬으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근 70 년동안을 쏘련에서 일했다, 대학생들과의 생활은 늘 분주했지만 그러나 적당한 시간을 이용하여 

여름철에는  학생들과  자주 캅차가이호수로   수영을 하러 갔고 또 경치좋은 일리강변으로는 낚시질을 하려갔다.겨울에는 스키를 타며 침불라크를 오르고 내린 일이 한두번이 아니였다.대학에서 조직되는 야유회에서는 젊은 대학생들과 같이 춤도추었다. 이하루 또하루 세월은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젊은 대학생들과 늘 젊은  기분으로   그들과 함께 제기되는 이러저러한 문제들을 토의해결하면서 그때마다 나는 자기자신을 그들과 같은 젊은이로 여겼다.

그 어느 날이였다 . 가까운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 , 노래잘하는  당신을 우리 노인단에 가입했는데 다음 일요일에 참석하시우.

아니 누가 노인이란 말이야 ? 

노인은 바로 너다. 네가 노인이다.   

나는 전화수회기를 놓자마자 부엌으로 달려가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자세히 드려다보았다. 푸른 하늘에 높이 뜬 흰구름을 정신없이 막 따라가다 문뜩 서서 뒤돌아보니 , 그사이에 나의 고귀한 청춘은 이미  흘러가버린지 오랐다. 나는 다음 날 대학에서 퇴직하고 년금생활에 들어갔다.  수년후이면  90세가 되는데 그중 나는 쏘련땅에서  여러 선배들의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  아무런 민족차별을 받지않고 근 70년동안을 살았다는것이다. 지금 늙으막에 무엇보도 더 기쁜것은  해마다

빠짐없이 신년이 오면 이미 대학을 졸업한지 오란 제자들이 꽃따발을 들고 우리 집에 나타나며 이미 늙었고 이제는 그들으ㅏ 교원이 아닌 나에게 신년을 축하하는것이다. 금년 신년에도  7 ~ 10년전에 대학을 졸업한 나따샤,아이게림 ,마리야,카이라트 꼬스쨔 등을 비롯한  여러명이 자기들의 어린    아들딸들을 데리고 큼직한 꽃따발을 들고 우리 집에 나타나 신년을 축하하는것이였다.  그들을 통하여 차차 알아보니 많은 제자들이 일본,한국 로씨야에서는 물론  우리 카자흐쓰딴에서도 인민경제의 여러 분야들에서 성실히 일하고 있다는것이며 그중 많은 제자들이 시집장가를 갔다는것이였다. 이것은 나를 몹시 기쁘게 했다. 그들은 

 “다민족국가인 카자흐쓰딴의 번영, 발전 및 보위를 위하여 헌신하는것은 애국자의 길이며 가장 영예로운 길’’이라고 내가 늘 말하든것을 잊지 않고 있었으며 나를 만날  때마다 이 구절을 반복하는것이다.

해마다 신년이면 나를 축하하기 위해 찾아오는 제자들을 볼 때마다 어린 시절이였든    그 때 고향마을에서  왜 학교가 없는가 ,학교에 다니고싶다하며 많은 처녀들이 서로 손을 잡고 엉엉 울며 소리치든 장면이  어럼푸시 늘 내눈앞에  떠오르군했다. 나는  조선에서는  공상만했 을뿐이며 실현하지 못한 후대교육교양사업을 카자흐쓰딴에서 실현하게 되었고 따라서 적은 힘이나마 다민족국가인 카자흐쓰딴번영발전에 기여하게 된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기는 동시에 내가 젊은이들과 보다 효과적으로 일할수 있도록 나에게 많은 실무적인 도움을 준 경험많은 카자흐쓰딴 선배들에게 큰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그리고 정말 말로서 표현하기 어렵게 기쁜 보람을 느끼는것은 수년이 지난 오늘에도 신년이면 그 먼곳에서도 많은 제자들이 나를 찾아 온다는것이다. 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속 한켠구석에  나 라는 인간이 있었다는  자그마한 흔적을 남기게 된것을 큰 영광으로 여기고있다. 지금 나의 제자들은 나를 대리하여 광할한 지역에서  일하고 있으며 나는 먼 타향인  카자흐쓰딴에서  젊은이들과 함게 정열적안 청춘시절을을 보낸것을   조금도 서러워하지 않는다.

카자흐쓰딴에 거주하는  100여민족이  신앙의 여하를 불문하고 민족간 불상용적 모순이 없이 화목하게  지내고 있다는것은 나자르바예브대통령의 탁월한  다민족국가정책의 결과이며 나는 해마다 신년이면 찾아오는 대학생 후배들과 함께 그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며 축배를 든다.                                 

김종훈